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티잉.
바위를 벗어나자마자 화살 하나가 디리터를 향해 날아왔으나 거짓말처럼 반투명한 막에 튕겨 떨어졌다. 디리터는 땅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흘깃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마법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자신의 미간에 꽂혔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어깨가 오싹거렸다.
그 남자 역시 화살이 맥없이 떨어진 것을 보고 다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한 발의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공격은 여지없이 봉쇄되었다. 화살은 디리터의 근처에 간 것만으로도 튕겨 나왔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 같은 그 반동에 달려가는 디리터도 신이 났다.
“오우! 이거 정말 멋진데! 으라차라차차!”
그는 아예 몸을 훤히 드러내놓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디리터는 이겼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그 남자의 움직임을 놓쳤다. 제리온의 마법 덕에 그 남자의 모든 공격이 봉쇄되었으므로, 이걸로 낙승을 거둘 거라 자신한 것이었다. 디리터가 무방비하게 달리고 있는데, 멀리서 제리온의 외침이 들려왔다.
“야 임마! 아까 얘기 안 했는데, 그 폭발하는 화살은 못 막는다!”
그 말에 느슨해져 있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이런 썅!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 할 거 아냐!!”
디리터는 뒤늦게 지붕 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막 화살을 재고 있었는데, 그가 무언가 나직이 읊조릴수록 화살이 점점 더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예의 그 폭발하는 화살이었다.
디리터는 대경실색하여 숨을 곳을 찾았으나 주위엔 넓게 펼쳐진 밀밭만 보일 뿐, 몸을 가릴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지그재그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선 부디 그 남자의 화살이 빗나가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화살이 쏘아졌다. 디리터는 순간적으로 화살의 경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화살은 예의 그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진 않았다. 아마 폭발하는 화살과 광속의 화살은 서로 양립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디리터는 재빨리 화살의 궤도를 예측했다. 화살은 디리터의 정면 몇 미터 앞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분명, 그가 달려올 것을 예측하고 그 예상 지점을 노린 것이었다. 궤도를 예측했으니 그다음은 행동이었다. 그는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달려오던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화살은 그가 예측한 대로 그의 앞쪽에 떨어졌고, 뒤이어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우우웅.
“으아, 진짜 못 해먹겠네!”
디리터는 폭압에 쓸려 다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애써 몸을 추스르고 보니 전방에 마차 하나는 들어갈 만한 커다란 구덩이가 생성되어 있었다. 재빨리 몸을 날리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패인 구덩이처럼 산산조각 났을 게 분명했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띵했으나 맘 편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디리터는 다시 몸을 일으켜 구덩이를 뛰어넘어 달려갔다. 그 남자와의 거리는 이제 불과 30여 미터였다.
디리터는 상대방의 상황을 확인하려고 다시 지붕 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남자가 활에 세 개의 화살을 거는 장면이었다. 디리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 개의 화살은 모두 붉은빛을 뿜고 있었다. 무려 세 발의 폭발하는 화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을 모두 피하긴 불가능했다.
디리터는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방앗간까진 코앞이니, 건물 안으로 숨는다면 시야가 가려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것이었다. 단지 30여 미터의 거리. 내달리면 몇 초 만에 도달하는 거리인데도 신기루를 쫓는 것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리터가 방앗간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 남자가 공격준비를 끝마치는 게 더 빨랐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디리터의 정수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제 그와 디리터와의 간격은 고작 십여 미터밖에 되지 않아서, 보통 궁수라도 확실히 명중시킬 수 있는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가 막 시위를 놓으려 하는데, 갑자기 그의 뒤편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마침 그 시간 게네스가 에레이시아의 집을 공격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폭발의 진동이 근처까지 전해진 건 아니었으나,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에 순간적으로 그 남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덕분에 그의 조준점이 약간 비틀어졌고, 화살은 모두 디리터의 뒤편 밭두렁을 강타했다.
퍼퍼퍼펑!
화살은 땅에 닿자마자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이 장면을 봤다면, 어딘가의 군대가 망고넬(mangonel)을 이용해 가차없이 투석을 날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디리터는 후끈한 바람을 등에 업고 그대로 도약했다. 그는 울타리를 밟고, 다시 창틀을 밟은 후 그대로 방앗간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잡았다, 이 개자식!!”
그 남자 역시 마지막 공격마저 빗나갈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지붕에서 뛰어내리려 했으나, 디리터의 움직임이 너무도 신속했다. 그는 순식간에 접근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오, 이런.”
그 남자는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려 디리터의 공격을 피했다. 디리터가 쓰러진 그의 상체를 그대로 찍어버리려 하는데, 그가 넘어진 채로 디리터의 발을 걸었다.
“우웍!”
지붕의 경사가 급한 데다, 예상치 못한 역습에 디리터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내친김에 디리터의 옆구리를 걷어찼고, 디리터는 경사면을 따라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 이리저리 팔을 휘둘러보았으나, 아쉽게도 지푸라기 몇 올 말고는 잡히는 게 없었다.
“으아악! 씨이바알!!”
“후우, 지금 건 꽤 위험했는걸.”
그 남자는 식은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대로 떨어진 디리터를 향해 활을 겨누려 하는데, 뒤편에서 누군가 난간을 딛고 뛰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그가 황급히 등을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이칼롯이 검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굴러갔다. 그는 이칼롯의 접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디리터 혼자 마법 방어를 믿고 돌격해 온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군인 디리터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이칼롯의 노림수였다. 디리터의 과장된 몸짓 덕에 그 남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이칼롯이 그 틈을 노려 측면을 돌아온 것이다.
“으음...!”
이칼롯이 날카롭게 파고들었으나, 그 남자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이칼롯의 공격을 피하는 한편 들고 있던 화살을 그대로 다트 던지듯 던졌다. 활에 잰 것이 아니라 속도도 위력도 형편없었지만, 화살은 정확히 이칼롯의 눈을 노리고 날아왔다.
“크윽....”
이칼롯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물려 화살을 걷어냈다. 그가 다시 공격할 자세를 취했을 땐, 이미 그 남자의 화살이 자신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이칼롯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코앞의 거리, 피한다고 피해지는 간격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어깨로 훔치며 웃었다.
“정말 애먹이는군요.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다만, 제 기량이 더 뛰어났다는 게 당신들의 패인이네요.”
“.....”
이칼롯은 화살촉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그저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의 태연함에 그 남자가 껄껄 웃었다.
“으하핫! 로샤단은 언제나 절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당신들 같은 사냥감은 정말 흔치 않답니다. 자, 뭐 마지막으로 할 말 없으십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이칼롯이 유언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그대로 그의 이마에 화살을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이칼롯은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그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믿는다, 제리온.”
그가 말을 맺는 순간, 보라색의 구체가 쏜살같이 날아와 그 남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어딘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몸이 그의 활처럼 휘어졌다.
“커...헉!!”
구체의 위력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그 남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붕 떴다. 이칼롯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 남자는 격통 속에서도 화살을 쏘려 했으나, 이칼롯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의 왼팔이 활대를 쥔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그 남자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이내 그의 잘린 어깨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그는 자신이 흘리는 피의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분출하는 핏물이 이칼롯의 뺨을 적셨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윽 훔치고는, 그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 남자는 남은 한쪽 팔로 잘린 어깨를 붙잡고 있을 뿐, 저항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하...크....크....킥!”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의 신음이 점차 웃음소리로 바뀌어갔다. 여전히 피는 멈추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조소했다. 그의 정신병자 같은 모습에 이칼롯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지? 우리가 이겼다, 안개송곳니.”
그 남자는 웃다가 호흡이 엉킨 듯 크게 기침을 해댔다. 그는 그러면서도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
“키...키킥! 쿨럭, 쿨럭! 아하, 예, 아무래도 제가 진 것 같군요. 이거야 원, 쿨럭! 전혀 예상 못한 공격이었습니다.”
그는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축 늘어졌다. 잠시 후 아래로 떨어졌던 디리터와 함께 제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온은 피곤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늘어진 모습을 보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 이 밉상 자식아, 내 일격이 어떠냐?”
그 남자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아, 아~주 훌륭했습니다. 포스 미사일(Force missile)입니까? 쿨럭, 하지만 그 바위에서 쏜 거라면 제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을 텐데요.”
“너한테 배웠다 자식아. 엑셀러레이트(Accelerate)를 포스 미사일에 부여했지.”
그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자신의 부상보다도 제리온의 설명에 더 관심을 쏟았다.
“마법에 마법을 부여했다는 겁니까? 그런 마법식이 존재했다니...아무래도 리크나이츠의 마법기술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네요.”
그의 자조적인 말투에 제리온이 콧방귀를 뀌었다.
“팔 잘린 놈이 궁금한 것도 많네. 니놈의 그 잘난 활질도 이제 영영 끝이다.”
그는 싱긋 웃었다.
“킥킥....예, 그렇군요. 고작 이런 데서 목숨을 잃게 될 줄이야.”
그는 중상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대단히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일이 틀어지는 것조차 이미 계산에 있었던 것 같은 소탈한 얼굴이었다. 그가 계속 실없이 웃고만 있자, 이칼롯이 그의 목을 겨눈 채 말했다.
“안개송곳니, 이게 뭘 뜻하는지 잘 알 거다. 너를 보낸 자가 누구고, 너희의 목적은 무엇이지?”
그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쿨럭, 왜 죽이지 않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일행의 얼굴이 일제히 험악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스크롤의 위험성은 이미 질리도록 체험한 후였다. 이칼롯이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대로 살짝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그 남자의 숨통은 여지없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걸 다시 쓰게 놔둘 거라 생각하는 건가? 허튼수작 부리지 마.”
“하아...아아...실력은 괜찮은데 다들 순진하시군요. 제가 이래 봬도 꽤 규율에 엄격한 성격이라서요.”
“어이, 너!”
“익스플...”
이칼롯의 팔이 살짝 비틀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동어를 외치던 그 남자의 입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자지러지는 비명은 없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 한 건지, 아니면 웃으려 한 건지 입을 몇 번 뻐끔거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스스럼없이 목숨을 끊는 모습에 질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를 죽인 이칼롯도, 제리온과 디리터도 그렇게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잠시 후 이칼롯이 검을 칼집에 집어넣는 것으로 상황의 종결을 알렸다. 제리온이 그 남자가 쥐고 있던 스크롤을 빼내며 말했다.
“미친놈이네.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짤 없이 죽어버리냐.”
일행은 각자 지붕 난간에 걸터앉은 채 휴식을 취했다. 너무 엄청난 상황을 겪어서인지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디리터는 조금 전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어깨가 부어 있었다. 그는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자신이 달려온 밭길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열심히 화살을 쏘아댄 덕에 밀밭 여기저기엔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저걸 전부 피하면서 왔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알룬도가 말한 대로라면, 안개송곳니는 저런 놈들만 있다 그거잖아?”
그가 혀를 내두르자, 이칼롯이 그에 동조하며 말했다.
“폭발하는 화살에, 엄청나게 빠른 화살. 솔직히, 행운이 겹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 조금 전 우린 몇 번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진짜로. 아까 한 번에 화살 세 개 쏠 때는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 그런데 그 폭발음은 뭐였지? 그거 아니었다면 난 그대로 황천길 갈 뻔했는데.”
“아.”
지붕 위로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난리를 쳤는데도 자경단이 한 명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폭음 때문에 디리터가 살아남았다면, 폭발은 대체 어디에서?
셋은 일제히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루도랑 마리네!”
“어이구, 맙소사!”
이칼롯이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광장 부근에서 아직도 진화가 되지 않아 새까만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미처 그 남자의 시신을 조사할 틈도 없이, 일행은 그대로 광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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