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지금의 나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교실로 돌아온 송이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뒤늦게 들어온 민철은 송이에게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그냥 자신에 자리로 가 지켜보기만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뒤척이던 송이는 고개를 들어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송이야, 그게······.’
‘뭐라고 말을 해주셔야줘. 만나지 말라고. 그 형사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래.’
‘그럼, 뭐예요? 아저씨랑 박동식 형사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 모르겠다고 했잖아.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너한테 뭐라고 말 못하는 것뿐이야. 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결정한 거니, 만나기로?’
‘몰라요. 몰라서 그러잖아요, 나도.’
‘미안하다, 송이야.’
‘그 말 듣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요. 그 형사를 만나야 하는 거예요? 그 형사가 뭐라고 할지 겁이 난다고요, 나는.’
정말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송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아저씨랑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게 말이 되는지. 왜 아저씨가 자신의 그림자가 된 건지. 정말 아저씨가 아빠를 죽인 사람이면······ 아니, 아빠를 죽인 사람을 도운 사람이라면······. 상상만 해도 숨이 탁 막히는 생각들로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정말 이런 게 신의 장난이라는 걸까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방기철 그 형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줄 거라고, 그렇게······ 그렇게 아저씨의 말만 기다렸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어떻게 어젯밤부터 한마디를 안 하냐고요? 정말 아저씨는 누구예요? 어떤 사람인 거죠?’
송이는 감정을 주체 못하고 책상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걸 본 민철이 곧바로 달려와 물었다.
“송이야,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야?”
대답 없이 송이는 울기만 했다. 민정이 와 민철을 말렸다.
“그냥 둬, 민철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
“어, 그래? 알았어. 나는······.”
“빨리.”
“알았어, 그래.”
민정의 손짓에 민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걱정스런 얼굴로 송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런 민철을 보고 동진은 팔을 툭 치며 물었다.
“이래도 아니라는 거냐? 아니, 그래. 사귀는 건 아니어도 너는 분명 송이를 좋아하는 거야. 지금 네 눈빛을 보면 딱 알겠는데, 뭐.”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송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게 걱정이지.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냐? 참. 아무튼 너는 언제 클 거니? 그러니 민정이가······.”
동진은 민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았어. 자식이 꼭 불리하면······. 그래,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히죽 웃어 보이는 민철에게 동진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튼 이 자식은 이럴 때 정말 얄미워 죽겠다니까. 아우, 얄미워.”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민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송이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훌쩍이는 송이의 울음소리에 그림자는 어쩌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만 울고 내 얘기 좀 들어줄래. 너는 알거라고 생각해. 그래, 너는 과거의 나는 몰라도, 같이 지내는 동안 내가 어땠는지 잘 알거야. 그치? 그러니까 과거의 나는 못 믿어도, 지금의 나는 믿어주지 않을래? 이렇게 밖에 말 못해 미안하지만 네가 지켜본 나는 어떤 사람······ 아니, 어떤 그림자였니? 그렇게 나쁜 사······ 아니, 그림자는 아니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의 나를 믿어주지 않을래? 만약 과거의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건 나중에 내 죗값은 내가 꼭 치룰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 방기철 형사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가 뭘 알고 있는지 그걸 확인해봐야겠어. 정말 내가······. 그리고 박동식 경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이야.’
그제야 송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어 그림자에게 말했다.
‘이제야 아저씨 같네요. 왜 그런 거예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줬으면 됐잖아요. 나빴어요, 정말.’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나도 어젯밤부터 내내 그 생각만 했어. 나는 과거 내가 어떤 사람인가만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방금 너의 말을 듣고 깨달았어. 예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그림자로 너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은 아니니까. 그걸 너는 믿어줄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송이야.’
코를 훌쩍이며 송이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내가 미안해. 빨리 그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고맙다, 송이야. 날 믿어줘서.’
‘아니에요. 아저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한 번도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적 없어요. 그저 잔소리가 심한 아저씨라고······.’
피식 웃음이 나와 자신도 울다가 웃는 것이 민망했는지 송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림자를 힐끔 바라봤다.
‘괜찮아. 맞는 말인데 뭐. 내가 한 잔소리했지.’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송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요. 아무튼 그걸 잊지 마세요. 아저씨는 착한 사람······ 아니, 착한 그림자라는 걸요. 아저씨 말대로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말이죠. 그리고 아저씨가 한 말은 꼭 지키세요. 만약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 죗값은 반드시 받겠다고 한 그 말이요.’
‘그래, 그렇게 할게. 너한테 약속할게.’
‘꼭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송이가 새끼손가락을 펴서 그림자에게 내밀었다. 그림자도 새끼손가락을 펴서 송이의 새끼손가락에 가져갔다.
‘잠깐 나가서 전화하고 올게요.’
‘방기철 형사?’
‘네. 약속 잡으려고요.’
‘어디서 만날 생각이야?’
‘사람들이 많은 곳이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생각해 둔 곳이 있어?’
송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금남천을 따라 길게 조성된 둑길 위로 오색 장미들이 활짝 피워있었다. 아직 장미축제 기간이 아니었지만, 예상과 달리 일찍 장미가 개화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길 아래 조성된 수변공원에서는 축제준비를 위해 장미들 사이사이에 여러 가지 조형물들을 설치하고 있었다. 민철과 송이는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저기 장미 좀 봐봐, 송이야. 노랑 장미도 있어.”
“그러네. 아직 축제기간도 아닌데 벌써 다 폈네.”
“그렇지. 장미향이 너무 좋다. 이런 곳에서 너랑 같이 걸으니까, 꼭······ 데이······.”
주변을 살피던 송이는 민철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잠깐만, 민철아. 너는 이쯤에 있는 게 좋겠어.”
“아니 왜? 같이 가자니깐.”
“안 돼. 너까지 위험할 수 있다고.”
“뭐야? 그럼 너 혼자는 더 안 되지.”
“얘가 왜 이래? 여기 오기 전에 말했잖아, 나 혼자 만나겠다고.”
“누굴 만나는데 그래? 뭐야?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데?”
“넌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아저씨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말고. 만나고 와서 다 말해줄게, 어?”
“너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그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게. 그러면 되잖아.”
“너도 참. 대신에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면 안 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널 크게 부를 테니깐 그때 도우러······ 아니, 경찰에 신고를 해. 알았지?”
“그래, 알았어. 너 먼저 앞장 서.”
“응.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야 해. 알았지?”
민철의 대답을 듣고서야 송이는 앞서 걸어갔다. 민철은 앞서 가는 송이를 한참을 지켜보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 싶을 때 바로 뒤따랐다. 송이는 방기철 형사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림자에게 말했다.
‘이곳 괜찮죠?’
‘나쁘진 않은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가 않네?’
‘아니에요.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에는 사람이 꽤 있을 거예요. 아직 축제기간이 아니라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장미가 벌써 이렇게 활짝 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을 거예요.’
‘그래, 알았어. 그래도 혼자 괜찮겠어? 왜 또 거짓말을 했어? 민철이 말대로······.’
‘그건 제가 싫어요.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했으니 그 얘기는 더는 하지 마세요.’
말하면 더 잔소리라고 할 게 뻔해 그림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로 둘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림자가 송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런 걸 지금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궁금해서 말이야.’
‘뭔데요?’
‘너도 민철이 마음을 알고 있는 거지? 그때 다 들었지?’
‘뭘 들어요? 몰라요.’
‘들었네. 그치? 너도 민철이 좋잖아. 민철이 마음도 알았고. 그래서 민철이 위험할까봐 멀리서 지켜보라고 한 거고.’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신데요?’
바로 아니라고 하지 않는 송이를 보고 그림자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대화하는 것 들어보면 뭐랄까?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라고 할까? 서로 조심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배려를 하고 있었어. 바라보는 눈빛도 많이 달라졌고. 아니, 보기 좋아서 그래. 나는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해. 꼭 남자가 먼저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민철이 저 자식, 보기엔 저렇지 완전 숙맥이야. 나 같았으면 바로 너한테 고백했을 텐데.’
‘예전 일 때문에 그럴 거예요.’
‘예전 일?······. 아, 너희 엄마가······.’
‘아니요. 저 때문이에요. 아무리 엄마가 만나지 말라고 했다고 그렇게 헤어지는 건 아니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때는 어려······.’
‘그래요, 어렸죠. 하지만 그때 그 기억 때문에 쉽게 말 못할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어린 친구들이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아. 좋으면 좋은 거지. 누가 너희 둘이 결혼하래? 좋게 사귀라는 거지. 서로 좋은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되면 될 일이지. 참, 이럴 때보면 요즘 애들이 맞나 싶어?’
‘요즘 애들이 어때서요? 그리고 다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이래서 아저씨가 꼰대라는 거예요. 잔소리 대왕 꼰대.’
‘뭐라고? 대왕 꼰대······. 야, 내가 왜 꼰대야?’
‘그걸 정말 몰라요? 그러니까 꼰대라고요.’
송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깔깔 웃음 지었다. 그림자도 송이의 웃는 모습에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양한 크기의 동글한 원 안에 여러 색의 장미들이 곳곳에 활짝 펴있는 공원이었다. 그곳에는 가족끼리 나들이 나와 공원 안을 산책한 듯 거니는 사람들과 장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들로 북적였다.
‘정말 여기는 사람들이 많네.’
‘그렇죠?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근데 아저씨는······ 아, 죄송해요. 여기 와 보셨어도 기억은 안 나시겠네요. 그죠?’
‘그렇지. 내가 여길 와봤을까도 모르겠지만.’
‘왜요? 여긴 연인들 끼리······ 아, 아니에요.’
급하게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얼른 주변을 살피며 방기철 형사를 찾았다.
‘아직 안 왔나 봐요.’
‘그러네. 그리고 안 그래도 돼. 편하게······ 어!’
그때 누군가 송이 뒤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조용히 하고, 나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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