#149. 그만한 이유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강남은 하루가 멀게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칠구는 그의 패거리와 함께 세력이 약한 조직부터 하나씩 접수해 가고 있었다. 다시는 회생이 불가할 정도로 잔인하게 구역 조직원들을 짓밟았다. 그 소문이 얼마나 무섭게 났는지 칠구에게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반면 육팔은 조용히 구역들을 접수해가고 있었다. 갖은 협박과 회유로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피 한 방울도 보지 않고 클럽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다 한 대형 클럽하우스를 접수하러 온 칠구와 협상테이블에 앉아 조근조근 회유를 하고 있던 육팔이 한 자리에 만나게 되었다.
칠구가 조직원들을 데리고 몰려온다는 소식이 육팔에게 전해지고, 육팔은 칠구의 소문을 이용해 협박하기 시작했다.
“얘기 들었으면 어서 여기에 도장 찍지. 더 늦으면 당신 애들 보존도 못해. 어서.”
“네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맞은편에 앉은 클럽의 보스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육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사? 참,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야?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내 동생은 나처럼 점잖지가 못해서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야. 그래도 좋으면 우린 돌아가고. 나야 상관없으니까.”
망설이던 클럽의 보스는 바깥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전해오는 소리가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헐레벌떡 들어온 한 조직원이 보스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형님, 역부족입니다. 여길 어서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젠장······. 김 실장이라고 했나? 여기다 도장을 찍으면 되는 거지?”
보스는 서둘러 지장을 찍으려 서류를 끌어당기는데 육팔이 휙 서류를 낚아채 가져갔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시간이 오버가 됐네. 벌써 내 동생이 여길 접수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았어야지. 이제 나가서 내 동생을 맞아줘야 해서.”
육팔이 엉덩이를 떨며 일어서려는 것을 보스가 붙잡으며 애원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애들······ 아니, 나 좀 살려주게. 돈도 필요 없어. 그냥 우리 애들과 나만 무사히 나가게 해주면 돼. 제발 부탁이야.”
“그래? 돈도 필요 없다는 거지?”
“물론이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부탁하네.”
“그럼, 좋아.”
육팔이 손을 뻗자 덕팔이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그 서류를 보스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여기에 찍어.”
“이게 뭔가?”
“클럽 양도서류지, 뭐야. 아무 조건 없이 우리에게 넘긴다는.”
“아니······ 그래, 알았어.”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보스는 아무 말 못하고 벌벌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며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덕팔이 서둘러 서류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러는 순간 문이 박살나며 조직원 한명이 날아 들어와 처박혔다. 그 뒤로 칠구가 개선장군처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이고, 동생이 고생 많네.”
육팔은 반갑게 칠구를 맞았지만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칠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자식, 성질머리하고는······. 형님을 봤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지. 욕이 인사도 아니고. 쯧.”
간신히 화를 참으며 칠구가 입을 뗐다.
“여기서 볼 줄 몰랐네요. 형님. 보셔서 알겠지만 이곳은 제가 접수를 했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시죠.”
“접수? 이걸 어쩌나? 내가 벌써 양도를 받아냈는데. 우리 동생 덕분에.”
“뭐라고?”
얄밉게 놀리듯 말하는 육팔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방 날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 칠구였지만 쉽사리 그러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등치가 산만한 덕팔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쉽게 상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왜? 우리 같은 식구끼리 협력해서 얻은 성관데. 안 그래? 그럼, 난 바빠서 먼저.”
일전에 당한 것에 비해서는 약했지만 그래도 한방 먹였다는 생각에 고소한 육팔은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덕팔도 칠구를 놀리듯 혀를 날름거리며 육팔의 뒤를 따랐다.
비아냥거리며 나가는 그들을 보니 속이 배배꼬인 칠구는 어떻게든 화를 풀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때 뒤늦게 방을 나가려던 클럽 보스와 조직원들이 눈에 거슬렸던 칠구는 분풀이를 그들에게 제대로 하였다. 방안에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럽하우스에서 나온 육팔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덕팔은 차를 출발하며 육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자식 그냥 저렇게 두실 겁니까?”
“당분간 두고 보자. 저 자식 덕분에 우리 일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잖아. 다음은 어디인지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해. 칠구 저놈 눈치 못 채게 잘 하고.”
“예,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근데 큰형님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저렇게 망나니처럼 들쑤시고 다니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지금은 쉽고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큰 화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놈들이 그냥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언젠가 우리 등에다 칼을 꽂을 수도 있습니다.”
여유롭게 창밖을 보며 육팔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문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덕팔아, 그게 무서우면 이 장사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어쩔 수 없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자. 수습은 그 다음에 해도 된다. 무슨 방도가 있겠지. 형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게 아닐 거야.”
“예, 알겠습니다. 큰형님께 가실 겁니까?”
“그래, 지금까지 양도 받은 서류들 정리해서 보고 드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도 넌지시 알아볼 겸.”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에 앉은 육팔을 넌지시 바라보는 덕팔의 눈가 주름이 활짝 펴졌다.
***
중식당 앞을 서성거리며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강석진은 이내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홀을 지나 특실 앞에 멈춰 선 석진은 목을 가다듬고는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강석진입니다.”
그곳엔 파랑머리와 노랑머리 패거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십여 명이 줄지어 앉아 요리를 먹고 있었다. 보통 때와 달리 푸짐한 한상이 차려져 있는 모습에 석진은 살짝 놀랐다. 파랑머리 두철은 갑작스런 석진의 등장에 의아한 듯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를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어보았다.
노랑머리 대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코빼기도 안 보여서 소희한테 차이고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은 줄 알았는데······.”
제 딴엔 재밌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지만 파랑머리 두철은 어이없다는 듯 흘겨보고는 석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닥거렸다. 석진은 곧바로 두철 앞으로 달려가 섰다.
“그래, 잘 지냈냐? 소희한테 차이고 일진들한테도 물먹었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그게······. 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형님들, 저 좀 받아주십시오.”
“야, 우리 살림도 빠듯하다. 그리고 고삐리는 안 돼. ······그렇지?”
자신이 말하고는 눈치 없이 나선 듯해 대진은 얼른 두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입 다물라는 듯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는 두철을 보고 대진은 눈을 깔았다.
“우린 고삐리는 안 받는다. 자퇴를 하고 오던지. 졸업을 하고 오던지. 근데 요즘 소희한테 무슨 일 있냐? 아, 넌 모르겠지.”
“제가 아무것도 없이 왔겠습니다. 바로 소희 일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소희가 제 자리를 꿰차고 않아 있지 않습니까. 칠구형님의 뒷배를 제대로 타고 말입니다. 아무튼 요 며칠 전에 소희 패거리들이 정체 모를 남자들한테 당했다지 않겠습니까?”
“정체 모를 남자? 그게 누군데?”
이번에도 대진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궁금해 나서서 물었다. 두철은 대진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야, 너 바보야. 정체 모를 남자들이라고 하는데 누구냐고 물으면 어떡해? 제도 모르는 거지. 알면 정체 모를 이라고 했겠냐? 아이, 이걸 친구라고 데리고 다니는 내가 바보지. 그리고 조용히 좀 있어. 내가 묻고 있잖아.”
“미안, 알았어. 입 닫고 있을 게.”
입에 지퍼 닫는 시늉을 하며 대진이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도 누군지 모릅니다. 그 일로 소희 빼고는 팔 다리 하나씩은 성한 곳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한테 그 일을 맡겨주시죠.”
일순간에 두철의 미간이 찡그러지자 석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일? 이 자식이······ 제 때 잘 왔어. 자식,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네. 사실 그 일로 골치가 아팠거든. 소희 그년 하는 짓이 영 꼴 보기가 싫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고거 쌤통이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잘 했네.”
두철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보였는지 대진은 그새를 못 참고 또 다시 나서서 말했다.
“맞아, 맞아. 그년이 칠구형님의 힘을 등에 업고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우리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 알았어.”
살기어린 두철의 눈빛에 놀란 대진은 곧바로 말을 멈추고 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셨습니까? 제가 그런 줄 알았으면 빨리 찾아올 걸 그랬습니다.”
“그래, 수급이 좀 딸려서 엄청 깨지고 있었거든. 거기다 엄한 일만 시키는 놈들이 붙어서 좀 고생이 많았다. 우리가.”
“엄한 일이요?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 묻는 석진의 물음에 두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건 몰라도 돼. 그럼, 네가 그 일을 맡고 싶단 얘기지?”
“예, 형님.”
석진은 큰소리 대답하며 허리를 굽신 거렸다.
“알겠는데. 소희 걔가 걸린다······ 아니, 그년 보다는 칠구형님이 신경 쓰인다는 거지. 형님께 보고하고······. 아니다. 요즘 형님이 바쁘셔서 만나기도 힘들어서 말이야.”
“칠구형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요즘 강남판을 휘젓고 계신다. 저승사자라고 들어봤냐?”
“저승사자요? 강남판이라면······. 아하, 예. 뭔지 알겠네요.”
“자식, 네가 알긴 뭘 알아?”
두철이 장난스럽게 나무젓가락을 석진에게 휙 던졌다. 석진은 재빠르게 나무젓가락을 잡아서는 도로 두철 앞에 놓았다. 그 모습에 두철이 모처럼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좋았어. 칠구형님께 내가 나중에 잘 설명 드리면 되니까. 일단 일 진행해. 이틀 후에 바로 필요한데, 할 수 있겠냐?”
“이틀이요? 몇 명이나?”
“세 명. 이 정도도 못하면 거기 서 있지 말고, 나가. 그러면 그냥 없었던 걸로 할 테니까. 대신 앞으로 내 눈에 띄면 넌 죽는다. 알겠지?”
도로 살기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는 두철에게 석진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형님.”
“좋았어. 내가 장소와 시간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 애들 준비해서 대기해. 알겠지?”
“예, 형님. 감사합니다.”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 석진에게 두철이 식사나 하고 가라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며 서둘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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