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고민들 (꿈)
관리되지 않은 저택을 배경으로 강변에는 작은 선착장과 그 곳에 닻을 내리고 있는 하나의 범선이 보였다.
“대형선박이 들어오기에는 강바닥이 낮아서 의외로 싼 가격에 구입했어요. 그나마 정박할만한 게 나오 정도랄까.”
“소피아. 저 정도라고 하기엔 작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나오란, 원양항해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범선으로 크리스토퍼 골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의 캐럭[카락]과 동일한 사양. 그것을 확장한 개념이다. 3개의 주 돛대와 선창의 하부로 3층의 구조이고 후미가 선미보다 한층 더 추가되어 있다.-
“주군,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3층 구조라고 해도 하층은 무게 추 역할이니 짐 창고가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요.
하류 쪽에 드나드는 선박들은 적어도···”
”그래서 저택은 선착장 때문이라고 치고 저런 배까지 구입한 이유는 뭐야?”
상행을 위한 항해용이면 몰라도 범선으로 강을 건너기에는 이혁이 보기에도 적합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반대편이야 통나무를 엮어서 타고 다녀도 되지만 페임론에서 상단을 하려면 범선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요.
운이 좋게도 이번에 저택과 하나로 묶여 매물로 나왔기에 맨탈리온님께 말씀 드려서 구입한 거에요.”
아직까지 적자상단의 단주. 소피아의 설명을 들으며 선착장으로 다가서자, 많아 보았자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산토나스 콜란트라고 합니다. 콜란트 선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
“매물과 같이 딸려온 콜란트 자작님이에요.
뭐, 따지고 보면 배에서 버티고 계셨지만···이야기를 들어보니 뱃길에 관한 경험도 그렇고 지식도 해박하셔서 이 참에 임시직 선장으로 고용했어요.
하시는걸 봐서 계약을 할건지는 생각 중이에요.”
“소피아 단주. 그렇게 말씀하시면 대양을 누비던 이 콜란트, 고개를 들지 못하겠구려.
그보다 얼마 전 연회에는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아론님에 관한 소문은 귀가 아플 정도로 듣고 있답니다.”
-8년 전, 3척의 범선을 이끌고 레아강을 지나, 동부대륙으로 떠났지만 작년에야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탐험에 빠져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에 경험을 바탕으로 무역업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낡은 저택과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신의 성을 딴 산토나스란 범선을 단보로 자금을 차용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서남부대륙들의 선착장들은 자신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게 하였고 쌓이는 적자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던 중에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상인길드로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이혁은 소피아의 말을 듣고서야 통성명을 하였고 마치, 후원자를 만났다는 듯이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콜란트였다.
“저의 능력을 알게 되시면 앞으로 계획한···”
“콜란트 임시 선장님. 그런 개인적인 이야긴 나중에 들려주시고 저의 주군이 기다리시는 대답부터 해 주시겠어요.”
“소피아 단주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진귀한 모험담과 더불어 시간을 마련하도록 하겠나이다.”
귀족이지만 스스럼없는 말솜씨와 긍정적인 모습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아론님이 배다리를 만드시려는 이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있을 원정으로 소형범선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상인 길드녀석들의 수작이겠지요. 그쪽 놈들이 대부분 서남부 상인연맹이라···
그렇기에 남아있는 기둥들을 이용하여 나무 교각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걸 보고 말하는 것인가?”
일단은 작위를 떠나서 이혁은 반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놓고 있던 여러 귀족들과 족보가 꼬이기도 하였기에···그렇게 혼자만의 푸념을 하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는 기둥들을 바라보았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저것이 유일하지요. 정령사에 의해 만들어진 돌기둥이라 그런지, 다른 나무기둥들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다리를 놓기에는 공사기간이 상당할거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은 줄 사다리를 만들어서 이용할 예정이니 아론님이 이번에 확보하신 인부들만 지원해 주신다면 이틀이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더군다나 백작님과 한배를 타셨다고 들었으니 원정 때까지는 건너갈 다리를 마련하는 것도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이미 삼천 명이 넘어가는 노예들이 아론의 소유가 되었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을 뿐더러, 여왕의 후원세력이기도 한 백작과 동맹을 맺은 타국의 왕족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노예 병들을 도시로 들이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거 아닐까요.”
잠자코 있던 소피아의 말이었지만 도착하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마법사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결론을 내려주었다.
“하니발경이 알아서 하기로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보다 지금 건너가 보시겠습니까?”
☆ ☆ ☆
3천명의 노예 병들이 흙더미에서 뒹굴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태. 중요부위만을 가린 채, 줄에 묶어 줄지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가축을 잡고 만들어낸 핏물을 채찍질 자국처럼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 그려놓고 있었다.
“한슨. 이게 최선일까?”
하니발의 물음에 한슨이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도시를 지나야 하니 시민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 동정심이란 감정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니발경, 별 걸다 물어보십니다. 뭐. 자신보다 못한 이들에게 느끼는 자기만족이나 자아도취쯤···”
“자네 말대로 일종의 대리만족이나 우월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본능이 아닐까?
저들은 날 때부터 노예 병이란 의무로 키워져 결국에는 이유도 모른 채, 죽거나 돌팔매질을 당하니 제삼자인 우리가 볼 때는 약자요 동정의 대상이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이나 잭슨장군이란 자 또한 나에겐 저들과 동일한 감정이 느껴진다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얼마 전 그를 다시 한번 만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더군. 신념의 차이는 알겠지만 무지란 것에는 답이 없다고 할까···안타까워 지는 마음까지 들더라고.”
“이미, 하니발경은 잭슨이란자를 약자로 보고 있으니 그런 감정이 당연할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너무 이야기를 돌려서 한 것 같은데··· 한슨, 자네는 그 당시 이방인들이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존재란 걸 모르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 이방인들은 자신도 모른 채, 살인자가 되었을 뿐이지 않을까? 만약, 진실을 안다면 어떤 마음들일까? 그렇다면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피해자요 동정의 대상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더군.”
“말도 안 되는 괴변입니다. 죽어간 이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험가들이 죽지 않는 존재들이란 소리를 성을 출입하던 상인과 용병들에게 들었을 때는 의심을 했지만, 아침나절에 패큐니아에게 물었을 때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요.”
“그럼 왜? 그녀를 그대로 보내었나?”
“그걸 저보고 물어보시는 겁니까?저나 다른 이들이 손을 쓰기 전에··· 그런 이유로 수련기사란 구실을 주셨던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군. 그녀는 이미 우리가족이나 마찬가지이다.”
“···저는 하니발경을 따르기로 했다지만 다른 놈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서열상 자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그리고 결론이랄 수도 있겠군. 복수할 상대방은 제대로 찾아가자는 말이 하고 싶었다네.”
“아무튼, 하니발경이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 나타샤님은 알고 계십니까?”
“통신구로 연락은 해 두었으니 고민은 하시겠지.”
그 순간, 기사 발거스가 뛰어와 출발준비를 마쳤음을 알려왔다.
“보기에도 끔찍한 몰골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재대로 먹지도 못했기에 연습도 필요 없을 겁니다.”
발거스의 설명을 들으며 피로 범벅이 된 몰골로 분장된 노예 병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니발. 잊었던 것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한슨. 채찍질 좀 할 줄 아나?”
“그런 취미는 없었습니다.”
“이 참에 배워봐도 상관없겠지. 땅바닥만 두드려줘도 효과가 있을 거야.
나야 영웅이란 이미지가 있으니··· 한슨. 자네 말대로 약자를 향한 동정심이란 감정을 끌어보도록 하라고.”
“··· ···”
그렇게 페임론의 성문을 향해 3’852명의 걸어 다니는 시체의 형상들. 노예 병들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죽어라! 벌레 같은 놈들!”
몇몇 이들은 노예 병들에게 돌을 던졌지만 의외로 끔찍한 몰골과 간간히 들려오는 채찍질 소리에 해코지할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날아오던 것들도 목표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한슨이나 일부의 기사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쪼개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퍼포먼스를 끝내고 아론들이 기다리는 인적이 드문 상류지점으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하니발경! 어떻게 저렇게까지···”
“소피아양. 그렇게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 마시기 바라오. 기사들도 가축핏물로 분장시킨다고 힘들었으니.
한슨! 잡았던 고기는 전부 구워서 주린 배들이나 채워주자고.”
“우선은 강물에라도 들어가서 씻기기라도 하세요. 입을만한 옷과 식사는 준비시켜 놓을게요.”
“소피아 단주가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야. 그보다 주군은 어디 가셨소?”
저택은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선착장을 낀 마당이 3천명을 수용할 정도로 넓었기에 토마일을 포함한 수십의 용병들이 천막 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단장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것들의 잠자리까지 만들어야 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군.”
갈색 수염을 쓸어 내리며 불명을 털어놓던 자캄은 묵묵하게 천막의 기둥을 세우고 있는 토마일을 바라보았다.
“자캄.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을 거면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뭐, 나야 판 상회일로 호위 겸 따라온 거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그보다 정말 던전에 희망이 있다고 보시나?”
“네놈이 몰라서 그렇지 저분들이 가신다면 성공한 거나 다름없달 까···”
“하니발경의 신위는 알고는 있지만 상인길드의 말마따나 소드마스터 한 명이 있다고 백 년 동안 닫혀있던 마굴이 열리겠나?
엄한 애들 목숨이나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리고 죽은 놈들 목숨 값으로 32골드씩 받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타푼 남작의 영지가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아 보였는데 그나마 단장역할은 잘 하고 왔군. 그 놈들 가족 볼 면목도 생기고.”
-1골드가 평민 4인 가족 1년치 생활비였으니 32골드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기다려 보라고. 내일 아론님을 찾아 뵙고 확답을 받을 것이니.”
“돌아온 이들 중에 물어보면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놈들이 없으니··· 뭐, 토마일 단장의 뜻이니 결정에는 따르겠지만 아무쪼록 실수가 아니었으면 좋겠구려.”
☆ ☆ ☆
“맨탈리온···그만 죽여줘···이렇게 아픈 건 싫단 말이야.”
여인의 작은 외침이 있었지만 마법사에겐 팔다리가 사라져버린 그녀를 바라볼 용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덧 얼음의 장벽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녀의 얼굴을 돌아본다.
마치, 지금의 고통을 대신하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원망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변명의 말을 담아보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첫마디를 시작도 하기 전에, 방어벽이 밝은 빛과 함께 폭사되어 버렸다.
언제부터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하였기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이는 것은 고기덩이로 변해버린 시체들의 웅덩이 뿐.
하지만 더 이상의 살육의 소음들은 들려오지 않았다.
남아있는 기력을 동원하여 그 피로 젖어있는 흙더미 속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체내에 보유한 마나를 바닥까지 소모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바닥으로 떨어지는 백발로 변해버린 자신의 머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얼음 벽이 깨어지며 잃어버렸던 정신이, 구차한 삶을 연장하는 수단이 되었을까?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를 향해서 땅을 기어갔다.
부러진 채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손가락은 인식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목표로 하는 곳을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고.
그도 알고 있던 금발머리의 소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황녀. 자신의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소녀를 보고서 희망의 끈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땅을 기어가면서 떨어져나간 손가락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들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
“···.리온님.”
“맨탈리온님!”
마법사는 따스한 뱃전에서 잠이 들었던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요즘 따라, 또다시 꿈으로 나타나는 지나간 일들을 떠올려 보며. 두 손을 들어올려 찌뿌둥한 몸을 풀어보았다.
태양을 가리던 손등에서 사라져버린 몇 개의 손가락이 눈부신 햇살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아론님들은 벌써 출발하셨어요. 제가 괜히 깨운 건 아닌지···”
이미 범선은 페임론의 반대편 선착장에 닻을 내린 상태였고 일부의 선원들만이 갑판을 청소하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패큐니아경이 아니었다면 꿈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구려. 우리도 이만 주군을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
- 작가의말
이번회차까지로 고민하는 모습들은 끝이날듯 합니다.
여러 장면들이 등장하며 난잡?할지도 몰랐지만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리뷰를 하여야 할것 같아....
자캄은 이전에 잠깐 등장했던 용병이지만 콜란트 자작은 무도회에서 잠깐 언급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등장 인물.
산토나스 콜란트: 자작, 삼십대 중반. 탐험광. 8년전 동부대륙으로 떠났다가 작년에야 돌아옴.
추신: 개인적인 이사와 업무로 점점 느려지는 연재.
하지만 다음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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