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변환계 능력자-03
경계를 넘는 자들! 타키온
보기보다는 풍만한 체형이니 미영이보다 한 치수 큰 옷을 사오면 될 것 같다.
혹시나 몰라 수련을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미영이가 깰 시간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련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옷을 입은 미영이가 컵 하나를 들고 나온다
“오빠, 이거 먹어.”
“뭐냐?”
“칡즙!”
“이거 아버지가 드실 거 아니냐?”
“괜찮아. 아빠가 끔찍하게 싫어하잖아.”
“그래도 어머니가 뭐라고 하실 텐데.”
“아버지가 없으시면 오라버니가 우리 집 가장이옵니다.”
미영이가 애교서린 목소리로 컵을 내민다.
“하하하, 알았다.”
컵에 담긴 칡즙을 마셨다. 약간 쓰기는 하지만 목이 마르던 차라 꽤 좋았다.
“고마워, 오빠.”
자신의 짐을 덜어줬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짐을 더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지만 해줄 것이 없어서 아버지가 드실 칡즙을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넌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네가 가진 그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아빠, 엄마한테도?”
“그래 내가 말해줄 때까지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알았어. 오빠.”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히이, 오빠가 해주는 거지?”
“하하하하.”
“소녀, 조금 전에 정신을 차렸사옵니다. 오라버니.”
“크크크, 알았다. 알았어.‘
사극모드로 돌아서는 미영이의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반찬거리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워낙 요리를 잘해서 밑반찬은 많이 만들어 둔 터라 간단한 것으로 넉넉히 만들었다.
우리가 나간 후 밥을 먹어야 할 사람도 있어서다.
아침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세면을 마친 미영이가 부엌으로 와서 같이 식사를 했다.
나도 설거지를 마친 후 간단한 샤워와 양치질을 했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친 후 미영이와 함께 집을 나왔다.
학교에서 조퇴를 하는 것은 쉬웠다.
1교시가 끝나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얗게 탈색한 얼굴로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니 담임 선생님이 바로 허락하신다.
이게 모범생 역할을 한 덕을 톡톡히 봤다.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오가는 시간 때문인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다되어 있었다.
예비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서 나와요.”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잇던 예향이 모습이 보인다.
‘풋!’
숟가락과 젓가락을 양손에 나눠지고 있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밥을 먹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숨었던 모양이다.
“식사하시는 중이었어요.”
“그, 그게.”
반찬을 더 챙겨 줄까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예향이 더듬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식탁위에 놓은 반찬들과 밥그릇!
그런데 일반 밥그릇이 아니었다. 전기밥솥을 통째로 올려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쌀밥을 십 년 만에 처음 먹었다.”
“그렇군요. 어서 드세요.”
“아니다, 다 먹었다.”
입맛을 다시고 식탁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빈말이다.
“어서 드세요. 안 그러면 다 버려야 합니다.”
“이 귀한 걸 버린다는 거냐?”
“후후후, 손을 대셨으니 끝까지 책임지셔야 합니다.”
“알았다. 네 부탁이라면.”
성큼 다가와 식탁에 앉은 예향이 숟가락을 놀린다.
자르지도 않은 김치를 쭉 찍어서 입에 넣고는 다른 반찬들도 집어 먹는다.
양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무안할 것 같아 내 방으로 갔다.
옷을 갈아입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비상금을 챙겼다.
‘이대로는 곤란하겠지.’
일단 내가 입던 체육복을 꺼냈다. 나름 신경을 써서 산 것이지만 맞을까 모르겠다.
‘일단 나가서 옷부터 사자. 그런 다음에 안가로 가면 되겠지.’
국정원에서 사용하는 안가를 하나 알고 있다.
정확히는 지금 해외에 파견을 나가 있는 블랙요원이 한국 내에 마련한 은신처다.
혹시나 몰라 마련했지만 블랙요원인 그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라 그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생각을 정리한 후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앞에 있어서 벌써 식사를 끝냈나 했더니 입속에 우물거리며 설거지를 한다.
“눠두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이런 것은 여자가 하는 일이다.”
설거지 양이 꽤 많았다. 김치도 그렇고 덜어 놓은 밑반찬도 다 먹었는지 빈 그릇들이 가득하다.
폭식을 한 것이 부끄러운지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하하, 그런가요? 여기 체육복을 놔둘 테니까 씻고 입으세요. 전 잠시 나가서 입으실 옷을 사올 테니까요.”
“아, 알았다. 그리고…….”
“넉넉하게 필요한 것은 모두 사올게요.”
“저, 저…….”
밖으로 나가려는데 자꾸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뭘 말하려고 하는 지 안다.
숙녀에게 필요한 것이 옷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눈대중이지만 정확한 치수를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옷을 샀다. 역시 미영이 보다 치수가 큰 것 같다.
물론 속옷들도 샀다. 예향의 취향이 뭔지 모르지만 적당한 색감에 야하지 않은 것들로 샀다.
속옷가게 점원이 이상한 눈빛으로 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내 얼굴을 이미 본래의 모습이 아니니 말이다.
아무래도 난 남자인가 보다. 상하의 모두 네 벌의 옷과 속옷을 쇼핑하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나 이번에도 집안의 그늘 속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체육복도 섹시하구나.’
반쯤 접은 체육복들이 인상적인 모습이다. 씻어서 촉촉해진 새하얀 살결과 잘 어울린다.
‘정신 차려라. 넌 여자 친구가 있다.’
현실적으로는 연상이기도 한 여자다. 더군다나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도 하다.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아니다.
“여기 있어요. 내 방으로 가서 갈아입어요. 장롱 안에 가방이 하나 있을 거예요. 나머지는 그 안에 넣어서 가지고 나와요.”
“알았다.”
예향이 내방으로 향했다.
역시 여자인가 보다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예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며칠동안 사용할 물품들이다.
30분이 지나갈 무렵 방문이 열리고 예향이 나왔다.
‘사람이 달라 보이는구나.’
핏이 살아있는 옷차림이다. 끈으로 질끈 묶은 머리와 잘 어울렸다.
“나가죠.”
“아, 알았다.”
집을 나와 곧바로 택시를 탔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안가가 있는 성남이다. 좀 높은 곳에 있기는 하지만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안가는 단독주택으로 되어 있다.
높다란 대문에 담장이 쳐져있는 건물로 대문에 번호로 여는 전자키가 달려 있다.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현관문에도 전자키가 달려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해주는 도우미가 온다고 했었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 함께 작전을 펼쳤던 이가 마련한 안가다. 언제 어느 때 이용할지 모른다고 하고 계약을 했다고 했으니 도우미가 올 시기만 잘 피하면 된다.
20분 쯤 지나 안가에 도착했다.
건물을 기감으로 살펴보니 인기척은 없다.
삐! 삐! 삐! 삐! 삐-이!
찰칵!
번호키를 누르니 걸쇠가 풀린다.
“들어오세요.‘
머뭇거리는 예향을 재촉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잘 손질된 정원을 보니 관리가 잘 된 모양이다.
다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변한 것은 없구나.’
나도 한동안 이용했던 곳이다.
미국에서 내가 작전을 수행하다 복귀한 후 CIA의 추적을 피했을 때와 윤대혁과 곽가놈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을 때다.
먼지도 별로 없는 것이 집안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소파에서 쉬고 있어요.”
예향에게 쉬라 말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뒤졌다.
역시나 서랍 밑에 휴대폰이 붙어 있었다. 도우미와 연락이 가능한 대포폰이다.
배터리가 방전이 되었기에 일단 충전을 시킨 후 응접실로 나왔다.
“앞으로 여기서 머물 겁니다.”
“안전한 곳이냐?”
“그래요. 당분간은.”
“알았다.”
“남파훈련을 받은 것 같은데 맞나요?”
“그, 그래.”
“말투가 이곳사람 같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보며 적응을 해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아, 알고 있다.”
서울 말씨를 쓰고는 있지만 군인 같은 딱딱한 말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동안은 내가 매일 이곳에 들릴 거예요. 음식을 하실 줄 아는 것 같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사올게요.”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기에 적응할 동안 식료품 같은 것은 사다줘야 한다.
“좀 있다 말하겠다.”
“일단 이곳에 대해 알려줄게요. 따라와요”
예향을 이끌고 집안을 구경시켜줬다. 다 사용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기에 잠을 잘 곳과 수련을 위한 장소를 알려줬다.
그녀가 잠을 잘 곳은 2층 가운데 방으로 정했고, 수련 장소는 지하실이었다.
이곳 안가를 택한 이유도 지하 수련장 때문이다.
이곳은 원래 사격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완벽하게 소음이 차단될 뿐만 아니라, 지하라 주변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런 은밀한 공간이 필요한 것은 예향이 변환계 능력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블랙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각성하면 의지만으로 모든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어르신의 제자로만 생각했던 것이 변한 것은 이정표를 통해 집으로 오며 블랙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깨달은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주체는 타키온이다. 나는 그것을 인식 했을 뿐이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블랙덕분이다.
그는 자신이 소멸되면서도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의지를 내게 퍼부었다. 그것이 오히려 타키온에게 도움을 주었다. 블랙이 가진 모든 것을 흡수한 것이다.
변환계 능력자의 본질을 타키온을 통해 알 수 있었고, 난 금방 예향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블랙은 예향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진짜 목적은 그녀가 가진 능력을 흡수하는 것일 확률이 컸다. 능력을 갈취 당하게 되면 예향은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어느 정도 안가에 대한 설명을 끝내고 난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충전이 된 휴대폰이 전원을 누른 후 기록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 미자아줌마세요.
-맞는데 누구세요?
“박충호씨 동생입니다.”
-아! 이틀 전에 청소하러 갔었는데.
“당분간 성남집에 머물려고요. 두 달 머물 예정이니까 그동안은 청소하러 오시지 않아도 되신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랬군요. 그렇지만…….
“수고비는 원래 약속한 대로 계속 지급이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그럼 잘 됐네요. 제주도에 놀러가자고 친구가 그랬는데 청소할 날짜랑 겹쳐서 곤란했는데. 이번 기회에 가면 되겠네요. 호호호!
“참 잘됐네요. 잘 쉬시다가 오세요.”
-고마원요.
“예,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공돈이 생기는 일이니 반가운 모양이다.
이제 갑자기 누군가 들이닥칠 일이 없어졌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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