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정인의 선택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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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실내포장마차에서 남궁이한 경위와 박동식 경위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동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동식의 얘기를 끊지 못하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마. 팀장님도 말하다 보니까 감정이 격해져서 그러셨을 거야.”
“네가 직접 안 당해봐서 그래. 왜 매번 나한테만 그러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술잔을 들려는 동식을 이한이 말렸다.
“야, 천천히 마셔. 방금 마셨잖아. 그러다 취하겠다. 취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일 출근하면 네가 먼저 사과드려. 그래도 상급잔데······ 어쩌겠어? 계급이 깡패잖아.”
“아이, 더러워서 정말.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야, 뭘 때려치워? 정신 차려.”
이한이 잡고 있던 팔을 빼서 술을 마시고는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는 어때?”
“뭐가?”
“정인 씨랑 잘 되고 있냐고?”
“어? 갑자기······. 뭐, 잘 지내고 있지. 아! 저기, 잠깐만.”
그제야 이한이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왜? 전화 왔어?”
“아니······ 벌써 왔다갔다. 큰일이네.”
“뭐가? 무슨 일인데?”
“아니, 사실······.”
동식은 놀란 눈으로 이한이 앉아 있는 뒤를 쳐다봤다.
“어! 정인 씨······.”
“뭐라고?”
이한이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정인이 보였다. 이한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게 지금 중요해? 왜 전화는 안 받아?”
“미안해. 온 줄 몰라······ 아니, 받을 사정이 안 됐어. 정말 미안해.”
“또 동식 씨랑 있었던 거야?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지수대에 연락했더니 동식 씨랑 여기 있을 거라고 해서 왔어.”
“그랬어? 일단 자리로 가서 얘기해.”
“정말······. 이러기야?”
“미안해. 오늘 동식이 팀장한테 엄청 깨졌다고 해서······ 위로해준다는 게······. 이렇게 시간이 간 줄 몰랐지 뭐야.”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정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동식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동식도 일어나 반갑게 정인을 맞았다.
“정인 씨, 어서 와요.”
하지만 정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자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미안해요. 혹시, 나 때문에 이한이 정인 씨를 못 만나러 간 겁니까?”
그제야 정인은 애써 웃음 지어보였다.
“아니······ 아니에요. 오늘도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이한이 벌써 고자질 한 겁니까? 아무튼 저 자식은······.”
뒤늦게 자리로 오는 이한에게 동식이 손가락질하자 정인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이한 씨가 제 전화를 안 받는 날이면 꼭 이렇게 동식 씨랑 술을 마시고 있어서 말이죠. 그것도 동식 씨 일로······.”
겨우 웃으며 얘기하던 정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걸 눈치 챈 이한이 급히 끼어들었다.
“정인 씨.”
동식도 모르는 것은 아니라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소연 할 친구가 이한 밖에 없어서 그랬습니다. 정인 씨가 이해를 좀 해주세요.”
“물론이죠. 이해하니 제가 직접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어요.”
동식은 멋쩍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 씨, 왜 그래? 동식이 민망하게. 동식아, 미안하다. 정인 씨가 나한테 화가 많이 나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해.”
정인이 이한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서 그래?”
“정인 씨, 그건 나중에······.”
난처해하는 이한을 보고 동식이 짓궂게 되물었다.
“왜?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래?”
“오늘이 말이죠, 우리······.”
정인이 말하려는 것을 낚아채듯 이한이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술 좀 더 시킬까? 여기요! 술잔하고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정인은 이한을 흘겨볼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정인에게 눈짓으로 미안하다 말하며 이한은 탁자 아래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시 서먹하고 냉랭했던 자리는 술기운에 사르르 녹아 어느새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정인과 이한의 웃음소리는 동식의 귀에 계속 거슬렸다. 이한이 화장실에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취한 동식이 게슴츠레 눈을 떠서는 정인에게 물었다.
“이한이랑 우연히 만났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아니죠? 이한이 먼저 정인 씨한테 접근한 거죠?”
“접근이요?”
“아, 미안해요. 직업병이에요. 우연인 척 이한 그 자식이 정인 씨를 찾아간 게 아닌가싶어서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게 말이 좀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맞아요. 우연 아니에요.”
우연이 아니라는 정인의 말에 동식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그렇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자식······ 아니, 이한이 진작 정인 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였어. 그죠? 우리 소개팅 그날······.”
동식의 말을 정인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요. 이한 씨가 아니라 제가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게 맞아요.”
술에 취해 눈이 풀려있던 동식의 눈이 번쩍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에요. 제가 처음 소개팅에서 이한 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거든요. 그런데 유학 중이어서 이한 씨에게 동식 씨 말대로 접근할 수가 없었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동식은 술을 들이켰다. 정인은 그날을 회상하듯 말을 이어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한 씨를 찾았어요. 지수대에서 일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으니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죠. 사실 유학 중이라 곧 잊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유학 내내 이한 씨가 궁금한 거예요. 보고 싶고. 내 마음을 모르겠더라고요. 왜 이러는지? 그래서 유학 마치고 와서 바로 만나보고 싶었어요. 내 감정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거든요.”
“정인 씨가 일부러 이한에게 접······ 아니, 우연을 가장해서 이한 앞에 나타났다는 겁니까?”
“네, 맞아요. 내 말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정말이에요.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척 했어요. 한 세 번 정도 그렇게 우연히 만난 척을 했죠. 그 정도면 눈치를 챌 줄 알았는데 이한 씨는 정말 우연히 만난 줄 알더라고요.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걸요? 그만큼 순수한 면이 있어요, 우리 이한 씨.”
떨떠름한 동식은 애써 웃어보였다.
“그랬군요. 근데 이거 하나 물어볼게요. 왜 나는 아니었어요? 한번 만나고 바로 퇴짜를 놓은 이유가 뭐예요?”
“그걸 정말 모르세요?”
“그건 또 무슨······.”
그때 이한이 자리로 돌아와 동식은 더는 묻지 못하고 술잔만 기울였다.
“뭐야? 나 없는 사이에 내 욕한 거야?”
“아니야. 예전에 우리 만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가 우연히 만난 날 말이야.”
“아, 그거. 뭐야? 그걸 또 물어봤어? 자식, 나한테도 몇 번을 물어보더니. 내말을 그렇게 못 믿더라고. 내가 일부러 정인 씨를 찾아갔다고 생각하는지, 참. 어? 야? 동식아.”
연거푸 술을 들이키던 동식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가볼게. 정인 씨, 죄송합니다. 두 사람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네요. 이한, 미안. 내일 보자.”
“갑자기 왜 그래?”
일어서려는 이한을 정인이 팔을 잡으며 말렸다.
“네, 동식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이한은 정인과 동식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동식은 헛웃음을 지으며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경위님, 주무세요?”
화장실을 다녀온 후배가 엎드려 있는 박 경위를 흔들어 깨웠다.
“아니, 아니야.”
“뭐가 아닙니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그만 들어가셔서 주무시죠.”
“어, 그래. 그러는 게 좋겠네.”
일어서려던 박 경위의 몸이 휘청거리자 후배가 빠르게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에 전화 한통을 받았는데요.”
“무슨 전화?”
“금남경찰서에서 경위님 사건을 사건 종결하겠다고 했답니다.”
“사건종결? 벌써? 범인을 잡은 거야?”
“아니요. 단순 교통사고로 경위님을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겠답니다.”
“뭐? 날 사망 처리한다고?”
“네. 차라리 잘 된 게 아니겠습니까? 놈들도 경위님이 죽은 지 알거 아닙니까? 당분간 숨어 지내시면서 진범이 누군지 찾으면 될 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후배는 말없이 박 경위를 바라봤다.
“그게 아니지. 내가 살아있다는 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어. 날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겠다는 건 날 진짜로 죽이겠다는 소리겠지.”
***
비명소리에 수연과 민철은 곧바로 이한의 병실로 달려갔다. 송이는 이한의 어머니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송이학생,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가······ 할머니가 의식이 없으세요.”
“뭐라고요? 민철학생, 빨리 의사를 불러요. 어서.”
“네.”
민철은 병실을 뛰쳐나가며 의사를 불렀다. 그 사이 수연은 병상에 누워있는 이한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의 상태는 이상 없어 보였다. 수연은 송이와 함께 이한의 어머니를 보조침대에 눕혔다. 얼마 있지 않아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수연에게 말했다.
“잠시 기절을 하신 것 같습니다. 외상은 없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겠어요.”
“할머니.”
눈을 뜬 이한의 어머니를 보고 송이가 다가섰다. 의사도 곧바로 어머니를 다시 살폈다.
“어르신,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의사 선생님, 저는 괜찮아요. 그것보다 우리 이한은 괜찮나요?”
이한의 어머니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아들을 살폈다.
“걱정 마십시오. 자제 분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의사는 어머니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아니······ 그게. 말해도 믿지 못하실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뭐든지 말씀해 보세요.”
자신도 반신반의한 듯 이한의 어머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에요. 아들 옆에서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갑자기 시커먼 것이 눈앞에 있지 않겠어요. 깜짝 놀라 일어서서 뒤로 물러나는데 그게 움직이는 거예요. 마치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기절한 것 같아요. 그 뒤로 기억이 없어요.”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한의 어머니 얼굴을 살폈다.
“지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죠? 선생님.”
“아니, 아닙니다. 눈을 감고 있다 갑자기 눈을 떴을 때 잔상이 뿌옇게 보일 수도 있거든요.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요.”
“아니에요, 선생님. 정말 사람 모양이었다고요. 아, 그래요. 사람 그림자 같았어요.”
“그림자요? 누가 병실에 들어왔다는 말씀입니까?”
“아······ 그건 못 봐서. 근데 아무도 없었어요. 누가 들어왔으면 제가 알았을 거예요.”
“일단 알겠습니다. 만약에 똑같은 형상이 또 보이시면 정밀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는 회진이 있어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이한의 어머니는 나가는 의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송이와 수연을 바라봤다.
“자네들도 내 말을 못 믿겠지?”
수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믿어요. 그럴 수 있죠.”
“그래? 내가 본 게 뭘까? 이한의 영혼은 아니었을까?”
“이한 씨 영혼이요.”
되뇌듯 말한 수연은 누워 있는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한의 어머니도 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이한의 병상 위에 시꺼먼 게 있었거든. 마치 이한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야. 영혼이 보인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내가 더 놀랐지 뭐야. 우리 아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 떠나는 게 아니지 싶어서 말이야.”
이한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수연은 어머니를 품에 안고는 등을 쓸어내렸다.
“아니에요, 어머니. 이한 씨는 꼭 깨어날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마세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송이도 눈물을 삼켰다. 그림자는 병상 아래 그늘에 숨어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민철은 잠시 병실 안을 둘러보더니 송이에게 말을 걸었다.
“송이야, 방기철 형사님 못 봤니?”
“방 형사님은 왜?”
“병실 밖에선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어디 갔지? 병실에 안 들어온 건가?”
그때 문자알림 소리가 들렸다. 송이는 문자를 확인하고는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아저씨한테 문자가 왔어요.’
‘나한테?’
‘네. 이한이라고 쓰여 있어요. 만나자는 문자예요.’
‘어디······. 아니다. 알았어. 수연 씨 좀 불러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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