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기억
이혁을 지그시 노려보던 그녀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발걸음을 옮겨갔다. 영문도 모르고서 그 뒤를 쫓아가던 이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에 발음도 되지 않는 잉글리쉬를 입 밖으로 뱉어본다.
“익스큐즈미···”
“그냥 따라오시면 알아요.”
한국인과도 같은 발음과 옥구슬이 굴러가는 음색에 취해버린 이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채 회사의 정문에 대기 중이던 차량에 탑승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운전사가 없는 무인차량은 여인의 수신호와 함께 출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 뵌 적이 있지요.”
갈색 선글라스를 벗어 든, 이십대로 추정되는 금발 미녀가 말문을 열었고 그렇게 그녀의 황금색 눈 망울이 드러나자, 질문에 답할 시기를 놓쳐버린 이혁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처음부터 과거의 기억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글로벌 밀레니엄 사··· GM이라고 하시면 아시겠지요. 그곳 관리부 소속의「셀레나 크라인」이에요. 이혁씨를 이렇게 만난 이유는 저희 게임이 오픈 되면서 최초로 주어진 히 든 퀘스트를 진행하시게 되어 축하와 함께 사세한 설명을 드리려고 찾아 뵙게 되었답니다.”
이혁이 생각하기에도 뭔가 억지 같은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것 같았지만 그런 의문보단, 넘겨받은 필름 형태의 디스플레이 화면에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히든 NPC정보란
명칭: 포플란 나타샤
내력: 북부대륙의 멸망한 왕국의 황녀.
레벨: 알 수 없음.
직업: 내정 총괄 형 or 기사.
만남의 퀘스트 발동조건: 군주특성 보유, 플레이어의 게임 내 이름 부여가 안된 상태.
보유조건: 신뢰,호감도 등의 종합 or 그녀의 의뢰내역을 수행함에 따른 결과치 최종반영.
-
짧은 내역을 한동안 바라보던 이혁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기에 작은 한숨과 함께 셀레나가 말문을 열어갔다.
“처음부터 테스트 개념으로 심어놓았던 인공지능형NPC기에 플레이어들에게 제공될 여지는 없었답니다. 설마, 이혁님과 같이 버그 성으로 게임 네임이 설정되지 않는 상태로 접속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지요.”
발동되는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항목을 말하는 것이리라.
“더군다나 해당 유저 분이 군주 특성까지 부여 받은 상태이니··· 저희 쪽에서도 발동된 이벤트를 중지시키긴 어려웠고요.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 이혁씨를 찾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킬 힘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큰 것을 가지고 있다 보면 다른 플레이어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비밀로 하라는 당부와 더불어.
“지금 이런 만남자체도 형평성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저와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괜히 엉뚱한 곳에 문의한다고 피해나 당하지 마시고.”
이혁이 어느 정도 적응력이 생길 때 까지는 도와준다는 것과 결론적으론, 이 모든 것이 히든NPC의 획득여부에 달려있다는 설명을 마칠즘, 이혁의 숙소가 위치한 골목어귀에 차량이 멈추었다.
“오늘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지금부터 접속하셔서 그NPC의 호감 도나 좀 올려놓으세요.”
열려진 유리창이 올라가며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만 보던 이혁은 그녀의 일방적인 대화 속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지나가 버렸기에 뒤 늦게야 머릿속이 복잡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소 정신이 외출한 상태로 근방에 자리한 카페로 들어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권유로 시작하게 된 가상현실게임. 불면증에 시달리던 이혁에겐 잠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지 몰랐다.
재앙과도 같은 사건들이 도시를 덮치던 시기. 인천공황으로 향하던 이혁이 탄 차량이 전복될 당시의 기억만을 간직한 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시간들, 그런 기억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노이로제와 같은 감정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렇게 재활의 목적으로 시작한 최초의 가상현실게임.
돈 보다는 탈출구의 목적인지도 모를 일. 그렇기에 뭔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고민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 버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이혁은 주문한 차를 받아 들고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 로스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짧은 인사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로그 아웃을 하기 전이었던 여관방에서 눈을 뜬 이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로그아웃 전과 변한 것은 없었기에 NPC라 주장하는 이에게 받은 물건들을 확인하기 위해 도구장을 열자, 저장되어 있는 물건들이 이혁이 눈앞에 내역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쓸만한 검 한 자루-
-마늘 빵: 250개-
-주머니: 87골드 20실버-
따지고 보면 유저들의 것을 자신이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게임의 시작을 풍족하게 한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에 따라선 자신 또한 피해자일 뿐.
그렇게 기분이라도 전환할 마음으로 얕은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을 열어젖힌다.
허술한 울타리들의 경계를 너머, 인적이 없을 것 같은 숲과 시야를 가로 막은 산맥들이 배경화면으로 이혁의 시야를 가득 메워버렸다.
어떤 경로를 거쳐서 뇌파로 이미지가 전송되는지는 모르지만 언론사의 보도처럼 감탄사를 터트려보며 자신의 후각과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들에 한동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관의 1층으로 내려오는 길.
테이블 곳곳에 몇몇의 NPC들의 일률적인 행동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눈길을 끄는 금발의 여인이 창가 쪽 자리에서 이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뭘 하자는 거에요! 좀더 집중해서 휘둘러보세요.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스킬 북이나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해도 능력이 향상되는 건 아니라고 설명 드렸잖아요.”
자신이 구한 목숨이라, 쉽게 죽어버리면 문제라며 더군다나 여행자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체 돌아다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분간은 이혁의 여행에 동참해 주기로 한 나타샤란 이름의 NPC.
-”어느 유적지에선 죽은 주인의 이름을 전해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보도록 해요.”-
갑작스런 그녀의 이벤트적 퀘스트와 함께 길을 나서지만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체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순리라 주장하며 의도치 않은 수행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날도 저물어가니 이만 쉬었다가 가도록 해요.”
산길을 따라 올라가던 중에 발견한 자그마한 공터. 나타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짐 배낭을 던져버리고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는 이혁이었다.
어느 순간, 장작용으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모아와선 불씨를 만들어 놓은 그녀의 빠른 손놀림으로 주전자의 물을 끓어오르게 만들고선 한동안 산 등선으로 사라져가는 저녁노을을 감상하던 나타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 ···”
이혁의 대답을 바란 의문이 아니었던지 그녀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기도 전에 다음 할말을 이어진다.
“이 넓은 숲속에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심판의 시기 전에는 어떠했는지 자체도 지금에선 기억이 희미할 뿐이지만···”
이혁도 게임의 시나리오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정화란 목적으로 가상현실 게임 속, 문명을 이룩하고 있던 NPC들을 청소하던 순간을 학생시절 영상으로 시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전자를 기울여 차 잔에 물을 채우던 나타샤의 푸념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 보였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여행자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신들의 자식이라 칭했다고 하더군요. 뭐, 떠 받들어주길 원했던 발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론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들을 배척하려 했다지요.”
최초의 전쟁.
그들, 신이라 칭하던 여행자와의 싸움이 너무도 무모하단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여행자중 하나가 이야기책 속에나 존재하던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그 벌어진 아가리로 뿜어내던 화염의 불길이 한 순간, 제국의 도심지를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수도에서 외떨어진 산의 정상, 봉화를 올리는 병사들의 눈에 비친 풍경은 불길에 녹아 들어가는 천년 왕국의 종말뿐이었다.
“그 후부터 드래곤들이 대륙을 뒤덮기 시작했다지요. 물론, 이 세계에도 마법사들은 널려있었지만 그래곤 앞에선, 제힘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고 하니 겪어보지 않아도 알만한 상황들이 벌어졌겠지요.”
잠시지만 나타샤란 NPC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혁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는듯 하더니 미소 띤 얼굴로 말문을 열어간다.
“모든 희망도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였어요. 마치, 수면 기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그 진저리 쳐질 정도로 많았던 드래곤들의 자치가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종족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하여 온전한 형태를 간직한 대륙의 북부 포플란으로 모여들었지요.”
-띠링!-
그 순간, 이혁의 뇌리로 알림 음이 들려왔다.
-망국의 황녀,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진행 조건: 이름 없는 플레이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를 찾으십시오. 기여도에 따라 차등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폭풍 전날의 고요와 같이 그 시기가 길지만은 않았어요. 그렇다고 이 세계의 인간들도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지, 북부의 모든 힘들이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마샤날 산맥으로 모여들었고 포플란 황녀의 지휘아래 예상하지도 못한 승리를 쟁취하게 된답니다. 그 날의 이야기가 전 대륙으로 퍼져나가며 회의적이던 생존자들에게도 북부로 향할 힘을 주었겠지요.”
★ ★ ★
“나타샤님. 인원명부 작성은 저녁까지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어느덧 코발 숲 속에 퍼져있던 산악 마을들의 정리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수효 파악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지만 기사의 간략한 보고를 들으면서도 그때까지 엇갈린 두 손을 풀지 않은 채 성벽아래를 주시하던 나타샤의 눈빛이 자리했던 기사에게로 향하자 그 당사자는 답변의 요지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거주지가 배정된 이들 위주로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머릿수라도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선 왔던 길을 뛰어 내려가는 기사의 뒷모습에 한숨짓던 그녀는 공사로 분주한 성벽 사이로 기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몰려드는 원주민들의 물결을 내려다 보며 기억 속에 잊혀졌던 과거의 편린을 되돌려 본다.
그것은 지금에선 구분 짖기 어려운 그녀 또는 타인의 잔상.
그녀의 뇌리 속에 자리잡은 장면들이 과연 자신의 것일까 란 의문도 이미, 오래 전에 접어버린 상태였다.
마왕을 필두로 한, 두발 달린 대지의 종족과의 마지막 충돌 이후 가이아가 떠나버린 뮤리온이라 이름 부르던 세계.가 현제 나타샤가 밟고 서 있는 이곳이자 한때, 신의 수족을 자처했던 드래곤들이 막상, 그 경배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자 자신들이 벌레라 칭하며 치워버리려 한 대지의 종족들을 품에 안는다는 모순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도왕국의 중심부 고돔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 작가의말
항상 뛰엄 뛰엄 올리면서도 면목이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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