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소모라의 마도린
옅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눈꺼풀을 들어올린 나타샤가 목격한 것은 듬성듬성 이긴 하지만 벽과 바닥 면에 놓여진 수십여의 등불로도 내부에 들어찬 어둠의 과반도 몰아내지 못한 동공의 규모였다.
뒤이어 그 빛 무리 주변으로 흩어져 잠을 청하거나 개인장구를 정비하는 이들의 수효를 헤아려본다.
천명을 채울 수나 있을까 싶은 머릿수.
나타샤가 짐작하기론, 이곳은 북부 산맥 속에 만들어진 방공호 중 하나였다.
보이는 숫자가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눈앞에 이들이 살아남은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보았고 그런 의문들은 다가오는 마법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차이 없는 현실을 담담하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누적되었던 피로덕분에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곤 하지만 마법사가 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를 일.
“대륙의 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 북부만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희 이외에는 풀 한 포기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할 것입니다.”
어떤 근거에서인지 맨탈리온의 자신하는 말귀에 짜증이 올라오려던 나타사였지만 침음을 삼킬 뿐이었다.
“그나마 이곳에 몇 십 년은 버틸 식량과 물품들이 들어차 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공 여기저기에 만들어진 통로들 속, 한 가득 들어찬 밀봉된 나무상자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당초, 피난민들을 위해 구비되었던 것들이지만 지금에선 넘쳐나는 쓰레기 산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남녀 비율을 따져본다면 얼마 동안은 모르지만 이곳에서 장기농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내부 환경에 적응할 즈음 기다라는 소식을 가지고 그녀가 방문했다.
“정착하기엔 좋은 곳이니 그들의 염려는 접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이 추정하는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주는 아드리안의 차분한 음성소리에 주변으로 자리하던 기사들이 울분을 토하였다.
“너희들의 대륙은 멸망했다고 보아도 물론, 땅속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황무지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녕, 그 괴물들이 원하는 것이 뭐란 말입니까?”
“괴물이라··· 어울리는 단어일지도 모르겠구나. 황녀에게 그간의 사정은 들었을 것으로 알지만 설명은 필요하겠지.”
얼마 있지 않아 대기 속에 녹아있는 마나의 기운들을 활용하여 불타버린 대지로 임의적인 생명들이 태동할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 아이템만을 남기며 사라지는 몬스터의 탄생. 그것들은 재생을 반복하지만 좀더 실상을 파헤친다면 구역질 나는 현실이 될 뿐. 비워버린 자리에 체워질 주민을 가장한 NPC라 불리는 존재들은 흔희 저들의 세계에서 말하는 뇌사, 또는 죽음을 판정 당한 세뇌된 영혼. 이방인이라 불리는 그들에겐 이곳이 단지,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자 게임의 장소.
반절이상 얼굴을 가리운 망토 사이로 아드리안의 축약된 예언들이 나열되는 와중에 나타샤를 포함한 모여 앉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메마른 침음 성을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새로운 계약의 내역들.
“황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분 또한 나와 같은 공간 대에 떨어졌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 흔적을 찾는다면 저것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가 돌아간 뒤에도 나타샤의 주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 중 어깨너머로 머리 하나가 더 올라온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전하. 그 이방인의 말대로 따를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저들과 같은 족속이기에.”
하킴의 염려에 마법사도 동조한다는 의사를 표하며 말을 받아갔다.
“하킴경의 걱정처럼 대다수의 이방인들이 현실을 알지 못한 체 일부의 수뇌들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결국, 그 아드리안이란 여인 또한 저쪽 세계, 더군다나 정점에 가까운 이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하지만 뒤이어진 맨탈리온의 반전된 말귀에 모두는 할말을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저희가 결정할 입장도 안 된다는 건 모두들 아실 겁니다. 변덕일지 모르나 그녀의 도움으로 앞으로의 명맥을 이어 가게 된 왕국이기에 협조할 수 밖에요. 하지만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전하의 의견이 우선되어야 함은 논할 필요성도 없다 하겠지요.”
그때 까지 생각에 잠겨 두 눈을 감고 있던 나타샤가 눈꺼풀을 들어올려 자신의 짙은 황금 눈동자에 등불의 불씨를 담아가며 동공내부를 잔잔한 음성으로 채워나간다.
“나타샤 포플란. 과거 너희들이 알고 있던 지금의 이 육신의 이름과는 좀더 다를 수 있겠지만 나 또한 그녀와 같은 것을 경험한 자아를 간직하고 있기에 어쩌면 지금의 상황자체가 자의적인 의지일지도 모를일이다.”
“누누이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당시, 전하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기억 일부가 스며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난다면 지금의 모호한 경계도 바로잡혀갈 것이기에.”
나타샤는 살며시 손을 들어 마법사의 이어질 당부를 제지한다.
“그렇기에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론 카마쟌. 오롯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와의 만남을 말이다. 그녀의 선택지처럼 한동안 NPC라 불리는 이들로 생활하기 위해서라도 정신계열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어두어야 할지도···”
※ ※ ※
이혁은 한 동안 조각상에서 손을 때어 놓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스며드는 영화 같은 장면들은 찰나의 흐름 속에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가며 옅어졌지만 하나의 단어만이 또렷하게 간인되었다.
“아론 카마쟌.”
-파스락~ -
그 순간, 조각상의 얼굴 형상부분에 가느다란 주름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하며 작디 작은 조각들이 균열처럼 떨어졌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당초부터 뭔가를 감싸고 있기라도 하듯이 외피와 같은 얇은 조각들이 우수수 아래로 추락한다.
회색의 먼지들이 내려가며 드러나는 황금 빛깔의 머리카락이 통로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며 희뿌연 살결을 표출시키며 그 형태를 눈 안에 담기도 전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알림 음과 함께 안내 창이 이혁의 눈앞에 떠오른다.
- 띠링!–
<봉인된 황녀를 깨워라!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나타샤 포플란.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곳에 잠들어 있었지만 조건이 충족되어 봉인이 깨어진다. 보상으로 플레이어의 이름이 생성된다. 아론 카마쟌. 그리고 깨어난 황녀를 수하로 거둘 수 있다.
짧은 글귀가 지나가 버린 전면으로 생명력 없던 석상에서 한 순간, 살아 숨쉬는 인간의 형상으로 돌변해버린 여인이 이혁을 향해 숙였던 머리를 들어올린다.
“나타샤?”
그녀와 너무도 닮은 이목구비였기에 멍하니 이름을 불러보는 이혁이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황금색 눈동자는 황당한 표정의 이혁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돌려주었다.
“나타샤 포플란. 주군을 뵙습니다.”
좀 전까지 돌 조각 속에 있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광택이 흐르는 갑옷의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키는 나타샤는 굳어있던 육신을 풀어줄 요량으로 가볍게 몸을 뒤척이며 움직여본다.
단, 한마디였지만 이혁이 이전에 알던 그녀와는 전혀 다는 분위기와 생소한 목소리의 톤이었다.
대답 없는 이혁을 내버려두고선 주변을 돌아보던 그녀가 불현듯 품속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갑옷을 풀어헤친 가슴 결에서 가죽주머니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나름 공간을 늘려주는 마법주머니랍니다. 쓸만한 것들은 챙겨가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자신의 손을 이끌고서 주변으로 널브러진 갑옷과 무구들을 수거하기 시작한다.
“주군. 행동이 그렇게 굼떠서야 앞으로가 걱정이군요. 빨리 빨리 쓸어 담아주세요.”
얼굴과 이름은 이전의 그녀였지만 분명한 것은 말과 분위기 자체가 처음 접하는 NPC란 것. 그렇게 이혁은 서로간에 소개도 재대로 못한 상태에서 그녀의 지시에 따라 한동안 허리를 들어올리는 건 물론, 바닥에서 손과 눈을 때지 못하였다.
“그럼, 아직까지도 마땅한 본거지조차 마련하지 못하셨단 소리군요.”
통로를 거닐며 이혁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 보던 그녀가 급기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선 등불을 들어올려 이혁의 눈을 마주보며 앙다문 입술을 열어간다.
“주군··· 정신차리세요···.”
★ ★ ★
“아론님? ···”
터널 중앙을 흐르는 얕은 물줄기를 바라보던 이혁은 마도린의 부름에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마도린을 따라나선 것인지도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지나간 과거를 희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혁은 마냥 황당할 뿐이었다.
“··· 역시나 정신계열 쪽 마법엔 자신이 없다 보니 얼마 가지 못하는군요. 소란스러움은 사양하고 싶었기에 이런 방법을 쓴 것이기에 양해를 부탁드릴께요. 여기에요.”
마도린은 이혁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은 채 자신의 할말만을 남기고선 수로의 측면에 생성된 입구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문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이혁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망설임 자체가 어떤 빌미를 제공한다 여긴 것일까? 곧이어 이혁도 그 문틈을 넘어선다.
들어선 장소엔 작은 서재와 함께 세 내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마주보는 두 개의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물론, 어지럽게 놓여진 책 더미들이 좁은 통로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누추한 저의 작은 쉼터에 오신걸 환영하는 바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소피아양께 얻어온 차를 대접해 드리지요.”
주방이랄 것도 없었기에 책 더미 사이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마도린을 외면하고선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엉덩이를 밀어 넣던 이혁은 무엇에라도 끌리듯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제목 없는 책을 집어 든다. 년
-아론 카마쟌-
빛의 각도에 따라 마치, 죽어있던 희미한 글씨체가 살아나듯 뚜렷하게 이혁의 뇌리에 각인된다. 놀람도 잠시,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겨보았다.
-드래곤에 의해 만들어진 왕국이자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멸망해버린 역사. 하지만 인간의 잣대로 몇 백 년을 넘어서는 기간, 전 대륙을 아우르며 통치권을 발휘하였기에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신과 마의 전쟁 이후 황폐화된 대륙에 생명을 불어넣어 문명을 꽃피운 첫 왕조로 평가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재앙의 씨앗은 하이얀 카마쟌에 의해 수태되어 수백의 년 수를 넘어서서야 그 빛을 보게 된다. 과거의 인연을 이어받아 아론 카마쟌이라 이름 지어지고···-
-달그락~ 달그락~ -
찻잔을 들어올린 손끝의 떨림에 뜨거운 물기가 마도린의 손등을 적시고 있었지만 이혁의 손에 쥐어진 그것을 바라보는 마도린의 부릅뜬 동공은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로 놓여진 것이었고 집어 든 순간, 해당자의 과거는 물론, 그가 바라는 정보가 활자로 표기되는 고대의 유산. 진실의 책. 그 표지로 당초, 예상도 못한 글귀가 선명한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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