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월중천(赤月中天)(134)
진주 언가 가주 언한의 이 말을 들은 부운걸개 장송이 아미를 찡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 가주, 그는 이미 우리 개방의 원수요. 그런데 무슨 화해를 하라는 말이오.”
“태상방주께서 저번에 모든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만나서 그 오해부터 푸는 것이 순리일 것 같소이다 만.”
“오해! 좋소. 오해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우리 분타를 공격해 방도들을 죽이는 것도 오해요.”
“그때 분명히 시간을 주지 않았소. 그리고 통고도 했는데, 태상방주께서 그 시간 동안 오해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설마설마하다가 당한 일이니 다른 말을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소이다 만.”
“뭐이라고?”
“아미타불! 두 분은 그만 고정하십시오!”
소림사 방장 지현과 화산파 장문인 금현까지 나서서 말리자 부운걸개 장송은 못 이기는 척 한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지현이 이렇게 말했다.
“아미타불. 태상방주, 빈승이 서 문주를 만나서 그를 마교와의 일전에 동참시킨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가 진심으로 우리 개방에 사죄하고, 보상까지 한다면 마교와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이의를 제기치 않겠소!”
“약속하시오?”
“약속하오!”
“그럼 빈승이 서 문주를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그러자 화산파 장문인 금현이 얼른 화제를 바꿔서 개방 방주 강금홍에게 물었다.
“강 방주, 요즘 마교의 동태는 어떻소?”
“수적과 산적을 모으고, 조직을 정비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정보가 없소이다.”
“형산파, 해남파, 보타문 등의 소식은?”
“그들도 서로 결맹을 맺은 것 이외에는 다른 특별한 움직임이 없소이다.”
“결맹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시오?”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킨다는 것이나 우리와 마교가 싸운 결과에 따라서는 다른 의도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요.”
“그들도 정파의 무리인데, 우리를 도와 마교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소림사 방장 지현이 이 말을 받았다.
“금 장문인, 소승이 형산파 장문인께 사람을 보냈으니 조만간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시죠.”
“정말 그랬습니까?”
“아미타불! 그렇소이다.”
“그들만 우리를 도와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인데······.”
형산파, 해남파, 보타문, 철검문 등만 자신들을 도와주면 마교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화산파 장문인 금현의 그 말이 있었던 그때 태산파 정문에는 황보충이 이끄는 황룡대와 원지훈이 이끄는 와룡대 삼, 사, 오, 육조, 조무와 남일해가 이끄는 장백파 문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중원 오악 중에서 동악(東嶽)이라 불리는 태산, 중국 황제들이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는 곳, 그곳에 터를 잡은 태산파를 잠시 바라본 황보충이 목소리를 높인 것도 그때였다.
“본인은 대현룡문의 부문주 황보충이다. 그러니 속히 나와서 목을 늘이거나 항복을 하거나 양자택일을 해라!”
황보충의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그렇게 태산파를 떨쳐 울렸다.
그러자 태산파 정문을 지키던 이십여 명 태산파 문도들은 귀를 틀어막고, 그 목소리에 저항해 보려고 했으나 이내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창백하게 변하더니 하나둘 쓰러졌다.
“갈! 어디 와서 행패냐!”
한소리 일갈과 함께 오십 대로 보이는 홍포를 입은 인물이 좌우에 오십여 명의 인물을 거느리고 정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러자 황보충이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이곳의 문주인가?”
“흥! 나는 부문주 최낙권(崔樂權)이다. 황보충,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소문처럼 이곳을 범하려고 온 것이냐?”
“그것은 문주가 나오면 알게 될 것이니 문주더러 나서라고 해라.”
“본좌가 태산파 문주 장일강(張一剛)이오!”
그 순간 태산파 정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백여 명의 문도들을 좌우로 거느린 금포 인물이 걸어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목부터 늘이시오.”
“허! 현룡문이 명문 정파로 마교와 싸우고, 원의 기병과도 싸웠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어제 같거늘 오늘 그런 말을 들으니 내 귀가 잘못된 것이오. 아니면 그대의 말이 잘못된 것이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소. 그리고 상황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인 법, 굳이 탓을 하려면 산동악가나 황보세가를 탓하시오.”
“그 말은 잘못되었소. 본문이 산동에 있다고 해서 그들과 우리를 단순 비교하는 것 말이오.”
“좋소. 잘못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장 문주의 언변으로 보아서 말로는 끝날 것 같지 않으니 검을 뽑으시겠소? 아니면 항복을 하시겠소?”
“허! 나는 단지 결하신검이라는 황보 대협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싶어 말한 것뿐인데, 검을 뽑을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선택하라니 더는 할 말이 없소이다.”
“할 말이 없으면 검을 뽑으시오.”
황보충이 이러자 장일강이 부문주 최낙권을 비롯해서 문도들을 들러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싸우다 죽겠느냐? 아니면 항복하겠느냐?”
“싸우다 죽겠습니다.”
“문주님, 싸우게 해 주십시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싸우겠느냐?”
“싸우겠습니다.”
“싸우다 죽겠습니다.”
최낙권을 비롯해 문도들이 이구동성 이렇게 대답하자 장일강이 말했다.
“부문주는 가서 술을 가져와라!”
“존명!”
“황보 대협! 오늘이 이승의 마지막 날인 것 같소. 그러니 어찌 한잔 술도 마시지 않고 싸우겠으며, 또한 저승길을 갈 수 있겠소. 내 생각 같으면 항복해 마교와 싸우든 원나라 놈들과 싸우든 무림 일통을 위해 싸우든 싸우고 싶지만 문도들이 반대하니 어쩔 수가 없소. 그러니 황보 대협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이 말에 황보충도 원지훈도 조무도 남일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최낙권을 비롯해 이십여 명의 태산파 문도들이 작은 탁자 하나와 술 항아리 이십여 개를 가져다 놓자 장일강은 술 항아리 하나를 집어 들고는 문도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 주기 시작했다.
“마셔라!”
“예, 문주님!”
“태산파 만세!”
그렇게 전 문도가 잔을 비우고는 만세를 부르자 장일강도 한잔을 마시고는 잔을 채워 황보충에게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하신검 황보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또 황보 대협에게 죽임을 당할 것도 인연이니 이 술로 그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이 말과 함께 장일강이 술잔을 건네자 황보충은 묵묵히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술 한 잔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장 문주, 문도들을 설득해 항복하시오. 그럼 결코 태산파 명성에 누를 끼치는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오.”
“황보 대협도 이미 보고 듣지 않았소. 비록 태산파가 작은 문파이나 결코 남에게 항복하지는 않소.”
“정녕 항복하지 않고, 죽을 생각이오?”
“이제 술 석 잔을 마셨으니 이만 황보 대협의 솜씨를 보아야겠소.”
“참으로 알 수가 없소. 목숨은 하나뿐인데, 이처럼 의미 없이 버린다면 태산파 선조들이 뭐라고 하겠소. 그러니 항복하시오.”
“잘했다고 할 것이오. 절대 굴복하지 않았으니까.”
장일강이 술 석 잔을 마시고, 이렇게 말하자 황보충은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이런 사람과 이런 문도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라고 더 말해도 그 뜻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오?”
“그렇소.”
이렇게 대답한 장일강이 그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맞추어서 태산파 문도들도 검을 뽑아들고는 황룡대와 와룡대, 장백파 문도들을 노려봤다.
“장 문주! 마지막 부탁이오. 항복하시오.”
“황보 대협, 절대 항복은 없소. 그러니 이만······.”
“장 문주! 재고를······.”
“쳐라!”
항복은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지 장일강은 대답 대신 이렇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태산파 문도들이 황룡대와 와룡대, 장백파 문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유엽표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그들을 덮쳤다.
“섬멸하라!”
황룡대 부대주 조희는 유엽표를 뿌리자마자 대원들에게 이렇게 명령한 다음 그들을 휘몰아 태산파 문도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면서 닥치는 대로 베었다.
그러자 원지훈도 와룡대원들을 지휘해 태산파 문도들을 공격했고, 조무와 남일해 역시 장백 문도들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그 바람에 태산파 정문은 피가 튀고, 비명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때 황보충은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장일강의 태산검법(泰山劍法) 태산창해(泰山蒼海)의 일초를 몸을 틀어 옆으로 흘린 다음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면서 현룡검법 황룡식에 따라서 그의 옆구리를 베어 갔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펼친 태산검법 태산창해의 일초를 몸을 살짝 틀어 피해내는 황보충의 놀라운 움직임에 장일강은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탄성만 토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왼쪽 옆구리를 향해 다가오는 황보충의 검을 왼손에 들고 있는 검집으로 막고는 재차 태산검법 일출만산(日出滿山)을 펼쳐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의 검집이 반 토막이 나며, 황보충의 검이 검집에 이어서 옆구리까지 베고 지나가자 장일강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의 검을 바라봤다.
“검강!”
그제야 장일강은 자신의 검집이 반 토막이 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철로 만들어졌기에 어지간한 보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평생 공력까지 실려 있는 검집이 검강이 아니라면 그처럼 쉽게 잘려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번에 장일강을 베어버린 황보충은 고리눈을 뜨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최낙권과 접전이 한창인 태산파 정문을 동시에 쳐다보고는 이렇게 명령했다.
“와룡대, 이인검진!”
와룡대 대원들에게 이인검진을 구성하라고 명령한 황보충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최낙권의 태산검법 만산일출의 일초를 살짝 피하고는 검을 찔러냈다.
그때 조무와 남일해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접전 속을 휘젓고 다니면서 이리 베고 저리 찌르며 한마디로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장백파 문도들은 실전이 처음인지 가진바 무공과 비교하면 민활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황룡대원들은 그동안의 실전에서 얻은 경험이 바탕이 되었는지 사천 당문 혈전에서 보다 더욱더 진보한 실력으로 태산파 문도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있었다.
“크윽!”
최낙권이 짧은 신음과 함께 옆구리가 갈라져 쓰러지자 황보충도 태산파 문도들에게로 다가가서는 닥치는 족족 베었다.
그 바람에 연달아 비명이 터지고, 시체는 한없이 늘어갔으며, 혈전은 반 시진 가량 이어졌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언제나 끝이 있는 법, 반 시진 가량 이어지던 혈전도 마지막 남은 태산파 문도의 비명을 끝으로 현룡문의 승리로 마감됐다.
“황룡대 경상 둘입니다.”
“와룡대 사망 둘, 중상 둘, 경상 열다섯입니다.”
혈전이 끝나고 황룡대 부대주 조희와 와룡대주 원지훈의 이런 상황 보고를 받은 황보충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이렇게 명령했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싸움에서도 와룡대에서 사망자가 둘이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죽은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치료한다. 그리고 부대주는 태산파를 수색하라!”
“존명!”
이렇게 명령를 내린 황보충은 조무를 찾아가서 장백파 문도들의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조무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섯이나 죽었습니다.”
“시신부터 수습하시죠. 그리고 부상자 치료도 하시고요.”
"그래야겠지요."
그로부터 두 시진이 지나기 전에 태산파 정문 앞에는 작은 무덤 한 개와 큰 무덤 한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장 문주, 편히 잠드시오.”
황보충이 무덤까지 만들어서 태산파 문주 장일강과 문도들을 묻어 주고, 그 앞에 서서 이런 말까지 하자 남일해는 뭐가 못마땅한지 그를 한참이나 노려봤으나 뭐라고 말은 꺼내지 못했다.
이미 황보충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기에 말이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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