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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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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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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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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DUMMY

“후우...”


그래도 일주일을 머물러서일까, 몸만 휙-하니 떠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잡다한 식료품이나 조리 기구를 점검하고, 그동안 방치했던 전투장구들을 손질하고 나니 어느새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일찌감치 준비를 끝낸 마리네는 침대에 걸터앉아 카토르의 일지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베른헬트 주교의 배려 덕에 숙소의 램프는 기름 아까운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루도는 바람도 쐴 겸 발코니로 나갔다. 도시 정경은 전에도 실컷 보았지만, 깊은 밤에 보는 그것은 또 다른 맛이 났다. 발코니로 나가자 상쾌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류이덴사는 레인스터만큼 번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늦게까지 기도를 드리는 신도가 많아 자정인데도 드문드문 불빛이 보였다. 수십 미터 간격으로 아스라이 빛을 내는 그것들은 델키아에서 자주 보던 반딧불을 생각나게 했다. 향수병은 아니지만 아직 루도에게 델키아라는 도시는 다른 공간을 가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잣대였다.


“읏~차~. 여기도 오늘로 끝이구나. 별 탈 없었으면 좋겠는데.”


디리터가 루도의 등을 툭 쳤다. 그는 예의 동물도감을 옆구리에 낀 채 발코니 난간에 팔을 척, 걸쳤다. 루도는 그의 도감을 흘끗 바라보았다. 언젠가 도감을 빌려본 적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동물들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디리터는 그것이 아버지와 함께 카잘 산맥을 돌아다니며 만든 것이며,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대단히 애지중지했다. 루도는 디리터의 아버지, 케셔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너무 본 지가 오래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잘 될 거야. 우리도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 디리터 정도 실력이면 기사단에 들어가도 될 텐데?”


“얌마, 기사는 뭐 아무나 하냐? 재력이 받쳐줘야 말도 사고, 갑옷도 사고, 하는 거지. 실력은 그 다음 얘기야. 기사라고 별 수 있냐? 배고프면 굶는 거지.”


“킥킥, 하긴 그래. 우리도 말이랑 갑옷은 델키아 수비대에 빌려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루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바람이 몸속을 훑고 지나갔다. 루도는 들이마신 만큼 길게 날숨을 뱉었다. 그것은 기다란 한숨이기도 했다. 루도는 난간을 등지고 기댔다. 방 안에서는 마리네가 침대 위를 구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고 있을까? 에리 누나는 자는 것 같고.”


그는 턱 끝으로 에레이시아의 방을 가리켰다. 발코니 너머로 보니 그녀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에레이시아는 바로 옆방에 묵고 있었다. 숙소는 둘 혹은 셋이 묵을 정도의 크기였지만, 여자를 남자들과 같은 방에 둘 순 없었기에 특별히 독방을 쓰게 됐다.

디리터가 커튼이 쳐진 창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 자긴 뭘 자. 그 여우같은 계집애가.”


“아니, 불이 완전 꺼져 있는데.”


“그럼 깨워야지.”


디리터는 방에서 잡동사니를 몇 개 가져와 에레이시아의 방에 대고 툭툭 던졌다. 물건이 창문에 부딪힐 때마다 탕, 탕 하는 소리가 났다. 루도가 말리려 했지만 디리터는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서너 번을 던지자,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에레이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코니로 나온 그녀는 잠옷 차림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뭐야? 왜 오밤중에 창문을 두드리고 난리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옷매무새가 깔끔하고 목소리도 또렷한 것이 그녀 역시 잠자리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디리터는 낄낄 웃으며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딛고 뛰면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발코니 사이의 간격은 좁았다.


“안 자던 거 다 아는데 웬 내숭이냐? 할 거 없으면 여기서 바람이나 쐬어.”


“안 자던 게 아니라 네가 깨운 거야!”


그녀는 빽 소리를 지르다가 너무 목소리가 컸는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데도 디리터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루도가 그녀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자고 있었나 봐요?”


에레이시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야, 나도 막 잠자리에 들었던 참이니까. 그런데 왜?”


발코니로 일순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잠옷차림이던 에레이시아는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어깨를 움츠렸다. 봄이라곤 해도 새벽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루도는 방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머, 고마워. 역시 루도는 매너가 있다니까.”


그녀는 생긋 웃으며 몸에 담요를 둘렀다.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는 것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모습은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평소에는 당차고 야무진 이미지라면, 지금은 어딘가 야릇하고 고혹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이것도 밤바람에 취한 탓일까.


“그냥요. 에리 누나랑 함께 지내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집 문제 잘 해결 되서 다행이에요.”


“응? 아아, 다행이지. 다 너희들이 신경써준 덕이지 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중간까진 같이 갈 건데 뭘 벌써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니?”


그녀는 찡긋 윙크를 하여 자신의 고마움을 표시했다. 첫인상에 미운 털이 박혀서 그랬을 뿐, 에레이시아는 감정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밝게 웃자 둘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디리터가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았다. 이제 그와 에레이시아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어음을 써준다고 했나? 그거 돈은 어디서 찾는 거냐?”


“수도에 있는 지스카르 공작을 찾아가랬나...그랬을 거야. 뭐, 내 동생도 그곳에 살고 있으니까 얼굴도 볼 겸해서 가면 되지. 너희들 덕에 생전 안 하던 여행을 다 해보네.”


“그래...수도로 가는 거군.”


디리터는 살짝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그동안 에레이시아와 같은 말을 타며, 가장 많은 대화를 주고받은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티격태격 싸우긴 했어도 보름 가까이 지내며 미운 정이 박힌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소 어눌해지자, 에레이시아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얘까지 왜 이래? 내가 뭐 영영 떠나니? 나중 가서 다시 만나면 되는 거지. 너희들 델키아 산다며? 그럼 내가 사는 곳이랑 그리 멀지도 않잖아.”


루도와 디리터는 말이 없었다. 델키아로 돌아가는 건 언제일까? 루도는 복수를 끝마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단순히 ‘람카디스를 살해한 자를 죽인다.’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지금, 복수란 안개송곳니의 괴멸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신의 아이의 각성을 막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당분간 델키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루도가 말했다.


“누나, 아렌베일을 도와준 것, 후회하고 있나요?”


“응?”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녀는 한참동안 루도를 응시했다. 아렌베일, 그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쪽만 남은 팔로 씩씩거리며 나이프를 던지던 모습이었다.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리네를 구해주고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에레이시아 역시 그의 모습을 회상하는 듯했다.


“...무사히 고향에 도착했을 런지 모르겠네. 침대에 누워서도 상처가 곪아 골골대던 사람이 무턱대고 마을을 떠났으니...그때 처방전이나 몇 개 알려주는 건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루도는 쓰게 웃었다.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그녀는 그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뜻 모를 사건에 휘말렸다는 점에서 그녀의 처지는 이녜스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살아남았고, 이녜스는 죽었다는 것이다.

웅얼거리던 에레이시아는 루도와 디리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혀를 살짝 내밀었다.


“아, 미안 미안. 나한테 질문했었나? 아하하, 글쎄...아렌베일 그 사람은...뭐랄까, 좋은 추억은 별로 없었네. 밤새워 간호해준 대가로 내 집이 홀랑 불타버렸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별 수 있니? 난 약사인걸.”


그녀는 도시에 점점이 켜진 불빛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저 멀리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고향을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렌베일을 생각하는 것인지 루도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살았어. 내가 살렸지.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내 집이 불타고 어쩌고는 그 후의 문제야. 만약 그 사람이 다시 곤죽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난 주저 없이 그를 살릴 거야. 사람을 살린 일에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


그녀는 당당하게,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예뻤던가? 루도는 순간 그녀가 루치페리아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살린다라...이녜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루도는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반달이지만, 보름달을 향해 채워져 가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구름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말없이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없이 고즈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도시를 이루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너희들, 참 대단한 것 같아.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밝게 웃는 것 말이야. 나라면 너무 무서워서 체념하든가 아님 자살해버렸을 텐데.”


루도와 디리터는 동시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에레이시아는 여전히 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무식하게 자라서, 사실 신의 아이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라니, 어느 정도인지 실감도 안 나.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너희들이라는 것도.”


그녀는 루도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물론 손은 닿지 않았다. 그녀는 루도의 콧잔등을 어루만지려는 듯,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귀여운 남자애가 말이야. 그리고 막 자란 동네 양아치랑. 둘 다 평범한 시골 청년처럼 생겼는데, 사람 겉모습만 가지고는 모르겠다니까.”


귀엽다는 말과 양아치라는 말에 둘은 얼굴을 찡그렸다. 디리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해. 난 안 죽거든. 불사신이걸랑.”


“엥?”


“풋!”


루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디리터는 델키아를 떠날 때 제리온이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날의 맹세를 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죽지 않기로 맹세했었지. 난 약속이라면 철저히 지키니까, 절대 안 죽어.”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하는 그의 말에 에레이시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고 있네, 허세하고는.”


“정말이야. 보여줘?”


디리터는 발코니 난간을 짚더니 그대로 훌쩍 뛰어넘었다. 방은 3층이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에레이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사람...! 아, 정말 놀라게 할래!!”


디리터는 뛰어내리는 척 했을 뿐, 팔 힘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틀어 발코니로 내려앉았다. 성난 에레이시아가 목침을 던져 디리터가 정말 떨어질 뻔 한 헤프닝이 있은 후, 셋은 다시 나란히 서서 달빛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디리터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도 참 여간 아니다. 우리랑 같이 여행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돈이 무섭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억척스러운 거 하나만은 칭찬해줄게.”


“그거, 칭찬 맞아?”


“칭찬 맞아.”


에레이시아는 쿡,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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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4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7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2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5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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