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월중천(赤月中天)(157)
서민의 이 물음에 백발노인은 대답없이 검을 뽑아들었고, 그 검에는 순식간에 검강이 맺혔다.
그리고 그가 뿜어내는 살기가 서서히 서민을 옥죄였다.
‘헉! 이 살기는 그렇다면 이자는······.’
경설난비(經雪亂飛)!
서민이 백발노인의 살기를 감지하고, 그 살기에 실린 내공이 무엇인지를 알고 대경실색하는 찰나 그의 검은 경설난비라는 이 초식 이름처럼 온통 하늘을 덮으며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서민을 향해서 떨어졌다.
“만경창파!”
그러자 서민의 입에서 파천검법 만경창파의 개문식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백발노인의 공격에 현룡검법이 아닌 순간적으로 파천검법을 선택해 마주쳐 나갔으니 그만큼 그의 검법이 절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검과 검이 격돌하자 폭음이 터졌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로 물러나서 다시 일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백발노인의 검이 창룡이 바다를 거침없이 헤치고 나가듯 서민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 일초에 서민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면서 봉황의 항복을 받고, 용을 일 검에 베어 버릴 듯 거침없이 맞받았으니 그것이 바로 파천검법 항봉참룡이었다.
그렇게 다시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폭음이 터지면서 백발노인이 훌쩍 뒤로 물러나서 답답한 신음을 안으로 삼키고는 서민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놈은 그들과 무슨 관계냐?”
이 물음을 듣는 순간 서민은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여 이렇게 되물었다.
“이십 년 전 황산에 있었느냐고 물은 것에 네놈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묻겠다. 이십 년 전 황산 천도봉에 천마 위소군, 혜인, 검선 선우백, 권왕 장천행, 남궁세가 남궁산 등과 함께 있었느냐?”
“크하하! 그랬구나! 그랬어!”
“그곳에 있었느냐?”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오늘에서야. 이 모두도 하늘의 뜻이겠지. 그래, 네놈은 그들의 제자냐?”
백발노인이 있었다고, 명확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이 말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었으니 그는 그날 그곳에 있은 것이 확실했다.
하여 서민이 이렇게 또 되물었다.
“그러는 네놈은 그날 그곳에서 도망친 놈이냐?”
“갈!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내가 살아있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정말 너는 그들의 제자냐?”
“죽은 척하고 숨어 있었다고?”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 너는 정말 그들의 제자냐?”
“본좌도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
서민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마당에 더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단박에 이렇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랬어. 그리고 운명이란 이처럼 참으로 가혹하구나. 그러니 이렇게 얽히고설켜 서로서로 죽이게 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그날 그곳에서 중상을 입어 운신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쳐 죽은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으니 중상을 입은 그들도 내가 살아있는지 모르고 그냥 떠난 것이지 절대 도망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와서 숨어 살았다.”
“그들이 모두 떠난 후 나는 가까스로 그곳을 나와 구강(九江)에서 내상을 다스리면서 십 년을 보내고 이곳으로 왔다.”
“그 십 년 동안 내상을 치료하면서 그곳에서 배운 공부를 익혔겠지.”
“그렇다. 더 숨길 것도 뭐도 없으니 이제 되었느냐?”
“네놈처럼 죽은 척을 가장한 놈이나 또 도망친 놈은?”
“그런 놈은 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마 위소군, 검선 선우백, 혜인, 권왕 장천행, 남궁산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살아있는 놈은 그날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 모은 그 무무명명 놈이 유일하겠구나.”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아 서민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백발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이후 항상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 왔다. 그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을 반성하면서 말이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그때 내 나이 팔십, 무엇을 더 얻고, 더 바랄 것이 있는 나이였겠느냐. 그리고 나는 항상 강호를 떠나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고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날 그곳으로 갔으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겠느냐. 그 덕분에 아직도 강호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으하하!”
백발노인의 말에 서민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광소에 모든 의혹을 묻어버리려는 듯 광소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광소를 끊고, 백발노인이 이렇게 물었다.
“더 물을 것이 있느냐?”
“이제는 더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일을 주재한 무무명명 그자도 네놈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나타날 것이니 말이다.”
“그건 맞다. 맞아. 크하하!”
이번에는 백발노인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백발노인의 광소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서민의 입에서 파천검법 최고의 절초인 파천개천의 개문식이 터졌기 때문이다.
은하횡공(銀河橫空)!
그에 맞추어서 백발노인의 입에서도 은하행공의 개문식이 터졌다.
그러자 이내 서민의 파천검과 백발노인의 검이 검강을 머금은 상태로 서로의 목을 노리면서 다시 부딪혔고, 그 바람에 굉음이 터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십여 초의 초식 대결을 펼쳤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하여 서민은 초식을 초월한 경지 즉 심검으로 백발노인을 압박했으나 그도 심검의 경지로 맞받아 다시 수십 번의 격돌을 이어갔지만,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내공 대결을 벌이는 것뿐이었다.
“갈!”
그래서였는지 이렇게 일갈을 뱉어낸 서민이 파천검에 자신의 파천신공 십이 단계 내공을 모두 싣고는 백발노인을 직도황룡(直搗黃龍)의 식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백발노인도 자신의 내공 모두를 실었는지 검강이 파르르 떨리는 검을 들어 역시 직도황룡의 식으로 머리로 다가오는 파천검을 내려쳤다.
그렇게 파천검과 백발노인의 검이 두 사람의 중간에서 격돌하면서 믿기 힘든 굉음이 터졌다.
그것이 일차 격돌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서민과 백발노인의 격돌이 이어졌다.
앞과 똑같은 공격과 대응이었으며,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이제 뒤로 물러나거나 검초를 바꾸어서 상대를 공격할 수 없는 처지에서 기호지세로 맞서게 됐다.
그러니 누구 하나 뒤로 물러난다거나 검초를 바꾸려고 검로를 튼다면, 그 즉시 상대의 검이 머리로 다가올 것이고, 그러면 자연 머리는 두 쪽이 날 것이었다.
그렇게 벼랑 끝 기호지세로 맞선 두 사람의 검이 또 충돌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두 자루 검이 충돌하는 횟수가 더해지면 질수록 백발노인의 입에서는 가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서민의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그렇게 파천검과 백발노인의 검이 열다섯 번을 격돌하고 나자 노인의 입에서는 선혈이 줄기줄기 흘러나와 그의 앞섶이 온통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쾅!”
그래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다시 파천검과 백발노인의 검이 충돌했고, 그 격돌의 여파 즉 각자의 검에 실린 내공의 영향으로 노인은 더 많은 피를 흘렸다.
그것만 봐도 내공 면에서는 서민이 앞선다는 것이 증명됐으나 대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며, 다시 열두 번의 격돌, 아니 내공 대결이 더 이어졌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면서 그 자리에 꼬꾸라져서는 일어서지를 못했다.
하여 파천검을 갈무리한 서민이 그런 백발노인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러기를 반의반 각이 못되었을 때 침음도 비명도 내뱉지 않은 백발노인이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는 힘겹게 일어서는 것이었다.
“더 하자는 것인가?”
“......”
물음에 대한 대답도 없이 백발노인이 검을 들어 올리자 서민이 이렇게 싸늘하게 말했다.
“정녕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
다시 백발노인이 아무 대답 없이 직도황룡의 식으로 검을 내려쳐 오자 서민도 파천검을 고쳐 잡고는 그의 검을 내리쳤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때마다 백발노인은 악착같이 버텼으나 다섯 번째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다시 꼬꾸라졌다.
그러자 서민이 이렇게 말했다.
“잘 가시오. 그리고 당신은 천마 위소군보다 더 뛰어난 고수였소. 죽이기보다는 살려 비무라도 더 하고 싶지만, 불구대천지수이니 어쩔 수가 없소.”
“모든 것이 업보······. 아! 모든 것이 업보······.”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백발노인의 눈에 회한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서민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살려둘 수도 그렇다고 시간을 더 끌 수도 없었다.
이미 현룡문도들과 철검문도들의 격전이 치열하게 벌이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과 함께 서민이 파천검을 직도황룡의 식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백발노인이 검을 들어 막았으나 순간 섬뜩한 절단 음이 들리더니 그의 검과 머리가 그대로 두 쪽이 나버렸다.
이렇게 서민이 초식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검과 검으로 내공 대결을 벌인 최초의 결전은 끝이 났다.
“아무것도 없구나!”
백발노인의 품을 뒤져 혹 중천신공의 필사본이 있는지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자 서민은 미련없이 돌아서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서 어검술로 철검문도들을 공격했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철검문도를 처리하고, 싸움을 끝낸 서민에게 백성이 이렇게 물었다.
“그 백발노인은 누구였는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껏 만나본 최고의 고수였습니다.”
“정말?”
“예, 천마 위소군보다 더 고수였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대원들은?”
그로부터 반시 진 후, 철검문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 현룡문도 일곱은 가벼운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았다.
“전리품은 모두 말에 싣고, 철검문은 불태운다.”
철검문도 그렇게 불탔다.
수색과정에서 찾아낸 철검문 문도를 고문해 백발노인의 정체가 태상문주 여광(呂光)이었다는 것도 알아냈고, 그의 거처도 수색했지만, 중천신공에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기에 모조리 태워버린 것이다.
어떻든 그가 중천신공을 다른 철검문도에게 전수했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현재 살아남은 철검문도가 아무도 없으니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형님들 이제 그만 갑시다.”
불타는 철검문을 뒤로 하고, 서민 등은 그렇게 현룡문으로 달렸다.
그리고 이틀 후 호북 진무산 자락의 제법 큰 개울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는 대원들을 쉬게 했다.
“그런데 동생, 여기가 어딘지는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동북쪽으로는 수라마교가 있었던 동백산, 서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융중(隆中), 북으로는 조금만 가면 신야(新野), 그리고 우리 우측에 보이는 곳이 바로 양양성(襄陽城), 그다음이 번성(樊城)이네. 그래도 모르겠는가?”
“그럼 혹시 이곳이······.”
“그래, 바로 단계(檀溪)네.”
백성이 이 개울이 단계라고 하자 서민이 재차 물었다.
“정말요?”
“그렇다네. 저 밑이 바로 마약단계지처(馬躍檀溪之處)라고 알려진 그곳이야!”
그때 흑성이 끼어들었다.
“마약단계지처라니 그곳이 뭐 하는 곳인데?”
“먹는 것이다. 이 무식한 놈아!”
“나도 알아. 이 백귀놈아. 하여튼 잘난척하기는······.”
마역단계지처는 삼국시대의 유비(劉備)가 채모(蔡瑁)의 추격을 피해 적로(馰盧)를 타고 뛰어넘어 간신히 살아난 곳을 말한다.
그런데 흑백쌍성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서민은 그냥 웃고 말았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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