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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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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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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

DUMMY

리크나이츠력 502년, 길고 길었던 리크나이츠 왕국과 아스트리카 왕국 간의 전쟁은 휴전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때는 양국 합쳐 4개 기사단이 참여한 국가총력전의 양상을 보였지만, 결국 화의론이 힘을 얻게 됨에 따라 아스트리카 쪽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휴전은 침체된 왕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발 벗고 뛰쳐나가 그들을 맞이하는 가족들. 정체되어 있던 무역의 재개, 범국가적인 개간사업까지. 휴전이 불러온 시너지는 백성들에게 실로 오랜만에 ‘희망’이란 단어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라키시아 왕궁 역시 그러한 흐름에 맞춰, 무장한 기사와 군마가 득시글대던 광경은 사라지고 부녀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아졌다. 항상 쇳소리가 들리고 탁한 잿가루 냄새가 풍기던 이곳에 언제 그랬냐는 듯 은은한 사향 향이 드리워져 있으니, 나라 전체가 태평성대로 접어든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한껏 온화한 분위기가 풍기게 된 왕궁 안을 한 소년이 배회하고 있었다.


“젠장, 더럽~더럽게 넓네. 이러다 음식 다 식겠는데.”


제리온은 태피스트리 구경에 취해 길을 잘 외워두지 않은 자신을 책망했다. 어찌어찌 경비병을 속여 성으로 들어온 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다. 이대로 있다간 식사 배달은 고사하고 왕궁 안에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우썅, 썩을, 아버지 바보. 어디 있는 거야!”


제리온의 부친인 로시오 멜피드는 현 왕실 마법친위대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하지만 권력과 부는 꼭 함께 가라는 법이 없는지, 그는 시내에 정원 딸린 집이 하나 있을 뿐 일반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새벽부터 왕궁으로 출근해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돌아왔는데, 이 때문에 제리온은 집에 남아 시간을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빈민가 아이들과 어울리기 일쑤였다.

그가 이렇게 도시락을 들고 왕궁을 찾은 이유도 거기 있었다. 로시오는 혼자 지내는 아들을 생각해 늘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날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바쁜 일이 있거나 높은 사람과 만날 일이 생긴 걸 거라고 메이드가 말했다. 제리온도 이에 수긍했고, 그는 보통 아이들이 그렇듯 약간 시무룩해져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무료한 오후와 ‘즐길 거리’를 향한 그의 열망이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아이디어란, 직접 도시락을 싸 로시오에게 갖다 주는 것이었다. 물론 점심을 갖다 주는 건 핑계고, 실상은 왕궁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의도였다. 뭐, 아버지를 향한 애정도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제리온은 궁을 구경한다는 기대감에 취해 정신없이 계획에 착수했다. 이미 식사를 마쳤을 거라는 메이드의 충고 따윈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햄이며 커틀릿 등이 담긴 도시락통을 등에 단단히 동여매고는 당당하게 왕궁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6살짜리 꼬마가 다니기엔 왕궁이 너무 넓고 복잡하다는 게 문제였다. 하물며 여자나 아이들이 다니는 후문 쪽은 안내판 같은 것도 없어서,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장소는 고사하고 1층에서부터 길을 잃고 말았다.


“으...여긴 어디야~!”


복잡한 구조에 화가 나려고 했다. 그러다 마침 맞은편에서 한 남성이 걸어오자, 제리온은 냉큼 다가가 길을 물었다.


“저기요, 길 좀 물을게요. 여기 마법친위대가 근무하는 곳이 어디에요?”


“응? 마법친위대? 그건 왜 묻는 거니?”


20대 중반쯤 됐을까? 뚜렷한 이목구비나 빗어 올린 머리가 굉장히 호방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기 허벅지에도 닿지 않는 꼬마가 길을 물어오자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점심 배달 왔어요. 어쨌든, 알아요 몰라요?”


“배달이라고? 음...마법사들 연구실이라면 아마 쭈욱 가다가 계단 올라가서 3층 맨 끝 구석일 텐데.”


“아하!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


제리온은 꾸벅 인사하곤 그대로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그는 아버지의 거처를 찾아낸 기쁨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성공했다는 승리감에 취해 통통 뛰며 회랑을 가로질렀다.

그 젊은 청년은 제리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막만 한 어린애가 음식을 배달한다고 하니 기이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제리온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내 조카보다도 어린 것 같은데, 요상한 꼬마로군.”


그는 그러다가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대낮부터 졸음이 밀려왔다. 그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고는, 왕궁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라~, 람람이 어디서 개고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라고 팔자 좋게 지낼 수는 없지. 오늘도 도서관이다!”


***


제리온은 신이 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버지의 거처를 알아내자 미로 같았던 왕궁 구조도, 기이하다 못해 무서웠던 건물 장식품들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왕궁을 정복한 듯한 기분이었다. 3층 구석 끝이라고 했던가? 그는 가랑이를 쫙쫙 벌려 한 보에 두 계단씩 올라가며 자신을 과시했다.

막 2층에 다다르고, 그대로 3층으로 내달리려 할 때였다. 마지막 계단을 훌쩍 점프해 정복한 그는, 왕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요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힝...훌쩍...훌쩍...”


텅 빈 복도 한가운데, 웬 소녀가 속옷차림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녀는 멀리서도 광채가 느껴지는 밝은 백금발(Blonde)에, 토끼 자수가 놓인 잠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잠옷 외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는데, 대리석 바닥이 차가운지 이따금 한쪽 발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울었다.

그대로 무시하고 갔을 수도 있으련만, 자기 또래 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이 그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제리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어이~. 왜 울어?”


“훌쩍...훌쩍...”


“아니, 울지만 말고, 왜 우는지를 알려달라니까.”


“훌쩍...힝...”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제리온은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양팔을 눈가에 문대느라 앞을 볼 겨를이 없었고, 때문에 제리온 쪽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찌나 눈물이 샘 없이 흐르던지, 계속 훔치는 데도 그 사이를 뚫고 내려와 턱에 맺힐 정도였다.


“뭐, 싫음 말고. 잘 있어라.”


여자애가 우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으니 점점 흥미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리온은 보건 보지 않건 손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 걷고 있자니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쌌어.”


“응?”


“이불에 오줌 쌌어. 힝...그랬더니 아버님이 화가 나서 밤 될 때까지 여기 서 있으래.”


“진짜? 우헤헤헤.”


제리온은 폭소를 터뜨렸다. 간밤에 오줌을 지렸단 말이렷다? 자신은 오늘 아침 아무 사고 없이 깨어났으니, 자연스레 양자 간에 승리자와 패배자의 명암이 나뉘었다. 맹랑한 소년은 한껏 승리감에 도취되어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키가 제리온보다 한 뼘쯤 더 컸지만, 그런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줌을 쌌단 말이야? 야, 그런 건 띨띨한 꼬맹이들이나 하는 거잖아. 푸하하.”


물론 자신은 최근 1주일간 이불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띨띨한 꼬맹이 축에선 제외된다. 그의 조롱에 소녀는 복이 받쳤는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흑...흑...우에에에...”


“어? 야, 또 울어? 왜 울어?”


소녀가 이렇게 큰 소리로 울 것이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당황하여 소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녀는 도무지 울음을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여기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줄행랑인데, 그건 왠지 패배하는 것 같아 주저가 됐다.

어떻게 그녀의 울음을 멈출까 고민하고 있자니, 어딘가에서 꼬르륵, 하는 허기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금방 점심을 먹은 제리온이 그럴 리는 없었고, 소녀 쪽에서 난 소리였다. 소녀도 자신의 배에서 나온 소리에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 떨더니 울음을 멈췄다. 제리온은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배고프냐?”


“...히잉..”


끄덕끄덕.


“먹을 거 줄까? 햄이랑 과일 같은 것도 있는데.”


끄덕끄덕.

제리온은 등에 메고 있던 도시락 가방에서 음식을 꺼냈다. 소년은 도시락을 아버지에게 갖다 준다는 본연의 취지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가 커틀릿을 냅킨에 싸서 건네자, 소녀는 냉큼 받아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소녀는 낯선 사람이 주는 건 받으면 안 된다는 의식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커틀릿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통 안에 든 소시지를 집어 들었다. 소녀가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제리온도 입맛이 동해 같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헤, 맛있다.”


소녀가 소시지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제리온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눈웃음을 지었는데, 언제 대성통곡을 했냐는 듯 화사한 얼굴이라 제리온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눈이 퉁퉁 불어 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우는 것보단 웃는 게 어울리는 아이였다.

도시락을 다 먹자 소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고마워, 잘 먹었어. 넌 이름이 뭐야?”


“어, 나? 제르카엘시온 멜피드.”


“...응? 잘 못 들었는데.”


“제르카엘시온 멜피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르카엘시온이 이름이야?”


“...그런데.”


그러자 소녀는 진귀한 구경이라도 한 마냥 손뼉을 쳤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자 제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우와, 나 이름이 성보다 긴 사람 처음 봤어! 멋지구나! 제르멜론? 아니, 뭐랬더라.”


“...그냥 제리온이라고 불러라.”


제리온은 순간적으로 빈정 상했지만, 자기 이름 가지고 놀림당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그냥 넘어갔다. 그러자 소녀는 귀엽게 혀를 내밀며 자기 이마를 톡 두드렸다.


“헤헤, 고마워, 제리온. 나는 레미나야.”


“레미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는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았다. 그런 형태의 이름이야 워낙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보다는 이 철부지 아가씨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왕궁은 국왕과 그의 가족이 사는 곳이라 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 꼬마 아가씨의 행색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게다가 오줌을 싸 벌을 받고 있다고 했던가? 제리온에게 왕족의 이미지는 굉장히 고귀하고, 우아하고, 벌꿀 냄새가 풍기는 그런 느낌인 반면, 눈앞의 소녀는 이부자리도 제대로 사수하지 못한 패배자에 불과했다.

제리온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 여기서 사냐?”


“응. 여기가 우리 집이야.”


“흠.”


아무래도 왕궁에서 일하는 메이드의 가족인 모양이다. 제리온의 집에도 메이드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돈 많은 귀족들은 메이드를 수십 명씩 고용한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왕 정도 되면, 수백 명의 메이드를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 왕은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드가 수백 명이면 자고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지 않아도 될 테고, 먹다 남은 잔반은 알아서 처리해줄 테고, 그리고, 어쨌든 굉장히 편리할 것이다.


‘우와, 진짜 살 맛 나겠네. 왕 개새끼.’


제리온은 망상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레미나 쪽에서 질문을 던져왔다.


“제리온은 어디 사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퍼뜩 놀라 답했다.


“어, 나? 난 궁 밖에 사는데. 에니아레스 마구간 근처.”


“헤, 궁 밖에서 사는구나.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아버지 점심 갖다 주러.”


그리고 그 아버지 점심은 둘이 깨끗이 비워버린 뒤였다. 레미나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제리온네 아버지가 점심을 굶고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에에...저, 그럼 어떻게 해? 다 먹었는데...”


그러자 제리온은 뒷목을 잡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응? 별로 상관없어. 그건 핑계고, 사실 왕궁 구경하러 온 거야.”


“그...래? 다행이다. 난 내가 다 뺏어 먹은 줄 알고.”


레미나는 크게 가슴을 쓸었다.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금세 표정을 바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기 저기! 궁 밖에서는 뭐 하고 살아? 막 강에서 헤엄도 치고 그래?!”


“뭐 하고 사냐니...딱히 특별한 건 없는데...”


제리온이 건성건성 답했는데도, 그녀는 호기심 덩어리가 되어 마구 달라붙었다. 둘은 아예 복도에 자리 잡고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화는 레미나가 질문하고, 제리온이 이에 답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녀는 궁금한 게 어찌나 많은지, 궁 밖에 사는 사람들은 똥이 무슨 색이냐는 식의 질문까지 했다. 제리온도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계속 대답하다 보니 왠지 자신이 선생이 된 듯한 착각이 들어 신나서 떠들어댔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두 꼬마의 재잘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돌연 화제가 변한 것은, 맨발인 레미나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비비면서 시작됐다.


“이잉...발 시려워.”


그녀는 무릎을 끌어 모아 치맛자락 위에 발바닥을 올려놓았다가, 그것도 효과가 없는지 땅바닥에 손을 대고 그 위에 발을 겹쳤다. 하지만 이건 도리어 손등이 차가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쩔쩔매자 제리온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추워?”


“...응. 얼어 죽을 거 같아아.”


“기다려봐. 내가 굉장한 걸 보여줄 테니.”


그는 의기양양하게 수인을 맺더니, 이내 발치에 작은 빛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레서 히트(Lesser Heat)."


그러자 난로 가에 앉은 것처럼 빛에 닿은 부분이 따뜻해져왔다. 레미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빛은 형체가 없었고, 단지 열을 발산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우와! 이게 뭐지?! 제리온, 이게 뭐야아!”


“하, 이게 바로 마법이라는 거다. 사실 나는 마법사야.”


물론 마법사라는 건 순 거짓말로, 제리온은 이제 막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풋내기였다. 그가 만들어낸 빛도 하급마법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하는 것으로, 마법 입문자들이 배우는 가장 초급 마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레미나가 알 리 없었다. 그녀는 까무러치게 놀라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와! 마법?! 나 마법 처음 봐! 너 정말 대단하구나!”


“훗, 그렇지? 난 대단해. 마법사니까.”


제리온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신을 뽐내려고 마법을 쓴 것인데, 레미나가 열렬하게 호응까지 해주자 그의 콧대가 하늘까지 닿을 듯했다.

그러나 레미나가 예상외의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나도 알려줘.”


“으엉?”


레미나는 그 큰 눈을 깜박이며 달라붙었고, 반대로 제리온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런 그녀를 흘겼다. 그는 레미나의 순진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가 갑자기 웃자 레미나는 의아해했다.


“에에? 왜 웃어?”


“헤, 헤, 가르쳐달라니 그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웃겨? 왜?”


“얌마, 마법이 아무나 배우는 건 줄 아냐? 너 같은 건 택도 없어 택도. 괜히 시간낭비 하지 말고 바느질이나 배우는 게 더 유익할 거다.”


제리온은 엄지를 아래로 척 뻗으며 그녀를 조롱했다. 그러자 아무리 넉살 좋은 그녀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순 없었는지 발끈하고 나섰다.


“우쒸이, 그게 뭐야?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마법은 말이지, 나 같은 머리 좋은 사람만 배울 수 있는 거야. 하물며 넌 계집아이잖아. 될 리가 있겠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제리온도 머리 나쁘다 뭐. 너도 마법 배우지 마!”


“뭐가 어째! 나 머리 좋다니까! 머리 나쁜 건 네 쪽이지, 이 계집애야!”


“우이이...”


전혀 근거도, 논리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말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납득하고 만다는 게 어린이들의 특징이었다. 레미나는 뭔지는 몰라도 자신을 깎아내리는 주장에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싸움으로는 제리온을 이길 재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냅다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왁! 뭐 하는 거야!”


“마법 가르쳐줘~. 따뜻해지는 거 가르쳐달란 말이야!”


“이년이 어디서 생떼얏!”


이런 도발에 진다면 사나이가 아니다. 그는 레미나의 양 볼을 움켜쥐고 그대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미나도 그의 양 볼을 꼬집어 맞대응에 나섰다.


“우에에에...아파, 아파파. 빨리 놔아!”


“너부터 놔 이년아!”


“아업 가흐혀요~!”


“좆까!”


“...레미나, 뭐 하는 게냐?”


끝이 보이지 않던 둘의 투쟁은, 난데없이 나타난 중년 남성의 제지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남자는 가벼운 평상복 차림에 등에는 담황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잘 정돈된 수염이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또한 그의 뒤에는 붉은색 로브를 걸친 남성이 서 있었는데, 그는 제리온을 발견하자 짓눌린 신음을 뱉었다.

두 꼬마는 어른들을 향해 동시에 외쳤다.


“아버지!”


“아버님!!”


둘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투닥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평상복 차림의 남자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로브 입은 남자에게 물었다.


“...벌을 세워놨더니 이게 무슨...로시오, 저 소년, 아는 사인가?”


로브 입은 남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들입니다.”


“그래? 참 씩씩해 보이는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즈음 제리온을 당해낼 수 없었던지 레미나가 울먹이며 남자의 무릎에 달라붙었다.


“우에에엥! 아버님~아버니임~.”


그녀는 남자의 바지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마구 부비적댔다. 바지가 콧물, 눈물로 적셔지는 걸 보며 남자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남자가 어린 딸을 달래는 사이 로시오와 제리온은 말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너 이눔쉬키, 네가 여기 왜 있어?


-에 또...그게...


남자는 레미나의 등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오냐오냐. 아버지 안 도망가니까 일단 진정 좀 하거라. 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자 레미나는 쫑긋 고개를 들더니,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 제리온이요, 아, 제리온은 저기 저 남자앤데, 글쎄 저보고 마법 배우지 말래요.”


“응?”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는 배웠단 말인가? 그가 딸아이의 발언을 해석하는 동안에도 레미나의 칭얼거림은 계속됐다.


“정말, 저보고 머리가 나쁘다니, 여자애라서 안 된다느니, 후엥~나빴어, 정말! 아버님, 저 머리 좋죠? 나쁜 거 아니죠? 마법 배워도 되는 거죠?”


“...으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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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6) +1 15.04.11 838 23 21쪽
124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5) +1 15.04.11 931 29 18쪽
123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4) +3 15.04.09 1,052 33 25쪽
122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3) +3 15.04.09 973 25 19쪽
121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4 15.04.09 744 25 13쪽
12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 +1 15.04.09 1,013 25 17쪽
119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6) +3 15.04.09 940 28 16쪽
118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2 15.04.09 826 30 15쪽
117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4) +7 15.04.07 1,139 35 22쪽
116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3) +2 15.04.07 936 31 17쪽
115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2) +2 15.04.07 743 32 11쪽
114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2 15.04.07 1,032 28 18쪽
11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4) +1 15.04.07 985 28 14쪽
11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3) +4 15.04.06 991 31 15쪽
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1,000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5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2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0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4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3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3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2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4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5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7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3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70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6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4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7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2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6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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