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소모라
차분한 이혁의 표정 속에서 마도린이 의도했던 상황과는 온도 차가 있었던지 잠시지만 망설이던 그녀의 입이 벌어진다.
“인장과 함께 보관하던 물품 또한 그 소유권이 있으시니 허락하신다면 소란스러운 내성이 정리 되는대로 그 장소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더군다나 우리는 이곳에 피해를 입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내성으로 돌아가면 남아있는 주민들을 안심시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아론의 즉답과 함께, 마도린이 천막을 벗어났다.
그렇게 마도린을 보낸 아론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차 잔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린 주군의 분위기가 걱정이라도 되었던 것인지 마법사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전해진다.
“뭔가 고민스런 일이라고 있으신 겁니까? 이곳의 사정은 이미 하니발경에게 전달한 상황이니 저희가 아니더라도 바록 자작이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의도를 떠나, 거저나 다름없이 도시를 넘겨준다는데 마다할 이유야 없지. 그보다 버젓이 입구가 열려있는 상태에서 저 시체들이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아론의 즉답과 질문에 의아함을 가질법한 맨탈리온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도 있었기에 생각하던 바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던전 몬스터의 본능 중 하나가 특정한 금속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지만, 지상으로 통하는 모든 지층 대에 대단위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전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지도 근거가 없는 상황이군요. 그렇게 따져보면 저 걸어 다니는 시체들도 몬스터의 성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아론과 몇 마디의 말들이 오갔지만 근거 없는 소문만을 가지고 상황을 추정하기란 어려웠던 것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마법사가 뭔가의 실마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 패큐니아까지 모험가들에게 전달해야 할 내역과 함께 개인적인 일로 로그아웃이 필요하였기에 맨탈리온의 뒤를 따라 나셨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두 여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없다는 듯이 하르파스가 펼쳐놓은 오목판을 바라보며 소소하니 저들끼리 잡담을 늘여놓다 어느덧 아론에게 대화의 주제를 넘기려 하는 세실리아였다.
“아직 그렇다 할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마도린이란 여인의 설명을 들어보자면 수상한 것 투성이랍니다. 왕이란 이는 어떻게 저희가 찾아올지 알고서 인장을 전해주란 말만을 남기고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더군다나 시체들이 던전에 묶여 있다지만 근본 원인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절규가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나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수인족들의 수명이 길다 알려졌으니 그들을 잡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잡아 족치자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뭔가를 재대로 알려면 강압적인 자세도 불가피하단 소리엔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라곤 자신을 따르는 NPC였던 이들뿐. 좀비들이 대륙을 집어 삼키든 말든, 막연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이혁이었고.
더군다나 방금 전, 그 동안의 의혹들을 나열하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이혁으로선 하나의 가설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에 세실의 말귀도 곧이곧대로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실지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지금의 세계가 게임이었단 가정 아닌 확신.
NPC란 건 애초부터 인공지능이라기 보단 뇌사상태에 빠진 인간들을 활용하고 있던 것이었고 자신또한 누군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판타지란 환경을 떠나, 처음부터 주어진 미션은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퀘스트와 같은 어떠한 조각들을 모아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연계된 스토리를 따라 던전과 주인 없는 도시를 얻고서 영혼석의 조각과 연관된 것이 분명한 인장을 건네 받았다.
그렇게 휴대용 마법주머니 속에서 요동치는 조각의 진동을 느끼고 있으려니 참아내려던 웃음도 입 밖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기분 좋은 웃음을 가장은 울분이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이혁은 마음을 다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고민에 휩싸인 아론을 지켜보던 세실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보다 아론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과거의 문헌을 어느 정도 찾아는 보았지만 이곳 소모라는 왕국에선 관여하지 못하는 사유지와도 같은 개념이라 보시면 된답니다. 던전에서 왕권을 견제할 수단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겠지요.”
“세실리아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자신을 성녀라 여기는 세실리아. 이혁이 생각하기엔 그녀도 불쌍한 피해자일지 몰랐던 것이다. 세뇌라도 받았을지 누가 알겠냔 말이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주변 이들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혁 자신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기억을 조정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판단했기에 적어도 장단을 맞추어가며 실마리를 풀어가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조장하고 관리하는 관계자가 주변에 자리잡고 있을 것은 당연하다 여겼기에.
세실은 아론에게서 돌아온 질문이 새롭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오목판의 한 점에 집중하던 하르파스의 들어올려진 검은 눈동자도 같은 의문을 아론에게 던지고 있었다.
만약, 그 어떤 흑막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이혁의 두 마디에, 당장에 그의 기억은 조정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실이라 불러달라는 부탁은 잊으신 듯 하지만 의견을 물어보실 만큼 저에게 친근함을 표시하시니 용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지금까지 아론이 고수하던 과묵함은 낯선 이에게만 해당되는 단어라 판단한 것일까? 뭔가를 오해한 세실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던 바를 열거하기에 이른다.
“마도시대, 수호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에 의해 만들어 키워졌다는 소모라는 왕국에서도 입김을 함부로 불어넣지 못하던 자유로운 도시였다고 하네요. 그렇다 보니 초기에는 이름값에 속은 대부분의 드워프들도 자유롭게 이곳으로 스며들었겠지요.
노예제가 폐지되었다곤 하지만 왕국에서도 사유재산까지 간섭하지는 못하는 입장이라 절차를 떠나, 도시의 인장도 받아 든 상태에서 대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드워프란 대장장이들과 더불어 불필요한 유력자들을 제외하고라도 적게 잡아도 3만은 넘어가는 노동력과 끝없이 솟아나는 철광석들이 모두 아론님 것이 된다는 이야기랍니다.
도시가 아론님의 지배를 받는다 해도 지금의 무력이라면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왕국이야 무역만으로도 그 이득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니, 손발을 들고 환영하지 않겠어요.”
노예의 자손들 역시 노예란 상식이 통용되는 대륙의 법칙에 의거한 발언이었지만 미소 띤 표정을 유지한 체 아론을 주시하던 세실은 그의 입에서 나올 어떠한 대답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세실은 이 세계를 탐구하던 과정에서 문헌에선 누락된 내용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악마의서에나 적혀졌다 알려지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던 인간과 이 종족들을 위해 신에게 반기를 든 마왕의 이야기.
세실은 그 어떤 근거로 이렇게 황당할 법한 상황을 유추한 것일까?
그것은 마왕의 심복이었던 하르파스란 전설 속 존재의 마주하고부터였다. 가이아에 의해 신력을 발휘하던 그녀로선 밤 낮을 구분하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를 일.
그렇게 아론의 입을 주시하던 세실의 망상과는 상이하게 또 다시 과묵함을 조장하고 있던 아론은 그녀의 말에 대꾸할 필요가 없다 느꼈던 것일까?
성벽 밖에서 들려오는 시체들의 포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 또 몰려든 거람. 퀘스트를 미룰 명분이 생긴 것일지도···’
대답을 기다리는 이에게 고개를 돌린 이혁은 그녀가 NPC와 같이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 입력당한 대사를 나열하고 있다 생각하니,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생각한 바를 열거한다.
“당장엔 저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순위로 보이니, 세실님의 의견은 이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뭐, 아론님의 저력이라면 며칠이면 충분하겠지요···”
그렇게 마족과 성녀를 한 천막에 남겨두고서 밖으로 나온 이혁은 식사를 마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원정군에 포함된 여럿 이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괴성들엔 아랑곳 없다는 듯이 횃불에 둘러앉아 피곤한 기색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모험가들의 수다스런 광경과 무구들을 손보거나 기마들을 한곳에 모아두며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병사들. 그들 중 일부는 기사들과 짝을 이루어 성벽위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물론, 그 곳엔 이 종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수효는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았다.
던전의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줄기들이 내성을 향해 낙하하며 수많은 물보라를 일으키고 폭포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곳엔 작은 호수라도 생성될 법도 하였지만 성벽에 가리워져 눈으로 확인하기는 불가 하였기에 도시를 관통하여 외부로 흘러나오는 수량을 가늠하며 앞선 상상들을 추론할 뿐이다.
“주군. 바록 자작에게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뒷짐을 지은 체, 낯선 풍경에 심취되어 있던 이혁에게로 다가온 하킴이 기다리던 소식을 전하였다.
아론과는 머리 하나이상은 넘어가는 키로 인해 한쪽 무릎을 굽힌 하킴의 모습은 주변의 시선들을 잡아 끌기에 충분하리라. 그런 따가운 관심 속에 근엄한 표정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혁은 이어질 하킴의 보고가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데바트라로 향하는 통로주변에 던전 하층으로 들어가는 균열이 생성되어 있다 합니다. 그 곳에 몰려있던 것들의 일부가 저희가 위치한 이곳으로 이탈하고 있다며 좀더 시선을 끌어준다면 갈라진 틈을 메워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니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그곳만 틀어막고서 1층에 잔존하는 걸어 다니는 시체들만 처리하면 이번 원정은 완료 된다는 말이었다.
※ ※ ※
백 년에 걸쳐, 성벽의 높이를 꾸준하게 증축한 것이라 그런지 겹겹이 쌓여진 그 규모는 고층 빌딩들의 숲을 경험했던 이혁의 눈높이에도 거대하다 느끼는 바였다.
그리고 강아지와 고양이와 같은 귀 모양을 간직한 마치, 코스프레와도 같은 모습의 이 종족들의 틈바구니 속에 자리잡고서 땅 딸막하지만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드워프들의 조합이라니. 의미 가득한 웃음이 입가 가득 피어나는 이혁이었다.
하지만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우글거리는 좀비들이 성벽 아래에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기에 아론의 미소 또한 유저들에 의해 그 의미가 변질되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좀비들을 내려다보며 저런 표정을··· 영웅 급, 히든 NPC라도 성격은 사이코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여성 유저 분들은 공략하기에 앞서 참조 하셔야 할 듯 합니다.”
- 작가의말
오타 수정없이 올리는 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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