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기억(황녀의 마지막 피난처)
자신의 대답에 말없이 지켜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지금의 삶을 살도록 해라.”
그렇게 덩그러니 짧은 대답만을 남겨두고는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나타샤는 주변을 돌아보며 병사들의 조각난 시체들을 바라보았지만 이전만큼 감정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발아래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마법사의 존재만이 살아있는 이들의 전부였고 그렇기에 병사들의 시신들을 수습할 방법이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얼마 있지 않아 그녀를 뒤따라 오던 국왕의 군대를 맞이하였다.
참혹한 풍경을 뒤로하고 변해버린 머리결과 더불어 눈동자를 바라보던 국왕이자 아버지가 그녀를 가슴 결에 안아 들며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후로도 북부로 몰러 드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가속화 되었고 그들의 입을 통해 머리의 색과 눈동자의 변화처럼 신에게 부여 받은 황녀의 이름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신의 계시를 받았다 믿었고 그녀의 행보를 주목한다.
근 몇 달 동안의 평화가 지속되고 희망적인 이야기가 퍼져나갔지만 황녀는 그것을 부정하며 북부의 초입, 산악지대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건의 노력들은 황녀의 예견처럼 일년이 지나기 전에 무너져 내린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중앙대륙의 도시와 마을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삼켜지며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미처, 피난 행렬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은 지하로 내려가 보았지만 대지를 불태우는 불길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익어버린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릴 뿐. 마지막 보류인 북부로 드래곤들의 무리가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드래곤의 수효가 많지 않다는 것과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목격담을 들으며 나타샤는 그 정보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얼마 후 대륙에서도 가장 높다고 알려진 산맥들을 넘기 위해 협곡으로 들어서는 내 개의 거대 비행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조정이라도 받는듯한 편대비행을 하는 드래곤들의 광경은 그 것을 내려다보는 이들에게 긴장감과 더불어 한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을 선사하였다.
십여 명이 붙어야 동작이 가능한 거대 석궁들이 협곡을 가로지르며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인간들이 그때까지 발견한 최대의 강도를 자랑하는 금속을 볼트의 앞부분에 도금하여 장전하거나 장전할 요량으로 주변에 일대에 언덕을 만들 만큼 쌓아두었고 마법으로 그 공격력을 곱절로 올려두었지만 마법의 선조와도 같은 드래곤들에게 이 단순한 공격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모든 드래곤이 협곡으로 들어선 것을 확인하자 나타샤는 협곡의 정상에 올라서서 소리를 높였다.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평화도 없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를 그대들과 함께하여 영광이었다. 발사하라!”
나타샤의 음성에 회답하듯 반복된 외침이 산맥을 뒤덮었다.
“발사하라!”
“포플란의 영광을 위하여!”
망설임 없이 목표에 들어선 모든 방아쇠가 당겨졌고 거대 석궁들의 활시위에서 벗어난 볼트들이 일제히 허공을 수놓았고 그때까지도 반응하지 않던 드래곤의 몸통으로 달려들듯 날아든다.
그리고 재장전을 할 시간 동안 자신들이 쏘아 보낸 결과물을 확인하려는 수십만 인간의 눈빛들이 협곡 아래를 주시했다.
선두를 비행하던 드래곤의 드러난 등껍질을 첫 볼트의 머리부분이 틀어박혀 들었고 뒤이어 수백의 볼트들이 그곳을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렸다. 이어진 드래곤의 고통에 찬 포효소리는 인간들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일까? 계곡마다의 지휘관들의 터져나가는 음성들이 메아리 친다.
“볼트를 장전하라! 장전된 곳은 명령 없어도 발사하라!”
“발사하라!”
그 어떤 무기로도 드래곤들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고 알려졌지만 지금 저들에게 볼트가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기에 확인할 수도 없었던 사항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재장전을 위해 거대 석궁의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 두 세 명이 붙어서 도르래뭉치에 연결된 크랭크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고통에 몸부림 치는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놈들이 계곡 위로 솟구쳐 올라왔던 것이다.
붉은 드래곤은 아가리를 벌려 내부에서 끌어 오르는 브래스의 덩어리를 생성하였다.
“발사!”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되었던 볼트들이 쏘아졌고 드래곤의 아가리주변에 모여들던 브래스 덩어리를 스치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볼트들에 비하여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볼트들이 그것을 피하여 눈과 머리부근을 정확하게 꿰뚫고 틀어박혀 버린다.
그 순간, 생성된 브래스가 거대한 폭음과 함께 그 당사자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이다.
-콰~쾅!-
“와!~ 와!“
머리를 잃어버린 드래곤이 끝없는 높이를 자랑하는 계곡의 아래로 추락한다.
하지만 또 다른 드래곤이 뿜어낸 브래스의 덩어리가 계곡의 한쪽을 차지하던 부대를 날려버리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형성하였고 남아있던 산맥의 봉오리가 산사태를 만들어내듯 가까스로 생존한 인간들을 쓸어 내린다.
그렇게 해당 장소에 존재하던 수천의 병사들의 무리가 브래스에 녹아버리거나 무너지는 계곡 더미에 매장당해 버렸다.
하지만 인간들에겐 그것에 당황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날리는 볼트의 반수이상이 무의미하게 허공을 수놓고 있었지만 활시위가 쉴새 없이 당겨지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크랭크를 돌리는 손에서는 핏물이 고여 떨어져 나가고 뼈마디가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모두에게 전염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어떤 자신감이었을까?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며 보조역할만을 수행하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공격 마법을 난사하였다.
마법사들이 날린 얼음의 송곳들이 드래곤의 날개에 틀어박힌 체 허공에서 그 날갯짓을 봉쇄하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무의미하게 쏘아지던 볼트들이 일제히 해당 표적을 향해 집중되었고 날개의 존재를 날려버리며 계곡의 측면으로 틀어박혀 파고드는 거대 비행체.
일부의 병사들이 그 진동에 휩쓸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날개를 잃어 허우적거리던 드래곤도 산사태와 함께 계곡 아래로 추락하여 암석덩어리인 바닥과의 충돌과 함께 피 분수를 일으키며 폭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아있던 한 마리 또한 이미 고슴도치로 변한 몸으로 더 이상의 비행이 불가능 하였던지 몰려있는 병사들 사이로 난입하여 주변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병사들의 비명과 의미 모를 함성소리가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듯이 불길 사이를 헤치며 쏘아지는 볼트들이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린 체 연속해서 드래곤의 몸통을 틀어박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브래스를 끓어 올리려는 목을 관통하면서 내부에서 갈 길을 잃은 열기가 불길에 휩싸여 고통에 신음하던 병사들과 함께 주변일대를 폭사시켜 버린다.
계곡의 삼 할 가량이 날아가 버렸지만 인간이 처음으로 드래곤에게 승리하였던 것이다. 희생자들의 아픔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살아남은 병사 수만의 함성이 계곡을 진동시켰다.
그리고 이런 승리의 소식은 발 빠르게 전 대륙으로 퍼져났으며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들을 북부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승리의 그날 희생자와 부상자의 조치로 바쁜 와중에도 잃어버린 동료들을 위한 슬픔을 공유하기보단 못다한 함성들이 주변을 끓이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그것이 죽어버린 이들을 위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래곤들의 형체는 시간이 지나며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지만 나타샤의 불안감을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기던 그날을 시작점으로 그 누군가의 그리운 이름 또한 잊을 수가 없었기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나타샤는 텐트의 휘장을 걷어 어둠이 내려앉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체들을 언덕처럼 쌓아두고선 장작불을 피워놓고 저녁을 준비하는 아이러니한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저 언덕에 불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의 함성으로 그들을 위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출발할 당시만 하여도 십만이 넘어가던 인원의 반수이상만이 온전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과연 이것이 승리한 전투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나타샤의 생각의 끈들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끊어져 버렸다.
“결국은 저 언덕처럼 너희 모두가 불타오르겠지.”
돌아본 곳에는 양탄자 위에 앉아서 방금 전 까지 자신이 마시던 차를 들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닮아있는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 껍데기의 주인인 나타샤 자신도 저런 외형은 아니었다.
일년이 지나는 동안 얼굴의 생김새가 조금씩 변해가더니 지금의 저 여인과 같이 지금에선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한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은인과도 같았기에 정중해야겠지만 그녀 또한 저들과 같은 종족이기에 첫말이 곱지만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선 한다는 소리가···”
당연하게도 자신의 말에 언짢은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할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황녀. 너와 내가 외관적으론 같은 모습이라 해도 동등하다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그리곤 차가 떨어졌다며 자신에게 빈 잔을 내밀었고 마침, 텐트 내에 피워둔 모닥불 위로 올려둔 주전자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있었기에 그녀의 바램 대로 잔을 채워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타샤가 머물고 있는 텐트는 일반 병사들의 것 보다 규모가 크고 가운데 지붕이 뚫려져 있는 구조였기에 내부에서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녀에게 가득 채운 잔을 건네주었을 때에야 비로써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
“황녀. 너를 살리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만들어졌다지만··· 너는 인간의 육체와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단 걸 명심해야 할거야. 뭐, 그렇게 따지면 지금에선 우리모두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겠지만.”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도록 해. 슬슬 복귀 때문에 바빠질 것 같으니.”
“죽지 않는 저들에겐 여기가 그저 게임과도 같은 놀이장소일 뿐이란 건 벌써부터 깨달았을 거야. 현재야 드래곤들이 마치 꼭두각시 같은 존재들로 전략했다지만 끊임없이 리젠 된다 생각해 보라고. 감당할 저력이 얼마나 갈 것 같아?”
-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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