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4)
일방적인 선고. 귀족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레이시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보수파가 대다수인 귀족평의회에 있어 전쟁은 골치 아픈 사안에 불과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레이시는 물론이고 안개송곳니마저도 주저 없이 해체시킬 인물들이었다. 그걸 지금까지 막아왔던 건 몇 안 되는 급진파와 발베릿 공작의 후원 덕이었는데, 발베릿 공작이 레이시를 견제하고 급기야 알룬도의 배신이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베셸리모가 자리를 뜨자 다른 귀족들도 하나 둘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등 돌리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이게 여러분이 원하는 것입니까? 브리토리스는 500년 전의 굴욕을 잊었단 말입니까!”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그들의 치부를, 정확히 말하면 브리토리스 국민의 치부를 건드린 것이었다. 500년 전의 전쟁. 신의 아이를 대동해 벌였던 브리토리스와 리크나이츠 간의 전쟁은 강맹했던 브리토리스를 카잘 산맥 북쪽으로 축소시켰고, 타국과의 외교 또한 단절되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이제 와서는 어느 정도 사그러 들었을지라도, ‘복수’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브리토리스 국민을 지배한 키워드였다.
베셸리모가 등을 돌렸다. 그의 쳐진 눈은 레이시를 향하고 있었다.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닐세. 죄 없이 죽어갈 민간인과 병사들을 생각해보게나. 이런 명분도 없는 싸움에 장병들을 바치란 말인가?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고통받았네.”
“병사는 필요 없습니다! 로시느만, 아반케즈의 아이만 있으면 군대 따위 숫자에 불과합니다!”
베셸리모의 언성이 높아졌다.
“신의 아이, 신의 아이! 그 신의 아이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일세! 선대 펠아람의 아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면서 그런 맹신을 하는 건가?! 신의 아이는 재앙이야. 그런 절제되지 않은 힘에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네!”
레이시는 뭔가 반박하려다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을 멈추자 전당 안은 찬물이라 끼얹은 것처럼 침묵이 감돌았다. 베셸리모도 어찌나 흥분했던지 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전당을 울릴 정도였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둘의 기세에 눌려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베셸리모는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해 다시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돌연 그가 히죽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잘 알았습니다. 재상께서는 로시느를 통제할 수 없는 게 두려우신 거군요. 모든 게 다 자기 손바닥 안에 있어야 만족하시는 분이니까요. 이해합니다.”
“레이시! 말조심하게!!”
보다 못한 발베릿이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레이시의 언행은 평의회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좋습니다. 평의회가 내린 결정을 제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안개송곳니 암살단은 내일부터 전면 활동을 중지하겠습니다. 로시느도 멀리 유배시키도록 하죠. 그게 여러분이 바라는 일이라면.”
그때 전당에 있던 귀족들은 등을 훑는 소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레이시가 평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음은 어린애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말투는 싸늘했고,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작위도 없는 일개 관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결국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회의를 끝마쳤다. 베셸리모가 가장 먼저 건물을 나갔고, 발베릿과 여타 귀족들이 그 뒤를 이었다. 전당 안에는 금세 레이시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샹들리에의 불빛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막 출입문을 지나 몸을 꺾으려 하는데, 익숙한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레이시 단장.”
“프르소 백작님이시군요. 계신 줄 몰랐습니다.”
프르소 백작은 평의회 간부 가운데 극소수를 차지하는 급진파로, 전쟁에 찬동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귀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남자였지만, 군데군데 돋아난 새치와 눈주름은 그가 마흔도 안 된 나이라는 걸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복도 한가운데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있다가 나까지 도매 급으로 욕먹으란 말인가? 사양하겠네.”
“현명한 선택이셨습니다. 저도 지금 좀 머리가 어질어질하군요.”
“하하하! 농담도 하는 걸 보니 아직 팔팔한가 보군. 한시름 놨네.”
그는 레이시에 비해 감정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속내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레이시가 짧게 목례한 후 지나가려 하자, 프르소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베셸리모 재상이 뭐라 하던가?”
레이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전쟁은...벌이지 않겠다더군요.”
“그래? 예상한 순서로군. 그럼 안개송곳니는 이제 잠정적 해체겠는 걸.”
“잘 아시는군요.”
“이거 자네도 힘든 시기를 겪겠구먼? 평의회가 생각을 바꾸기 전엔...돌아오기 어렵겠어.”
프르소는 넉살 좋게 말했고, 레이시도 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귀족들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간 탓인지 전당 복도에는 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경비병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시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는 근신 처분을 받은지라...먼저 가보겠습니다. 안개송곳니도 내일부터 전면 활동이 금지된 상태지요.”
그 말을 듣자 프르소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큰 소리로 웃던지, 멀리서 걸어오던 경비병의 발자국이 멈칫거릴 정도였다. 그는 떠나가는 레이시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그런가? 내일부터라...바쁜 하루가 되겠군.”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제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늦은 저녁이라, 평의회에 소집됐던 귀족들은 서둘러 마차를 몰아 거처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가 나오자 제폰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쯤 걸었을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제폰이었다.
“어떻게 됐지?”
레이시는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갑주의 연속뿐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의외였기에, 레이시는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그러니...오늘 밤의 행동도 계획대로 갑니다.”
“그렇군.”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둘은 다른 단원이 모여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두 남자의 발소리를 제외하곤 사위는 고요했다. 일국의 수도라는 것이 이토록 정적을 지키다니, 리크나이츠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들자 곳곳에 배치된 첨탑에서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배치된 병사들은 괴수들의 습격에 대비해 화살을 재고 있었다.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오늘은?
민간인들은 일찌감치 집에 틀어박혀 잠을 청했다. 공연히 싸돌아다니다가 익수의 표적이라도 되는 날엔, 영원히 행방불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아스라이 먼 곳에서 이름 모를 동물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알룬도가 보낸 건 그 의도야 어찌 됐든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다시 제폰이 말을 걸어오자 레이시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그가 이렇게 말이 많았다니,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제폰님답지 않게 돌려 말씀하시는군요.”
그러자 제폰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로시느가 정말로 폭주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지?”
레이시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 간단한 문제를 구태여 질문할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었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로시느가 저주받았다고 하면, 다른 신의 아이들은 멀쩡하다는 얘기가 된다.
“제가 언제 말하지 않았던가요? 제 목표는 대륙통일입니다. 알테야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국가로.”
“그 말은...”
“어떤 나라가 통합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브리토리스가 실패한다면, 다른 나라의 손을 빌려야겠지요. 이제 와 리크나이츠로 가긴 힘들겠고...아마 아스트리카나 텔아단이 되겠군요.”
“그런가. 정말 모를 남자군, 너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둘은 좁은 모퉁이를 돌아, 짙게 깔린 어둠 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어느 정도 습한 밤이었지만, 곳곳에 놓인 횃불 때문인지 레이시는 타고 남은 재의 냄새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탁 탁, 타들어가는 장작의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오늘 밤이 지날 때까지 몇 개의 땔감이 사라질까? 몇 명의 목숨이 사라질까?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둘은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안개송곳니 단원들이 자그마한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다 모였군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단원들은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을 뿐, 굳이 대답하거나 하진 않았다. 레이시는 자리에 모인 단원들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모두가 모인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 인원이 한 자리에 집결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모아놓고 느끼는 거지만, 단원들은 정말 공통점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각양각색이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인 고르딘, 기분 나쁜 광대가면을 항시 착용하고 다니는 제스터, 겉으로 보아선 일반 아낙네와 다름없는 슈터크.
다른 단원까지 합쳐서 채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지만, 이들의 능력은 대륙 최강이라고 자부할 만했다. 비록 마체르담의 사망과 알룬도의 배신, 위첼의 근신으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이 한정되긴 했어도 오늘 일정에 제약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시는 허리춤에 메인 수통을 들어 모닥불에 부었다. 불은 순식간에 꺼졌고, 공터는 어둠에 녹아들었다.
“그럼, 수고해주십시오.”
그것을 기점으로, 단원들은 각자 목표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 초 만에 공터는 레이시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꺼진 모닥불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씨를 발견하곤 말없이 밟아 눌렀다.
한 대의 마차와 이를 호위하는 기사대가 어둠이 내려앉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평의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태반이 수도에 기거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별장에서 밤을 보내고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차 안의 레이놀드 후작과 빅토르 백작은 예외였다. 그들은 영지에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음 같았으면 이번 평의회도 불참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베셸리모와 발베릿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힘든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정오쯤이면 후작님의 영지에 도착하겠군요. 이렇게 마차를 태워주시다니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빅토르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놀드는 그게 뭔 대수냐는 듯,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뭘 이런 거 가지고 머리까지 숙이나? 같은 고향 사람끼리 이 정도는 해야지. 자네도 영주라는 사람이 말이야, 가신도 없이 말을 타고 다니는 건 좀 자중하게. 백작이면 백작답게 행동해야 하는 법일세.”
“하하하, 명심하겠습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마차는 육두마차에 규모도 엄청나 서로 발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넓었고, 중앙에는 식사를 위한 탁자까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서른 명의 훤칠한 기사들은 후작의 호위대란 이름에 걸맞게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빅토르는 창문 너머로 앞서나가는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후작님, 후작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 뭐가 말인가?”
“안개송곳니 단장이 추진했던 전쟁계획 말입니다. 리크나이츠와 아스트리카를 교란하고, 그 틈을 타 카잘산맥 남부 평야를 손에 넣는다면 삼국통합은 정말 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텔아단이나 퀴넨은 워낙 국력이 약하니...”
“허어, 자네 그 자의 말에 찬동하는 건가?”
“그...그런 뜻이 아니라...”
후작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레이놀드는 그를 질책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네. 우리 왕국은 늘 경작지가 부족한 실정이니까.”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은 늘 브리토리스를 압박하던 사안 중 하나였다. 카잘산맥을 기점으로 북부 대륙은 워낙 지대가 높고 기후가 나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최근 200년간 인구가 거의 늘어나지 않는 실정이니, 모르긴 몰라도 리크나이츠와의 병력 차이도 배 이상 날 것이었다.
“자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뜬금없는 연령 질문에 빅토르는 깜짝 놀랐다.
“마흔 둘입니다만...”
“그런가...아직 젊군. 전쟁을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
“하지만 백작, 이걸 생각하게. 모름지기 병사란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법이지.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않으면 군대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려. 우리가 우려하는 게 그걸세. 신의 아이가 최강의 병기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지. 일단은 연고도 없는 레이시 같은 자가 로시느를 데리고 있다는 게 첫째고, 그 로시느도 마음만 먹으면 그를 배신할 수 있다는 게 둘째야.”
레이놀드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의 아이는 전대미문의 능력을 가진 만큼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염려하는 게 바로 그런 점이었고, 사실 그들은 전쟁을 벌여도 신의 아이보다는 전형적인 군대의 활용에 기대를 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브리토리스와 타국과의 전력 차이는 절망적이어서, 평의회가 전쟁을 꺼리는 점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레이놀드가 말했다.
“그리고 식량 문제는 좀 더 평화적인 방법에서 접근할 수 있네. 폭풍협곡의 결계가 사라지면 육로 무역이 다시금 재개되겠지. 우리에겐 은을 비롯한 광물자원이 풍부하지 않은가? 그걸 팔아서 리크나이츠, 아스트리카의 곡물을 수입할 생각이네.”
“무역이라...하지만 리크나이츠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후작님. 그렇다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마부가 말을 달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돌연 마차가 길 한가운데 정지했다. 갑작스런 정체에 놀란 레이놀드가 마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그게 웬 남자 하나가 길을 막고 있는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곧 출발할 테니.”
레이놀드는 혀를 차며 창을 닫았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할 때이건만 이런 소동이라니, 길을 막은 사내가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서른이나 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지라, 얼굴은커녕 그 남자의 실루엣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토하고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한편 마차 밖에서는 호위대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대열의 후방에 있던 호위대장은 레이놀드 후작을 불편하게 했단 생각에 서둘러 말을 몰아 전열로 나섰다. 도로 전방에는 보고받은 대로 웬 남자 하나가 길을 막아선 채였다. 호위대장을 비롯한 기사 다섯이 말을 탄 채 몇 보 앞으로 나섰다.
“웬 놈이냐. 우리는 암세스페르타 지역을 통치하는 레이놀드 후작님의 기사들이다. 용무가 없다면, 썩 길을 비켜라.”
호위대장은 턱을 치켜든 채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호위대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새하얀 갑옷을 걸친 채였으며, 손에 쥔 검에서는 어쩐 일인지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용무 있지.”
“뭐...뭐?!”
그가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에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 남자, 제폰에게 그런 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의 검에 새겨진 룬문자 홈엔 이미 핏물이 그득히 스며든 상태였으니까.
“레이놀드 후작, 아마 빅토르 백작도 같이 있겠군.”
말을 마치고 그는 검을 옆으로 든 채 달려나갔다. 호위대장을 비롯해 전면에 있던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거수자가 우리를 공격...!”
후웅. 검과 검이 부딪힐 때 으레 나는 충격음도, 살을 베는 절단음도 없었다. 그저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허공에 울렸을 뿐이었다. 제폰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길게 검을 휘둘렀고, 검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검의 궤도 내에 있던 기사 일곱은 제폰이 검을 물릴 시점이 돼서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어...헉...!”
“으아...?!”
운 좋게 뒤에 있었던 기사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단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일곱이나 되는 기사들이 그것도 마치 종이가 베인 것처럼 깨끗이 절단되고 말았다.
***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