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프롤로그
그 존재의 이름은 하이얀.
골드 드래곤의 수장이자 모든 드래곤들의 정점에서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였던 혈족의 마지막 생존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간 그녀는 모래 바닥에 파묻혀 빛 바랜 은색 광채를 발산하려 애쓰는 한 자루의 검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소멸과 봉인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신의 검.
-제라늄.-
지금에 와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앞뒤를 구분하는 이성조차도 의심하고 판단하길 주저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들을 지켜보며 그저, 대지를 기어 다니는 벌레라 여겼던 관념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가이아를 따르며 그 모든 것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마왕이 지키려 하였던 건. 그런 생명체들보다도 정작, 자신의 자아였을지 모를 일이다. 창조주란 이유로 그들을 향한 순종적이고 꼭두각시와도 같은 행동양식들. 정해져 있는 시간이란 개념의 운명과 죽음이란 족쇄의 두려움. 하이얀 자신 또한 그런 속박들로부터 벗어 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심판의 날. 가이아를 따라 오염에 찌든 때들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살결을 불어넣으려던 때, 마왕은 그것들의 수호자를 자처하였고 마지막 순간, 하이얀은 괴로워하며 망설이던 가이아를 목격하였고 그렇기에 절대자의 최후의 순간에도 행동하지 못하고 방관자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기억의 편린, 되돌려진 짧지 않은 시간, 드래곤과 신계의 종족들이 서로 다른 핏물들로 온 대지를 물들이던 때.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벌레라 칭하던 인간과 이 종족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려 한 마족들의 육신들이 검붉게 변해버린 대지 위에 겹겹이 쌓여 펼쳐져 갔다.
하지만 처음의 양산과는 다르게 그 시작도 그 끝맺음의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체. 사라져버린 신과 마왕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생존한 신계의 날개 달린 종족들은 전장의 종식을 알리며 신의 영혼이 소환되었다는 천공의 왕궁으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이얀은 정지한 사고의 순간을 되돌려보며 폐허의 잔상을 밟아 걸음을 떼어놓던 중 그 황금색 눈동자에 발버둥 치는 무엇인가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에 의해 두 날개까지 잘려 버린 체 인간의 형태로 돌아가 힘겹게 숨을 유지하고 있는 마족.
이렇게 인간의 형상을 함으로써 그나마 힘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붉게 변해버린 대지 위에선 그 가냘픈 몸을 웅크린 하나의 여인만이 있을 뿐이다.
‘태초의 실패작. 우리들 또한 이유도 모른 체 그들을 경멸하였지만 마지막을 그 모습으로 꾸미려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동경, 또는 질투란 감정이겠지.’
‘왜?’
‘짧은 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자유로운 감정들이 완벽하다 자처하던 우리들에게 시기심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야.’
‘··· ···’
하이얀은 손아귀에 쥐어진, 좀 전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나약한 여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지만 신에게 상처 입힌 죗값은 마무리 지어주어야만 한다.
그 순간, 무의식 상태에서도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었던 여인의 손아귀에서 소멸한 줄만 알았던 영원의 한 조각이 작은 빛 무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왕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단편을 봉인한 것이었다.
여인에게 다가간 하이얀은 그 희미하게 꺼질 것 같은 조각을 어렵지 않게 움켜질 수 있었고 자신도 알지 못하던 따스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대에게 또 다른 기회를 보여주는 것이 속죄의 길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혼잣말을 하던 하이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점점 그 빛이 가늘어지는 하나의 조각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밝은 빛 덩이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는듯하더니, 처음 부 터 존재초가 하지 않았다는 듯이 조각과 함께 빛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뒤이어 하이얀은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제 그대의 이름을 「아론」이라 부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금빛 머릿결을 휘날리던 여인은 지평선을 따라 몰려드는 살아남은 드래곤들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이전 글로 원복하는 과정입니다.
(차마 오타, 문맥오류등은 수정못하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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