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기억
골목의 한편엔 엉성하지만 사무를 보는 이들이 플레이어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물품을 보관해 주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염려하지 마시고 반나절 이후에 찾으러 오세요.”
사무적인 목소리에 뭔가를 더 물어보려던 이혁은 밀려드는 플레이어들의 눈총을 받으며 거리 밖으로 나오게 된다.
표정 없는 몇 몇 NPC들의 정해진 대화들 들으며 어느덧 광장으로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시선과 오감을 가득 채워주는 실사와 진배없는 그래픽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혁은 넓은 광장의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의 한편을 차지하고 앉았다. 입고 있었던 겉옷을 전부 맡겨두고 온 상태이기에 불어오는 얕은 바람결에 한기를 느낄 법도 하였지만 신기함 가득한 눈길을 돌려본다.
대부분의 거리와 거주지는 최근에 만들어진 설정인 듯, 화사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자신이 자리하고 있던 분수대만큼은 여기저기 그을림과 부서져 나간 파편들, 또는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고풍스런 멋이 느껴지기는 하였지만 빼곡하니, 지금은 훼손되어 읽을 수 조자 없는 문자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의 글귀가 눈 안에 들어온다.
분수대 내부에 새겨진 글귀였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그런 장소였다.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는 선명한 글자체보다도 그것을 이혁 자신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해할 법 하였지만 당사자인 이혁은 무심결에 글귀에 빠져 들게 된다.
-생존자들에게···
그들이 나타나고 모든 것이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자그마한 희망조차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져 버린 지 오래이다.
하지만 불씨는 존재하는 법일까?
얼마 전, 북부의 어느 왕국에서 황녀가 이끄는 군대가 저들을 몰아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허무맹랑한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가···
이 세계에서 나타난 플레이어라 불리던 악마들에게 복수할 수단만 존재한다면 나의 영혼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있기에. 살아 남아 이 글을 마주할 생존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를 「포플란의 나타샤」란 이름을···
이혁은 글자를 좀 더 읽어보려는 요량으로 표면에 묻어있는 이물을 털어내어 본다. 하지만 글자가 새겨진 면이 바스러져 버리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문화제를 훼손한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게임이란 환경에서 주어지는 이벤트 성 퀘스트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타샤란 이름을 기억에 담아두고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혁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어진 퀘스트를 수행하는 초보유저들이었다. 그룹을 만들거나 개별로 움직이며 때론, 기본적으로 주어진 마늘 빵을 먹는 모습 등. 이혁도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선 공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이미, 시간도 다 되었으니 맡겨놓은 짐이라도 찾으러 가야···.’
하지만 도착한 곳에선 이미, 자신과 같은 유저들이 모여들어 황당한 표정과 불만들을 성토하고 있었다.
“무슨 게임을 시작하자 말자, 사기를 치는 놈들이 있는 거야.”
“게임 사에 항의하면 돌려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말도 마라. 공식사이트에 뜬 것 못 봤냐? 속은 유저들이 잘못이라고. 그리고 초기 지급 품 이외엔 더 이상 지원은 없다는 말.”
“내가 누군 줄 알고··· 지들이 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내요. 로그 아웃만 하면 게임 사 놈들 고소하고 말겠어요.”
말로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들도 저렇게 자신과 같이 당한 것이니,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발길을 돌리려던 이혁이었다.
“물품 사기 당하신 유저님들! 사냥파티에 합류를 원하시는 분들은 이곳으로 모여주세요.”
그 순간, 이혁도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가 돌아갔다.
몇몇 유저들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여우사냥을 다니면서 간단한 무기류를 장만할 때 까지는 도와드릴 예정입니다. 다른 파티들도 이곳으로 오기로 했으니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자리를 지켜주세요.”
초반에 시작하는 유저들끼리 도와가야 되는 것 아니냐면서, 자신들도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고 길드 가입권유도 할 수 있기에 피차 좋은 일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이혁 또한 그들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이혁을 포함한 십여 명의 유저들은 어차피 검 한 자루도 수중에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심부 이외엔 많은 부분 공터로 남아있었기에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수풀이 우거진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티 원들이 기다린다는 마을 밖으로 향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인 성벽을 지나친다.
일부의 NPC를 제외하고선 대부분이 유저들로 보이는 공사인부들. 벌써부터 골드를 벌기 위해 저렇게 게임 속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사냥을 하며 즐기면서 게임을 플레이 해야지··· 저렇게 현실과 동일하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풍경을 구경하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도를 벗어나선 인적이 드문 숲 속을 들어서게 되었다.
그 때, 복면의 무리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당황스러워 하는 유저들을 반겼고 안내하던 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분들은 초보 유저들을 돕는다는, 한마디로 말해서 게임 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계시는 것이랍니다. 그렇기에 양해를 바라며 저는 여기까지 안내를 부탁 받았기에 즐거운 게임과 권투를 빌며 이만 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파티원에서 안내인으로 소속을 바꾸어 자신을 어필하던 유저는 질문을 받기도 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복면 인들을 따라 또 다시 좁은 숲길을 이동했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였기에 이동간에 여성 유저들의 재잘대던 말소리도 귓속에 들어오지 않던 이혁은 앞서 걸음을 옮기는 복면인의 머리 꼭대기에 떠 있는 익숙한 이름표를 볼 수 있었다.
-수원들-
처음 신전을 나설당시 자신을 GM의 관계자라 소개했던 유저의 이름표와 같았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저들의 이름들을 볼 수 있는 패치가 적용되지 않았던 시점이다.
이후의 사기사건의 증가에 따라 몇 년 후에나 같은 유저들끼리 이름을 볼 수 있도록 조치가 되었던 부분이지만 사전 설명을 숙지하지 못했던 이력으로썬 GM에서도 놀라 자빠질 이와 같은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혁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무장한 복면 인들로 인하여 섣불리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하였다.
하지만 어느 공터에 들어서던 시점에서.
“형님들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좀 많은데요. 저희도 쉬면서 해야지 이렇게 부리시면 추가수당도 챙겨주셔야 됩니다.”
그들의 동료에게 시선이 돌아가는 순간에 맞추어 이혁은 본능적으로 풀숲이 우거진 쪽으로 몸을 낮추었다. 줄줄이 따라서던 유저들이 십여 명이 넘었기에 이혁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눈치 채지는 못하는 듯 하였지만 정작, 같은 입장에 놓여였던 유저의 눈길은 피하진 못한 것 같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따로 행동하실 거였으면 처음부터 따라오시질 마시던가··· 저희까지 피해가 가잖아요.”
날까로운 눈매를 가진 여성유저의 고함소리에 모두의 눈길이 풀 숲에 엎드린 이혁에게로 집중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허리츰에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며 다가서는 수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분의 말씀처럼 이런 행동은 저희 입장에서도 난처하답니다. 정 파티에 참여할 의사가 없으시다면 저 공터까지만 동행하셔서 식사후에 돌아가시면 된답니다.”
“어쩜 이렇게 친절 할 수가. 나중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주세요. 꼭 보답이라도···”
그 유저는 자신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슴사이로 삐져아온 초보용 검 날을 내려봐야만 했다.
“··· ···?”
낮게 설정된 고통과 끊어지는 숨결조단, 지금의 상황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던 눈길을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 만을 남겨두고 녹색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여성 유저였다.
“대장 이렇게 PK해도 저희한태 불이익은 없는 것 맞겠지요?”
방금전 사용했던 칼 집을 허리츰에 매달고선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를 수습하던 이의 말에 한심하단 듯한 수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유저들 끼리 이름확인도 안되는 상태에서 초반에 가장빠르게 레벨 올리는 방법이 이것밖에 또 어디 있다고. 더군다나 이렇게 부수입도 있고 말이지.”
이미, 패닉상태로 굳어있던 초보유저들도 앞선 여성유저와 같이 저마다 끔직한 방법으로 로그아웃을 당한 상태였고 이혁만을 남겨두고서 저희들끼를 흩어져 있는 옷가지 등을 수습하는 복면인들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이혁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이유를 알수 있었다.
“눈치 좋은 혼혈 놈들은 마음에 안든단 말이지. 뭐 먹을 것이 있다고 이쪽으로 접속한 거야?”
한국인을 자처하던 이혁이었기에 당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전, 어깨로 파고드는 고통에 높은 심을성을 토해냈다.
“아~악!”
통감률을 조정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잠시동안은 게임이란 생각으로 참아 보려 노력도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이것이 가상현실 게임일까란 의문이 들 정도의 고통이 온 몸을 휘감아버린다.
앙 다문 자신의 입가로 붉은 핏 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런 고통속에서도 이런 세밀한 표현까도 사실감있게 구현해 놓은 게임 사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이혁은 이어지는 수완들의 다음 말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보니, 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단 말이야. 게이트를 빠져 나올때 부터 검은머리에 혼혈놈이라 눈 여겨보고 있었더니··· 중간에 빠져 나가면 모를줄 알았나 보지. 이 게임은 현실과 일대일 매칭된 얼굴로 생선된다고 하니, 네 놈을 그냥 로그아웃 시키면 후환도 있을것 같고 단단히 몸에 새겨놓아주면 두번 다시는 이쪽으로 접속하는 일은 없지않을까?”
자세한 안내문을 참조하지 않았던 이혁도 케릭터를 또다시 생성하려면 개인이 물어야 하는 패널티가 상당하단걸 알고있었다.
그렇기에 임의적인 로그아웃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안전지역이 아닌, 로그 아웃 이후 그 자리에 남겨진 캐릭터의 말로가 어찌될지 뻔하기에.
그리고 토박이 동안양인을 보고서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수원들을 한심한 눈길로 노려보기도 하였지만 결론적으론 입고 있던 옷이 모두 벗겨진채, 나무기둥에 묶이는 신세가 되어버린 이혁. 아직까지 오른쪽 어깨엔 틀어박혀 있는 초보용 검 날에 의해 붉은 핏 물이 조심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장. 이놈··· 아직까지 로그아웃도 안하고 버티고 있는것좀 봐. 지 놈이 살아날 구멍이라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이야. 클 클 클.”
“조금 있으면 다른 경험치들도 몰려올 때라, 빨리 끝내는게 좋지 않을까?”
대장이라 불리는 수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던 수하들이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그것 봐라는 식으로 대답을 이어간다.
“뭐야? 우리 경험치 들이 벌써 도착한거야?”
막 검을 들어 어떻게 요리를 해 줄까란 표정을 지어보이던 수원들도 동료들의 지적에 소란스런 공터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곳을 눈안에 담기도 전,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이의 머리통이 떨어져 발 믿을 뒹구는 모습을 현실감 없이 내려다 보는 것이 더 빨랐다.
수원들 자신또한 깔끔하니 절단되어진채,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향해있던 시선이 찰나의 시간과 함께, 하늘을 날아오른 것과 추락하며 지면과 충돌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안에 담아야만 했다. 그렇게 벌어진 아가리가 흙 더미를 파고들었지만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상태로 짙은 녹색빛깔의 먼지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이혁은 은색갑옷의 출현과 함께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기도 전, 복면을 한 모든 이들의 육신이 바닥을 뒹굴며 가루 더미로 소멸해 버리는 걸 목격하는 것이 한계였다.
장내가 정리된 그 때서야, 금발 머리의 외국계 여성이 눈안에 들어왔고 그녀의 눈길이 자신의 벌거벗은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에 얼굴을 붉힐수 밖에 없었다.
“··· 이곳에선 어쩔수 없는건가?”
혼잣말을 내밷던 그녀가 뭔가 실수했다는 듯이 정중한 말투를 이어갔다.
“반가워요 여행자님. 전···. NPC인 나타샤라 한답니다.”
자신을 NPC라 소개하는 희한한 NPC의 등장이었다.
- 작가의말
읽어 주시는 분들께 항상 미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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