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이름을 잃어버린 신전-03
경계를 넘는 자들! 타키온
나도 모르게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니 진짜 아버지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이 세계에 있을 때만 이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나는 시아니온이다.
누워 있던 돌침대에서 일어나 보려고 힘을 주었다.
애써 힘을 주기는 했지만 그저 머리를 들썩이는 몸짓만 할 수 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힘겨워 보였는지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주신다.
따뜻한 체온을 느껴졌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품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고,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니다. 살아나 줘서 내가 고맙다.”
궁금증이 일었다.
독을 먹은 후에 시아니온, 아니 나에게 벌어진 일들 때문이다. 완벽하게 알지 못하기에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인 이상 상황 파악을 필수다.
“아버지.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중독 때문에 그런 거다. 아주 지독한 독이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다.”
“그랬었군요. 다 나은 겁니까?”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아직 여독이 남아 있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몸에 힘이 없는 것도 제가 독에 중독이 돼서 그런 거군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독살을 당해야 했는지 물었다.
열 살 어린 아이답지 않게 침착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때문인지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리신다.
아마도 영혼결합된 것을 일부나마 느끼신 것 같다.
* * *
헤라크티의 힘으로 인해 독의 진행을 막고 아들이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레고리는 곤혹스러웠다.
‘으음, 헤라크티의 힘 때문인가?’
아들이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영민함으로 인해 기대를 품고 있기는 이렇게까지 달라진 모습을 보면 마트마고의 안배 때문이 분명했다.
‘그래 어쩌면…….’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의지가 깃든 눈동자를 보였다.
한층 성숙해진 아들의 보며 그레고리는 그동안 간직해 온 비밀을 말해 주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이제는 알아야겠지.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마. 너와 나, 그리고 우리 가문에 얽혀 있는 모든 것을…….”
“역시, 뭔가 있었군요.”
아버지의 말에서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시아니온.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들려 줄 이야기는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 세상에 오직 너와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알겠니?”
“예, 아버지.”
심각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하려는 말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용히 나를 뉘이시고 돌침대 옆에 앉으셨다.
아직 몸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인지 내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으시고는 기나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베르카대평원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진실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링크했던 대수장의 비밀과 관련된 일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척이나 긴 이야기였다.
베르카 대평원에서 벌어진 전쟁의 진실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틀렸다.
역사서나 아리타의 서곡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사뭇 달랐다.
아리타의 서곡이 제국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베르카족의 입장에 입각한 이야기였다.
진실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마지막 전쟁의 진실은 가히 충격이었다.
예언의 날에 올 존재를 위해 수만 명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는 사실이 말이다.
아마도 그 존재가 나 일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이러진 이야기는 베르카에 대한 것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오직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의 전승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와 내가 베르카족의 적통 후예라는 것을 알았다.
베르카의 열두 가지라 불리는 사라진 부족들이 남긴 것들에 대한 것과 철저하게 가려진 승계자들에 대한 비밀을 통해서 말이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들은 후에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다.
“그럼, 아리타의 서곡에 쓰여 진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허구만은 아니로군요.”
“그래, 제국의 입장에서 조금 각색되고 변형되어 전해져 내려오기는 했지만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에게…….”
“맞다. 내가 너에게 아리타의 서곡을 강제로 공부하게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르카의 적통을 이은 너만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타의 서곡 중 베르카 일족에 대해 읽을 때 마다 느껴왔던 알지 못하는 분노가 어디서 비롯되었던 것인지를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은 베르카의 열두 가지들을 무참히 잘라내 버린 자들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베르카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우리를 찾아 헤매고 있지.”
“그들이 본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아버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그것은 아직 모른다. 마지막 남은 베르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가문에 대해서 놈들이 아는지는 아직 확실하지가 않으니.”
“하지만 그동안 우리 가문을 노려 온 자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가문과 분쟁이 있었던 다른 가문들의 일을 알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가문을 적대시 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것은 정치를 하다보면 통상 일어날 수 있는 정적에 대한 경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군요.”
아버지의 말에서 그동안 비밀이 철저히 지켜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네요. 놈들이 본가의 정체를 완전히 파헤치지는 않은 모양인 것 같으니 말이죠.”
“그렇다고 봐야겠지. 황가도 그렇고 정적이 되는 자들도 지금까지 본가를 없애려고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메스공작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놈들은 우리가 베르카의 일족이라는 것은 모르지만 본가를 없애려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오고 있다.”
“저를 암살하려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대답을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때문에 나도 마음을 돌리고 너를 이곳 신전으로 데려온 것이다. 네 어머니도 그렇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까. 으드득!”
“으음, 어머니도 놈들 때문에 돌아가신 거로군요.”
저리 분노하시는 것을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것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겉보기에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인내심이 많은 분이라는 것도.
내가 독상을 입은 것이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였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시발점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맞다. 놈들이 네 어미를 그리 만들었지.”
“그렇군요.”
“사실 우리가문은 대대로 브리턴제국의 황가나 고위귀족가문의 여자들과 정략결혼을 해왔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위험한 가문이니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하니 정략결혼을 택한 거군요.”
“황가는 우리가문이 언제나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랬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의지를 잃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맞다. 쉬우면서도 무서운 방법이지. 자식은아무래도 어머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몇 몇 선조들도 그렇고 나 또한 정략결혼을 거부 했다. 그렇게 결혼하신 선조모들께서는 하나 같이 일찍 돌아가셨고, 선조들은 브리턴인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것도 그들의 뜻이었군요?”
“맞다. 브리턴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네 어머니를 죽게 한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놈들로서는 네 어머니가 달갑지 않았을 테니까. 네 어머니가 죽은 후 나는 공작가문의 차녀인 나타샤와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한미한 가문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다른 때와는 달리 말이다.”
“뭔가 있군요?”
“맞다. 뭔가 위험을 느꼈겠지. 사실 브리턴인과 결혼하지 않는 본가 가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만 에이린을 통해 너를 낳을 수 있었다.”
“처음 다른 피를 가진 후계자가 태어났으니 반응이 민감했겠네요.”
“그렇겠지. 뭔가 낌새를 차린 것인지는 몰라도 유리메스공작가에서 곧바로 청혼을 해왔다. 보통은 상처를 한 후 한 해 정도나 지나서 했던 것인데 말이야. 아마도 제국은 유리메스공작가를 통해 우리 가문을 감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군요.”
“본가가 브리턴 제국의 일원이 된 후 항상 그래왔다. 제국의 의도대로 결혼을 한 가주들과는 달리,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을 하면 그 여인은 원인 모르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었지. 그런 후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공작가의 연인들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정말 지독하군요.”
“그렇다. 복속된 후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의심을 풀지 않는 자들이다. 하지만 브리턴제국으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자랑스러운 빛을 볼 수 있었기에 연유를 물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기는 하지만 베르카 일족은 브리턴제국의 정복전쟁에서 가장 나중에 멸망을 했다. 그리고 가장 격렬한 저항을 했던 일족이기도 하지. 우리 일족과 전쟁 때문에 제국이 무너질 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으니 그들도 감시의 눈길을 늦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베르카 일족이 강했나 보군요?”
“강하기도 했지만 무척이나 끈질기기도 했다. 열두 가지가 전멸해가며 끝까지 항쟁을 했고, 제국의 드러난 전력 중 반 이상을 소멸시켰으니까 말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자랑스러워 할 만 했다.
아리타의 서곡대로라면 그 당시 제국은 지금에 못지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반이나 무너트렸다면 베르카에 대한 경계를 지금까지 이어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비록 우리가 정체를 철저히 감추었다고는 하지만 놈들은 본가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베르카 일족의 적통을 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관련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하고 있을 테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것을 보면 그럴 겁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어째서 정략결혼을 시키는 것입니까?”
“본가의 아들들과 브리턴인들을 정략결혼을 시킨 것은 핏속에 유전되는 베르카의 힘을 흐리기 위해서다.”
제국이 무너질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면 브리턴 제국 황가가 우리 가문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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