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각자의 시선 (하).
기사들의 물결 속에 수백에 이르던 몬스터들이 와해 되어버리며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광경을 게임을 하면서 실제로 접했던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될까?
잠시였지만 방송을 중개하던 앵커들도 시청자와 같이 화면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뒤이어 살육전이 벌어졌고 굽이 치는 물결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오크의 형상들. 기마들이 질주하는 상태에서 어깨 위를 잃어버리고 검은 피 분수를 일으키는 몬스터라 칭해진 존재들의 대부분이 수림이 우거진 어둠 속으로 뒷걸음 치며 무대에서의 퇴장을 알리는 자신들만의 울음을 토해낸다.
숲의 초입, 바위로 올라선 몬스터의 괴성이 퇴각의 나팔을 의미하였다면 그 아가리 사이로 틀어박혀 들어가는 은색의 화살촉은 그들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몰랐다.
망토의 색감과 동일한 녹색의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삼백여에 이르는 기마대가 기사단의 후미를 따르며 화살을 쏘아 올렸기에 숲의 어둠 속으로 달아나던 형체들의 진로를 흙 바닥과 마주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들을 조정하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숲을 수색하라!”
하킴의 외침에 고슴도치들의 무덤 위를 뛰어 넘어, 어둠과 동화되려는 몬스터의 뒤를 쫓아 숲의 장막으로 질주를 이어가는 기사단들은 얼마 있지 않아 하나의 주검과 마치, 검은 연기가 휘몰아치는 수정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주문 비슷한걸 외우길래 기절만 시켰습니다.”
보고를 마친 기사가 그 검은 인형을 넝마쪼가리 채 말 안장아래로 던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을 뿐.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 이외에는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킴의 품평이 뒤를 이었다.
“꿈틀거리는 모양을 봐선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군. 우선은 이것도 챙겨간다.”
당초부터 많은 수효가 아니었기에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생각하던 하킴의 시야로 자신들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풍경이 들어왔다.
“몬스터란 걸 처음 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부상자들 이외에는 생각보다 피해가 없는 것 같은데요?”
몇 백에 이르는 오크의 형상들 사이로 말을 몰아오던 만달라몬의 의견에 하킴의 대답이 이어진다.
“상업도시라 하더니 몰려오는 유민들이 많은 거겠지···”
말을 잊지 못하던 하킴 또한 죽어있어야 할 시체들의 흔적들이 없다는 것에 더 이상의 추론은 어려워 보였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방관자를 자처하던 시점에서도 사람들이 몬스터들에게 찢어발기는 장면들을 몇 번이나 목격했기에···
하지만 목적지가 눈앞이었던 하킴은 잡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일꾼으로 정의를 내린 플레이어들을 향해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간다.
“너희들 중 몬스터 사체수거에 지원하는 이들에겐 하루 일당을 약속하겠다!”
그 순간, 우연과도 같이 하킴이 바라본 플레이어의 국적이 아메리카란 이유로 유창한 영어발음이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물론, 그것은 맨탈리온이 몇몇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마법 아이템의 효과. 그리고 뒤를 이어 플레이어들 각자의 시야로 퀘스트창이 활성화 되었다.
-정체 모를 기사단의 의뢰-
▷ 의뢰: 몬스터 가죽과 마정석 채취작업을 지원하라.
▷ 보상조건: 인부기준 하루 일당.
가죽과 마정석의 가치가 어떠한지는 하킴들또한 알고 있었기에 일부의 기사들이 몬스터주변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의 눈빛을 밝히고 있었지만 정작 플레이어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주의를 주는 모양세로 비춰 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꼼작하지 않을 것 같은 무리들 사이에서 낯익은 갑옷을 착용한 인형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실례지만 하킴경이 맞으신 가요?”
검은 눈동자에 칠흑 같은 머릿결. 하킴이 알고 있는 여인들이라면 한정되어 있었기에 답안은 바로 마련할 수 있었다.
“정체도 모르는 녀석에게 내 이름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유라는 명백한 악의는 아니더라도 그에게서 자신을 향한 거부감이란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표정이 굳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아론들과 지내던 동안 이곳 귀족NPC들의 성향을 망각하고 있었던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뒤를 이어 좀더 긴장된 자세로 소개를 이어갔다. 하지만 받은 것이 있기에 다소나마 까칠한 대답을 돌려주는 유라였다.
“하니발경의 지도하에 수련기사로 지내고 있는 패큐니아라고 해요. 물론, 아론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으니 관계없다 말할 수는 없지요.”
자신의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여인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던 하킴은, 헛기침을 하며 처음부터 했어야 할 이야기를 이어간다.
“주군에게 의탁했다는 녀석이 네놈이었군. 건방진 말투는 제쳐두더라도 어떻게 훈련을 받았기에 저 정도 것들에게도 쩔쩔맨단 말이냐?”
원래 같았으면 하킴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얼굴을 들어야 했지만 마지막 하나의 단어가 키워드가 되었을까?
지금까지 죽어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듯 특히, 몬스터들을 베어내던 장면이 겹쳐지며 손끝에서 시작된 말초신경들의 괴성에 경련을 일으키는 유라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세이버를 휘두르며 오크의 살결을 베어내던 너무도 생생하던 경험들은 지난번 NPC를 죽이면서 느껴보았던 잊혀진 기억까지 끌어내었다. 그때서야, 주변에서 올라오던 메케한 피 비린내들로 인하여 의미 모를 구역질이 올라왔기에 가슴을 부여잡고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 ···.?”
패큐니아의 그런 모습에 이어질 말을 망설이던 하킴은 자신의 옆구리를 찌드는 만달라몬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고 그때서야 하킴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말이 너무 심했던가? 아무리 이유가 있다지만 여인을 울리다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면목이 없었던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서 어깨를 들썩이는 패큐니아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란 자책을 하던 하킴은 그 동안 남자들끼리 생활하면서 생성된 말버릇자체를 당장에 어떻게 고치냐는 나름의 핑계와 더불어, 이 정도의 일로 흐느끼는 나약함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니냐는 책망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쏘아보는 기사들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결국, 그녀의 곁으로 말을 몰아, 패큐니아의 어깨를 다독여 줄 수 밖에 없었던 하킴이었다.
유라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또는 온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뭔가, 미묘한 분위기와 부끄러운 마음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반되게 어느 시점부터 감정 표출을 시작한 앵커들이 늘어난다.
“사기적인 설정이란 말 밖엔 더 이상 드릴 설명이 없겠군요. 앞서 제가 언급 드렸듯이 GM에서 마련한 깜짝 이벤트가 지금과 같은 기사단의 등장이 아니겠습니까.”
옆자리에 자리한 미연은 자칭 전문가라 칭하는 플레이어의 말에 의문점을 더하였다.
“그보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저NPC는 한순간이지만 어떻게 영어로 말할 수 있었던 걸까요? 분명히 지원자들을 모집하는 퀘스트가 뜨기는 했지만···”
“미연씨가 의문을 가질 만도 하지만 이미, 방송계열이나 상위플레이어 사이에선 고가의 통역아이템을 구비하는 건 일반화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중부대륙의 일부 귀족들이 마법 아이템을 사용한다고 알려졌으니, 저런 기사단의 지휘관쯤이야 당연히 휴대하고 다니겠지요.”
“그렇겠군요. 그러면 이번 이벤트형식의 퀘스트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 생각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확인 창 자체가 없다는 건, 지금이라도 선착순 위주로 진행되는 단기 퀘스트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단돈 1쿠퍼가 아쉬운 판에, 선두 대열만 행운을 거머쥐겠군요.”
플레이어들은 단돈 1쿠퍼도 아쉬운 유민과도 같은 입장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엘리스씨! 이런 이벤트가 있었으면 힌트라도 주셨어야죠. 벌써부터 사백 명 정도가 로그아웃 당했습니다. 말들은 일부분 수거되었다지만 떨어트린 무구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겁니까?”
한백이란 한국의 유저가 엘리스에게 다가와 성토하기 시작했다.
일만이란 정체된 행렬, 이제는 9,621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선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알기 위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접속을 해제하고서 현실로 돌아갔다 다시 복귀하는 경우가 이어졌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이 공유되는 것은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고 불만이 가중되었다.
당연히, 길드마다 선두에 자신들의 간판스타들을 배치하다 보니, 피해 현황이 클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선봉을 자처한 페가수스 길드의 경우는 대부분의 상위 유저가 탈락해 버렸던 것이다.
승자 독식을 원칙으로 하는 게임세계의 룰 상 플레이어들이 죽으며 남겨둔 모든 잔존물들의 소유는 정체불명의 기사단들에게 돌아가는 것.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NPC들은 바닥에 뒹구는 무구들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단지, 발 빠르게 몬스터 수거에 지원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끌어 모은 사체들에서 가죽해체와 마정석 채취 작업을 벌이고 있을 뿐.
그리고 깨닫게 되는 공통분모.
그녀와 기사단의 동일한 복장과 무구들. 지휘관으로 보이는 NPC와 패큐니아란 유저의 친분과시. 모든 정황은 하나의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론이란 이름의 연관성.
이어진 누군가의 등장으로 앞선 추론은 사실을 넘어 여성플레이어 들을 열광시켰으니.
“페임론의 경비대가 다리를 넘어오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소규모로 운영된다지만 열명은 너무하네요.”
자칭 전문가라 칭하던 플레이어의 말에 도움을 줄 요량으로 입을 여는 미연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선 고함을 질렸다.
“그리고 보니, 경비대를 앞질러 나오는··· 하니발! 기사 하니발입니다!”
두발로 뛰어오는 경비대에 비하여 말을 달리는 하니발이 앞서는 건 당연하였고 다리 앞을 메우는 과반수에 못 미치던 여성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자신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연한 노랑머리의 한 기사를 향해 괴성 같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실물로 볼 수 있다니, 하니발님 여기 좀 봐주세요!”
“나 싸인받을수 있을까?”
“결혼해 주세요!”
“하니발경. 당신의 피앙세가 되고 싶어요. 아니, 하녀로도 만족한답니다!”
하니발은 모험가들 무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며 일대 소란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맨탈리온에게서 들었던 정보와 그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며 굳어있던 안면 근육들을 이완시켜 표정 관리를 시작한다.
꾸며졌지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래를 내려다 보던 하니발은 말의 걸음을 조심스럽게 때어가며 자신을 향해 뻗어있는 손마디를 향해 마치, 꽃밭을 손끝으로 스쳐가듯 그 감촉을 느끼듯이 지나친다.
“이름 좀 날린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알만한 광경이다.”
하니발을 기다리고 있는 건, 얼굴 가득 불만족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는 갈색머리결의 덩치 하킴이었다.
“하킴경. 뭘 그런 말씀을.. 그보다 저들은···”
기사들이 모험가들로 추정되는 이들과 함께, 몬스터 사체를 나르는 모습과 가죽을 절제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기에 하킴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일꾼들!”
“···.나중에 이야기 드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하니발은 그의 대답에 잠시지만 한숨지으며 누군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후드로 가린 삼백에 이르는 무리들. 그 중 하니발과 눈이 마주친 하나의 인형이 말을 몰아 다가왔다.
“하니발경. 오랜만이에요.”
“··· ···?”
녹색의 후드를 벗으며 그곳에서 드러난 은색의 물결과 수면위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두 개의 잎사귀모양의 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백옥 같은 피부가 주위를 삼켜버리듯 그녀에게 이목이 집중되었고 일을 하던 모험가, 멀리서 하킴들을 보고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의 동작이 일순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환영하오. 가브.”
하니발은 마치, 포옹이라도 하려는 포즈를 취했지만 말에 올라타 있었기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에 웃음 짖는 엘프 가브였다.
- 작가의말
언제나 올릴때면 부족함을 느끼는 군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좋겠다는 핑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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