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
행복을 파괴하는 저주라는 거,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걸까
-------------------------------------------------------
다들 시장했던 모양인지 식탁 위의 음식은 빠른 속도로 비워졌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일행은 자기 몫의 음식을 꾸역꾸역 우겨넣었다. 따로 보채지 않더라도 식사를 마치고 나면 행로가 결정될 거란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급하게 빵을 씹던 디리터가 목이 메었는지 옆에 놓인 수프를 냅다 들이켰다. 그는 수프 접시를 들고는 물 마시듯 벌컥벌컥 부어 넣었다. 루도가 요리한 버섯 수프는 물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묽게 만들어진 감이 있었다. 때문에 디리터처럼 음료수로 사용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짧은 식사가 끝나자 일행의 시선이 모두 데루루피아에게 쏠렸다. 그녀는 일행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한 니암이 수도회에게 들키는 일은 없을 거야. 루시올라 경께 이미 말씀드려 양해도 구해놨으니 괜찮아. 여하튼, 의뢰는 이걸로 끝이야. 다들 고마웠어.”
식탁은 잠잠했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마리네는 디리터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디리터였다.
“누님 혼자 광휘의 결사를 막으려는 속셈이지?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어제 니암을 습격했던 괴상한 마법사가 아직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데루루피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디리터의 의중을 눈치 챈 것이었다.
“이건 이제 너희와는 상관없는 문제야. 우리는 어차피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잖아? 쓸데없는 일에 목숨 걸지 마.”
제리온이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계약하면 되겠네. 이번엔 얼마나 주실 거요?”
“너희들...”
이번에는 루도와 마리네가 나섰다.
“목숨 안 걸어요. 절대 살아남을 거니까.”
“안 죽어. 니암이랑 같이 천렵하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데루루피아의 눈동자가 다시금 크게 흔들렸다. 자신을 따라왔다간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광휘의 결사는 니암을 놓친 탓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을 막으러 간다는 건 전쟁터로 향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자신을 따라오려 하는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내밀었다. 목구멍이 막혀왔다.
“너무 물렀어, 너무 멍청해.....너무 착해.”
“당신 역시.”
이칼롯이 검날을 손질하며 말했다. 서슬이 퍼렇게 선 연 노란색 날이 그 주인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듯하다. 데루루피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희는...가지 마. 가면 죽어. 가지 마.”
“의뢰는 끝났지. 이제 우리가 당신의 명령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어.”
이칼롯은 늘 이런 식이다. 합리주의라는 잣대를 빌려 말하지만, 언제나 그의 행동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남을 설득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자코 일행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리드가 눈을 감았다.
“심지가 굳은 청년들이군. 정말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든 부류야.”
데루루피아는 어쩔 줄 몰라 빈 수저만 달그락거렸다. 이들을 말려야 하는데, 말릴 수가 없다. 자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들은 갈 생각이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그런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제리온이 말했다.
“다른 생각해 봐야 소용없으니 얼른 필승의 전략이나 내놔봐요. 둘이 맞붙는 걸 근사하게 막을 수 있는 거로다가.”
“글쎄....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살이라도 하면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을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인데.”
“그럼 다른 걸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고, 뒤끝 없는 거.”
“아하하! 그게 뭐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던 작은 소년에게. 니암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수줍음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는 한 숟가락도 먹지 않은 수프를 떴다가, 다시 부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소년. 그의 초연한 얼굴을 마주하니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루도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니암이 먼저 운을 뗐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치는 일 없게, 뒤끝도 없게, 수호기사단과 광휘의 결사가 싸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니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구도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
평소답지 않은 결의에 찬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탓일까, 데루루피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올려놓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쩌면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니암?”
그녀의 감촉이 느껴졌다. 새하얗고 가녀린 손. 지금까지 그 연약한 손으로 자신을 지켜주었다. 그녀의 포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니암은 데루루피아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데루루피아님은 제게 어머니 같은 존재세요. 아무 상관도 없는 저를 목숨 걸고 지켜주시고, 챙겨주시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니?”
“다른 분들에게도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다들 보잘것없는 저를 위해 목숨을 거셨죠. 부디 그 용기의 절반만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루도는 그제야 니암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니암은 살포시 웃으며 목례했다. 니암은 의자를 밀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키가 왠지 훌쩍 자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감더니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사과의 대신. 독단으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그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수고를 배신한 것에 대한 깊은 사과.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지키려 하듯 자신도 그들을 지킬 권리가 있다. 그의 질끈 감았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아까 아침에 여러분이 파시던 마법버섯을 몰래 먹어보았어요. 엉터리였어요. 웃음은 나오지도 않고, 대신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루도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까, 아침! 쥐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기에 그냥 몹시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것이 버섯의 약효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어째서?
의혹을 느낀 제리온이 니암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팔은 올라가지 않았다.
“어? 왜 이래? 이거.”
제리온이 고장 난 기계 바라보듯 자신의 왼쪽 팔을 응시했다. 왼팔은 축 늘어진 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그 역시 움직여지지 않았다. 니암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까 먹은 수프에 그 버섯을 탔어요. 지금쯤이면 약효가 나타날 것 같은데...”
“야, 너!”
루도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릎이 푹 꺾였다.
“?!”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맥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오른다리를. 왜 저게 저기에 있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그랬다. 심지어 입술조차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크...”
이칼롯도, 디리터도, 마리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은 또렷했으나,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리네는 축 늘어진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임이 분명함에도, 그것은 미동조차 않은 채 굳어있었다. 마치 썩은 나뭇가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목조차 굳는 바람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니....암?”
데루루피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니암의 바짓자락을 붙잡았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이내 그녀의 손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서글픈 눈동자로 니암을 바라보았다. 니암은 그녀의 눈물 맺힌 눈동자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다들 절 안 보내주셨을 거잖아요? 벌은 돌아와서 달게 받을게요.”
니암은 낑낑거리며 늘어진 데루루피아의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는 일일이 돌아가며 쓰러진 일행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한 시간 정도면 풀리더라고요. 다들 이대로 푹 쉬고 계세요.”
이칼롯이 눈을 부라렸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아니라 천하제일의 검객이 온다 하더라도 니암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런 대담한 발상을 하다니, 그가 정말 그 숫기 없던 소년이 맞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니암은 일행의 눈빛을 읽고는 처연하게 웃었다. 특히 루도와 눈이 마주쳤을 땐 뭔가 뿌연 것이 눈동자에 어렸다. 그는 애써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저 때문이잖아요.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제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반드시 막을 거예요.”
끼이익. 삐걱거리는 문소리에 잠시 발걸음이 멈추었다. 수십 개의 갈고리가 자신을 죄여오는 느낌이었다.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아무런 외침도 없었다. 그러나 일행은 소리쳤고, 니암은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답은 이미 얻었다. 사지로 향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막을 수 있다, 그렇게 믿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당당하게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해낼 수 있어. 그렇게 믿어볼게, 니암. 누구도 불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거리는 부산했다. 경비병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수호기사단이 온다면, 아마 교단 본부가 있는 남쪽 방향에서일 것이다. 니암은 조용히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