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간만에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비록 주제가 그다지 밝지 않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다섯은 오랜만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막 카토르의 일지를 다 읽은 디리터가 책을 덮었다. 먼저 읽은 넷은 이미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칼롯이 말한 대로, 카토르의 일지에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이 적혀 있었다. 물론 불타버린 부분도 많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일행은 없었던 페이지는 유추해가며 일지를 정리했다.
이칼롯이 말했다.
“결국, 로샤단은 우리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어떤 일’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 일에는 상트룸 수도회와 류이너스 교단도 연관되어 있었고. 로샤단은 교단과 협력하여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는 건데...”
“이거다! 하고 단정하는 건 아니지만, 일지 중에 여러 번 언급되는 단어가 있던데.”
어느새 다가온 디리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펠아람과 루프리모. 이게 뭔지 아는 사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루도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루도는 무릎을 모은 채,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가에는 형형한 살기가 드리워져 있어, 친한 디리터조차 섣불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모두 말이 없자 제리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광의 펠아람, 생명의 루프리모. 절대신 아루를 섬기는 하위 신들이지. 일지에는 둘 이외에 다른 신도 언급하고 있어. 조화의 아반케즈, 풍요의 베릴.”
“요는, 카토르 아저씨가 찾던 게 신이라는 거야? 신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찾는다고 눈에 보이는 건가?”
“물론 나도 이 이야기를 쉽사리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카토르는 단순한 종교적 호기심 때문에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야.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몇 년 동안이나 기록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일행은 숨죽인 채 제리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언덕을 타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제리온은 그 바람을 쉼표 삼아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신이 현세에 강림한다는 게, 꼭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진 않거든.”
그렇게 말하는 제리온의 목소리엔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이칼롯이 그를 응시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뭔가 아는 게 있군그래.”
“맞아. 일반 사람들은 평생 모를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혹시 성언(聖言)이라고 들어봤어?”
“금시초문이다.”
“그래, 아마 그럴 거야. 보통은 왕국의 건국사(建國史) 정도만 구전으로 전해들을 뿐이니까. 웬만한 역사학자들도 성언을 신화(神話)로 분류하니까 말야. 하지만 난 마법사지. 마법의 기원은 드래곤(dragon)이라고 알려져 있어. 카토르의 일지에도 나오잖아? 「몇 년째 나타니엘의 마법을 연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진척이 없다. 이대로라면 차라리 드래곤을 찾아가 물어보는 게 빠를지도.」”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혼자 들떠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어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인 법이다. 결국 디리터가 멀뚱거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미안한데, 드래곤이 뭐냐? 나타니엘은 또 누구고.”
제리온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 표정은 멸시와 동정이 뒤범벅되어, 디리터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 썅! 무식해서 미안하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마법사인 건 아니잖아!”
다른 이들이 디리터보다 먼저 질문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제리온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드래곤은 드래곤이지. 어차피 설명해봐야 니들은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나 역시 본 적도 없고. 그냥 초월적 존재라는 것만 알아둬. 준신(準神)이라고 봐도 되고, 괴물이라고 봐도 돼. 성언이 내리기 직전, 인간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종족이지.”
디리터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드래곤의 형상을 끄적여 보았다. 물론 그것의 생김새에 대해 전혀 설명들은 바가 없었으므로, 그가 그린 드래곤은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다. 오히려 구경하고 있던 마리네가 찬사를 보냈다.
“...디리터 그림 잘 그리네. 언제 한 번 화폭에 제대로 그려보는 게 어때?”
“사람이 얘기하면 집중해라 자식들아!!”
제리온의 일갈에 주위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타니엘은 500년 전에 활약하던 마법사야. 나타니엘과 타이달루크, 마법의 정점을 찍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인물들이지. 비록 정신계와 사령(詐靈)계 학파가 몰락한 후로는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말이야. 다들 읽어서 알겠지만, 카토르는 그 두 명의 마법사를 연구하고 있었어. 어째서 이 작자가 금지된 마법학파를 연구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완벽히 그의 설명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대단한 마법사들인가 보다,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디리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 양반들 대단하다고 치고, 드래곤 얘기나 계속 해봐.”
“드래곤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언(聖言)신화에 도달하게 돼. 왜냐하면, 그 시절을 기점으로 드래곤이 모두 사라져 버렸거든. 그리고 이 성언 신화라는 게 뭐냐면 말이지, 대략 천 년도 전의 이야기인데, 그 시대엔 각종 악마들이 이 땅에 군림하고 있었다고 해.”
“악마? 그게 웬 뜬금없는 소리야?”
“잠자코 들어.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절대신 아루가 인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심복들을 현세에 강림시켰다고 하지. 그게 카토르의 일지에 적힌 펠아람이니, 루프리모니 하는 것들이야.”
다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느낌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제리온의 설명은 평범한 종교 설화처럼 들렸다. 늑대나 쫓으며 일상을 보내는 레인저들에게, 갑자기 신이니 악마니 하는 얘길 하고 있으니 현실감이 있을 리 없었다.
이칼롯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신화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신화에 나오는 드래곤이 실제로 존재하니까. 게다가 천사와 악마가 실존했다는 증거도 이미 여러 분야에서 발견된 바 있지. 거기다, 꼭 신화가 허구일거란 증거도 없다고.”
“...네 호기심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런 논리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 지금 필요한 건 눈에 보이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야.”
“물론 나도 일지를 읽기 전까진 형씨와 같은 생각이었어. 카토르의 일지에 상트룸 수도회와 류이너스 교단이 언급되지 않았더라면 말야. 언젠가 두 교단이 충돌했던 적이 있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그 순간 루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이안!”
“그래, 원래 이름은 니암이지. 그 녀석이 폭주하는 걸 다들 봤잖아? 내 맹세하는데, 그건 결단코 마법 같은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때 루루 누님은 끝끝내 숨겼지만 말이야, 왜 수도회와 교단이 카이안을 쫓았던 거지?”
어긋나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 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일동은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니암을 쫓던 광휘의 결사와 수호기사단, 그리고 그의 정체를 숨기던 데루루피아, 빛기둥에 휩싸이던 니암과 난데없는 람카디스의 등장. 의혹은 있었으나 굳이 들추려 하진 않았다. 그걸로 된 거라고, 좋게 끝났으니 된 거라고 생각하며 기억에서 지웠었다.
이 모든 진실들이 5년이 흐른 지금에야 이윽고 폭풍이 되어 다가왔다. 제리온은 대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니암이 왜 중요했지? 왜 루루 누님은 그 사실을 숨겼지? 왜 람이 왕의 사절로서 나타났던 거지? 이 모든 걸 명쾌하게 해결할 만한 가설을 내주지. 니암이 카토르가 말하는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로샤단은 일찌감치 그를 둘러싼 분쟁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안개송곳니’라는 단체가 이를 눈치 채고 로샤단을 습격한 거야.”
다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제리온의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반론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그것 외에는 그때의 전황을 설명할 만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능선에 자신들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마리네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행여 누가 듣고 있진 않을까, 혹은 로샤단을 습격한 자들이 다시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루도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멍하니 뜬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그가 움직임이 없자 곁에 있던 디리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이, 루도, 괜찮냐? 역시 뭘 좀 먹는 게...”
“니암이...신의 아이...?”
“야! 정신 차려!”
“람이...쫓는 게 신이었다면...그렇다면...”
루도는 사지가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멈춰 있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깨어난 기억의 파편들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람과 만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지?
-루도, 네가 있었던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해줄 수 있겠니?
이녜스와 안젤리카가 납치된 이유는 무엇이었지?
-내가 잡혀온 이유. 나더러 베릴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흔들리던 마차 안에서, 나젠크루거가 뭐라고 했었지?
-가린워드 마을에 작용한 것은 어떤 ‘힘’이지. 펠아람의 아이는...
람카디스는 오갈 곳 없던 루도를 거두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루도가 납치당했을 땐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그가 왜 그리 헌신적인지에 대해 합리적 관점에서 생각한 적이 있던가?
수년 전 니암이 했던 한탄이 머릿속을 울렸다.
-아무래도 저주를 받았나 봐요. 자신으로도 모자라, 타인의 행복까지 파괴해버리는 저주를.
람카디스는 말했었다.
-굳이 ‘진실’이라는 모습으로 포장된 불행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진실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의 루도는 사소한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람카디스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이 그의 이성을 뒤흔들고 있었다. 슬픔은 차차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이제 광기라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이제 그는 ‘신의 아이’라는 단서를 일련의 사건에 무작정 대입하기 시작했다.
람카디스는 왜 자신을 거두었는가, 나젠크루거가 자신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 들렸던 또 다른 니암의 목소리는 누구?
“아....!!”
그는 기어코 니암의 폭주를 생각해냈다. 그때 니암이 만들어낸 빛의 구체는 숲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는데도, 그는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공백.
루도 역시 그런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린워드 마을에 들어서고, 어두운 골목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깨어나기까지,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십여 일 동안, 가린워드 마을은 전멸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만 남겨둔 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갔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물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루도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야 임마!!!”
퍽! 둔탁한 소리가 무덤가에 울려 퍼졌다. 그가 넋 놓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디리터가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루도는 안면부를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그 아릿한 통증에 정신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뺨을 부여잡은 채 비척이며 일어났다. 입술이 터졌는지 침을 뱉자 혈액이 걸쭉하게 섞여 나왔다.
“어...윽,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 사람이 부르는데 꿈쩍도 않고.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려라. 람 아저씨 따라 저세상 갈 생각이냐?!”
루도는 어안이 벙벙하여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먹을 맞아 아프다기보다는, 조금 전 상황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련의 사건과 람카디스의 행적에 대해 추론하던 중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다.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경황이 없어 눈만 깜박이는데, 디리터의 착잡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루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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