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기억(황녀의 마지막 피난처)
갑옷내부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떠나 이제는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의 고철의 마찰 소음들이 동공내부를 가득 채워 버렸고 계속 커져만 간다.
-끼~이~익!-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효로 불어난 무리의 두려움 보단 소름 돋게 만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막아볼 심산으로 이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선, 다가오는 갑옷 무리를 향해 겨누었지만 투구 속에서 일렁이는 광채를 보는 순간 심약한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듯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결과를 자아낸다.
중세에 나올 법한 전신 기사의 갑옷이 녹슬고 이끼긴 소드를 이혁을 향해 머리높이 들어올리며 굉음을 터트린다.
-끼~익~ ~쾅!-
그 순간, 전신 갑옷의 팔 부분이 갑옷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터~엉!-
지면과의 마찰로 인한 충격으로 관절의 이음부가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당초부터 내용물은 없었다는 듯이 철재의 조각만이 젖은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자신도 황당 했던지 떨어진 팔의 잔해를 돌아보는 일렁이는 녹색의 광채. 쥐고 있던 소드는 바닥 면의 이음세로 박혀 들어가 버린 상태였기에 그것을 향해 남아있던 손을 움직이려 걸음을 옮기는 찰나 갑옷의 이음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이질감과 동시에 녹이 쓸어버린 고정 볼트들이 이탈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이혁이었다.
혹시나 싶어 이혁은 좀 전까지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던 검 날을 다가서던 갑옷의 겉면을 가볍게 처 보았고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파편들과 떨어진 투구가 이혁의 발 아래로 굴러왔다.
내부에 도사리던 녹색의 인광은 뭔가가 억울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듯이 허공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흩어진 파편과 볼트의 조각들에 의해 뒤따르던 몇몇의 갑옷 무리들이 무게중심을 이기지 못하고서 넘어지며 연쇄작용과도 같이 도미노처럼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 친다.
한동안 철재 갑옷들이 분해되는 굉음들이 동공내부를 잠식하며 퍼져나갔다.
이혁이 머리 속을 뒤 흔드는 소음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무수한 레벨 업의 알림 음들 또한 그 소란 속에 묻혀버렸단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할 정도였다.
이혁은 그때서야 바닥에 쌓여있는 갑옷들을 타넘어서 웅크린 여인의 조각상으로 다가갔다.
석상의 표면으로 은은한 장막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혁이 머리부분에 손길을 내밀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며 알림 창이 형성되었다.
-띠~링!-
-봉인된 황녀를 깨워라-
-포플란 황녀의 기억을 공유하여 그녀의 봉인을 풀 열쇠를 찾아라.-
-보상조건: 이름 계승과 더불어 조건에 따라선 황녀를 수하로 거둘 수 있음-
-진행 조건 부합 시 강제 퀘스트 진행··· -
안내 창이 사라지며 이혁의 눈앞이 암흑으로 바뀌었고 다음순간 제삼자의 시선으로 어떤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당사자의 감정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이혁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지는 붉은 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위로 수백 수천의 조각난 인간형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는 여인으로 보이는 형체가 자신의 앞섬에 쓰러진 체 몸을 가늘게 들썩이고 있을 뿐. 영문을 알아보기라도 할 듯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손을 가져가려 할 때였다. 너무나도 여린 자신의 팔을 돌아볼 수 있었다.
‘··· ···?’
고개를 돌려 붉은 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자, 어린 금발소녀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다. 이질감이 몸을 흩고 지나가려고 할 때 기억저편에 숨어있던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골드 드래곤 페이라모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나타샤’
그것과 함께 만나지 못할 그리운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아론’
그 순간 온 몸을 황금빛 광채가 감싸 안았고 곧이어 나타샤 자신이 알고 있던 인간형상일 때의 본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이름만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이전의 기억들은 안개 속에 둘러 쌓여진 것처럼 희미하기만 하였다.
그 순간, 눈 앞의 꿈틀거리던 인간 여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남아있던 한쪽 팔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더욱더 뭔가를 불태울 의지를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으로 나타샤가 그녀를 부축하였을 때 약하고도 가냘픈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저들을 해치우신 것인가요?”
잠시 고개를 돌려 인간 여인이 지칭하는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지면으로 추락한 것인지 목과 날개가 꺾여진 상태로 움직임이 멎어버린 몇몇 드래곤들의 형상들이 흩어져있었지만 나타샤를 놀랍게 만든 것은 그 모습들이 잠시 후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거짓말처럼 인간들의 시체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체. 물론, 그 중엔 살아있는 이들도 있었던지 악착같이 눈앞에 있는 여인을 향해 바닥을 기어오던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의 모습도 목격할 수 있었다.
나타샤는 사라져 버린 형상들을 어렴풋이 추정할 법도 하였지만 당장에 자신과의 접점을 기억해 내지는 못하였다.
안겨진 팔에서 전해지는 인간여인의 숨결이 약해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여인은 입을 벌리려고 노력 하였지만 그것이 힘에 부친 것인지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온다.
자신은 마법이란 것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벌레처럼 이곳으로 기어오는 인간이 마법사란 걸 인식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논리라 여겨졌다.
나타샤는 여인의 사라져버린 팔에 손을 가져다 보았다.
알 수 없는 기운들이 몸 속을 빠져 나와 그녀에게 전이되었지만 시간이 늦어버린 것인지 인간 여인은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안타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나타샤는 자신의 허전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함만이 맴돌았다. 그렇기에 인간여인이 자신에게 전하려는 말귀를 듣기 위해 머리에 손을 올려 생각을 읽어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여인의 마지막 말 뿐만이 아닌 그녀의 기억들이 나타샤의 뇌리로 스며든다.
야누스 대륙의 5개의 왕국 중 북부를 대표하는 포플란의 이름은 과거 마계의 문을 틀어막았다는 전설로도 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비밀리에 관리되고 있다는 이름 모를 던전과 성검의 존재는 무기도 없던 원시부족 사회에서 너무 과장된 유물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선도 나오고 있었지만 자기 만족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북부 선조의 시작을 알리는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왕국에서 여자의 몸이지만 계승자로 태어나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던 소녀.
능력만 있다면 성별을 떠나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그 설레가 많았기에 더군다나 현 국왕의 유일한 자식이기도 한 그녀로서는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문자를 익히는 순간부터 검술과 전술은 물론 왕국의 제반 지식을 쌓아가게 된다.
그렇게 나이에 어린 재상이란 소리를 들었던 그녀였지만 밝기만 하던 자신의 왕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자손이라고 칭하는 존재들이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소문을 접했을 때에는 무슨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교류하던 왕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멸망했단 첩보를 접할 당시엔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북부의 위치상 대륙의 소식이 뒤 늦게야 전달되었고 피난민들의 행렬을 통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마계의 문이 열리던 때와 같은 시기에 전해지는 또 다른 전설.
차원 이동을 통해 이 대륙으로 넘어왔다던 드래곤들 목격담. 현재 존재하는 마법의 시조와도 같았지만 전설로만 전해졌기에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허구가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런 존재들이 수십이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과 브레스의 불길에 의해 수도가 녹아 내렸다는 사실은 충격과 경악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에서 모든 대지를 화염으로 뒤엎어 버리고 있다고 한다.
왕국의 지도부는 그들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멸하고 있다는 현재의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북부와 가까운 도시가 유린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땐 국왕과 스승이기도 한 맨탈리온의 말류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피난 행렬을 거슬러 검은 연기의 줄기가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언제부터 우리들을 기다린 것일까?
우리의 군대 앞으로 십여 마리의 드래곤들의 무리가 그 거대한 몸체를 지면에 내려놓았다.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들은 올려다 볼 수 조차 없는 거대한 공포가 되어 나를 포함한 몇 천의 병사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뒤를 이어 벌어진 것은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이길 가망도 없는 전투, 아니 학살의 현장으로 끌고 온 자신을 원망하며 달아나는 병사들의 등을 향해 얼음의 송곳들이 파고들었다.
저들이 사용한다는 불의 입김은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체 병사들의 난자되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들이 지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동안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다물어진 잇몸이 으스러졌다.
검을 들고서 발 밑을 진득하게 굳히고 있는 핏물의 굴레를 벗어나 처음부터 방관하던 눈앞에 보이는 금빛의 드래곤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발톱에 도달하기도 전,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얼음의 창에 검이 들려진 손이 날아가 버리는 것과 더불어 몸 또한 힘의 반발작용으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린다.
바닥에 박혀진 얼굴은 상황을 모르는 다른 이가 보았다면 민망한 자세일지도 몰랐다. 아니 죽어가는 이들에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 자신의 것이 아닌 진득한 핏물이 스며들었다.
어느덧 귓가로 들리던 수많은 절규들이 멎어버렸다.
이렇게 비참한 모양의 자신만이 남겨져 버렸단 걸 알 수 있었다.
살고 싶었고 복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팔에서 빠져나가는 핏물만큼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느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지면으로 전해지는 충격들이 온 몸을 휘감을 정도였기에 흐려지던 정신을 깨울 수 있었다.
무의식 결에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남아있는 팔에 힘을 주어보았지만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을 부축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곳에는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없다 여겼지만 지금 만큼은 눈앞의 신에게 바램을 전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인의 뒤로는 마치 죽은듯한 드래곤들의 무리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었기에 초점을 잃어가는 눈으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망도 들었다.
왜 지금에서야···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자신에게 의문을 던졌다.
신의 힘이라면 죽어가는 자신을 살려줄 수 있을 거란 알 수 없는 희망과 믿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핏물로 인해 대답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살려 주세요’
그 작은 한마디를 전달하지 못하고 의식의 끈이 날아가버린다.
나타샤는 이 여인의 강렬한 삶에 대한 바램을 읽었지만 그것을 들어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자아를 분리하여 여인과 융합한다면 남아있는 생명력으로도 재생하여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살아난다 하여도 그 것은 여인의 기억을 가진 또 다른 나타샤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방법이었기에 망설이던 중 지금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자아를 분리하여 그녀의 영혼과 융합을 시도한다면 어쩌면 나타샤 자신에게는 온전한 기억만이 남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팔에 안겨있던 여인의 숨결이 마지막을 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타샤는 온당한 이유도 잊어버린 체 알 수 없는 마법을 시 전 하였다.
죽었다 느끼는 순간, 뭔가가 떨어져 나가며 새로운 감정이 몰려온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허전함과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공허함이 몰려오는 순간 그의 이름과 모습이 떠오르며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그녀의 앞에는 금색의 눈동자와 머릿결을 가진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혼란스런 감정이 전염된 것일까?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순간이 아니었다.
간질이는 느낌들이 온몸을 흩고 지나가며 사라져버린 오른팔이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의 드래곤들을 물리친 여인의 모습을 한 신이 자신을 구해준 것일까?
그런 생각의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이냐?”
자신은 북부의 왕국인 포플란의 황녀이다.
하지만··· 마주보는 여인과 같이 나타샤 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며 자신의 어깨를 넘어오는 변해버린, 어쩌면 원래의 색감이었어야 할 금발의 머릿결을 바라보며 정해진 대답을 이어간다.
“포플란의 나타샤.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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