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어느 한쪽이 시선을 돌렸겠지만, 어쩐 일인지 디리터도, 에레이시아도 서로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에레이시아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디리터.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달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나랑 만난 것도 그렇게 불행한 일이었냐?”
“....”
에레이시아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디리터가 말을 맺을 때 낙담한 듯 어깨를 떨어뜨리는 걸 본 것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는 그녀나, 낙담해 어깨를 움츠린 그의 모습은 서로에게 생소했다. 그건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지라, 에레이시아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녀는 문득 디리터의 뺨을 쓰다듬고 싶은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디리터는 그녀의 여린 손이 허공에 머무는 걸 지켜봤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천천히 그녀 옆에 앉았다.
“난 얼마나 다행인 줄 아냐?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너와 내가 아직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레인저의 미덕은 살아남는 것. 디리터 역시 숱한 역경을 거쳐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 살아남았다는 게 기쁜 적이 없었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으니까. 이렇게 그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그에게 현상금 수배서 같은 건 지금의 행복에 비하면 사소한 트러블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갈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디리터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운명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에레이시아, 나와 함께 가자.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너만큼은 내가 지켜줄게. 안개송곳니든 현상금 사냥꾼이든 내가 다 없애버릴 거야. 그러니까...모든 게 다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오면...”
“...리터...”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너무 울어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터진 봇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슬프지가 않다. 울지 말라고, 울지 않아도 된다고 눈물을 훔쳐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머저리 같아.”
“으, 응?”
에레이시아는 자신의 얼굴을 훔치는 디리터의 손을 꼭 쥐었다. 요령 없는 디리터는 그게 손 치우라는 소린 줄 알고 얼른 빼려 했지만, 그녀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을 보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저기, 야...지금 뭔...”
“네가 뭘 어쩐다는 거야...그 덩치 큰 남자도 이기지 못했으면서...”
“그...그거야...”
당황한 그의 몸짓이 느껴진다.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디리터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고르딘이 추격해올 때도 등에 업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나진 않았었다. 정말 멍청한 사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므린 무릎을 풀고, 천천히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디리터는 그녀가 눈물을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한 차례 쓸어내린 후 자신의 옆에 사뿐히 앉는 걸 넋 놓고 지켜봤다. 정말 시골 처녀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였다.
“저기...조금 전에 그거.”
에레이시아는 디리터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청혼한 거야?”
디리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다리는 안절부절못하고, 손가락은 부산하게 리듬을 맞추고 있고, 살짝 기댄 것만으로도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디리터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정에 휩쓸려 고백한 것까진 좋았는데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것이었다.
“에...또, 그게 그렇게 되냐? 그게 뭐냐면 말이지...네가 슬퍼하는 건 우리 때문이니까...그러니까 내가 대표로 너를...”
그 자리에 데루루피아가 있었다면 한심하다며 꿀밤을 먹였을 것이다. 에레이시아는 그의 맥빠지는 발언에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잘 나가다 이게 웬 헛소리란 말인가.
“넌 정말 별 볼일 없는 남자야.”
“으...”
디리터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저런 표독스러운 발언이라니, 이게 그 가크스가 말하던 차이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의 순정이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부드러운 촉감이 팔에 전해졌다. 에레이시아가 가만히 그의 팔을 그러안은 것이다. 디리터는 놀라서 눈만 깜박거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별 볼일 없는 여자니까, 쌤쌤이로 쳐줄게.”
“응...어?”
디리터는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천천히 곱씹을수록 그의 얼굴이 환하게 변해갔다. 좌절이 희열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디리터의 심장은 경련이 일어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고르딘과 맞붙었을 때에도, 마체르담의 화살을 피할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방 안에 한 줄기 광명이 내린 것 같았다. 그는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에레이시아는, 디리터의 팔에 안긴 채 그 기분 좋은 떨림을 오래도록 즐겼다.
***
가린워드 마을도 이제 작별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일행은 여관을 나섰다. 어차피 떠날 준비는 전날 다 끝내놨기 때문에 행동으로만 옮기면 되는 것이었다. 에레이시아는 하룻밤 새에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나절 내내 울던 게 누구 얘기냐는 듯 활기차게 움직였다. 제리온은 그런 그녀를 보고 사람이 저리 쉽게 바뀌는 거냐며 혀를 내둘렀다. 물론 전날 밤 그녀와 디리터 사이에 있었던 일은 둘만의 비밀이었지만, 알 사람은 이미 다 아는 눈치였다.
아나이스는 일찍부터 일어나 일행이 떠나는 걸 배웅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도 정이 들었는지 그녀는 떠나는 일행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일행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건넸는데, 특히 마리네에게 손을 건넬 때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리네...가는구나.”
“응. 신세 많이 졌어. 누명이 풀리면 그때 다시 찾아올게.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
“그...그렇지? 꼭 한번 들러줘야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꼭 다시 올게.”
그녀는 다시 마을에 들러달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이 정도만 돼도 견적이 딱 나왔지만, 일행 중 누구도 마리네에게 아나이스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고 귀띔해주진 않았다. 이미 일행에게 휘말려 한번 호된 꼴을 당한 이유도 있었으나 적어도 범죄자 누명이 풀릴 때까진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데루루피아는 상회에 들러 작은 마차를 하나 구해왔다. 마차에 타고 가는 것이 인원을 숨기기에도 좋고 인상착의를 보이지 않아도 돼 안성맞춤이기 때문인데, 사실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 항구까지 탈 없이 가려면 신분을 감추는 게 최선이지.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을 알려줄게.”
그러면서 그녀는 마리네를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말안장에 커다란 가방을 매달고 다녔는데, 루도는 그게 전부 옷가지였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일행이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는 동안 마차 안은 바삐 돌아갔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데루루피아가 흐뭇한 얼굴로 마차 문을 열었다.
“자, 첫 번째 완성입니다.”
그녀는 한 손에는 페이스 파우더(face powder)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마리네의 손을 붙잡고 나왔다. 첫 번째 희생양(?)인 마리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행의 반응은 참 볼만한 것이었다.
“으아아악!”
베리어스는 놀라다 못해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풀숲을 구르다 나무에 정강이를 찧었지만,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마리네를 응시했다.
“아, 씨발!”
제리온은 언제나 그렇듯 욕지거리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네의 모습이 놀라워서라기보다는, 데루루피아의 계획을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에레이시아는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푸하하하하!!”
디리터와 루도는 폭소를 터뜨렸다. 둘은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지게 웃다가, 등자를 헛디뎌 떨어질 뻔하다가, 급기야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딸꾹! 오오, 그것은 레인저. 긍지 높은 델키아 레인저! 우히히히, 딸꾹!”
“....”
마리네는 심기가 불편한 듯 돌멩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여성용 단화는 익숙하지 않은 터라 그는 자세를 못 잡고 한참을 뒤뚱거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도 움직이는데 영 거슬렸다.
제리온이 그걸 보고 입술을 비죽였다.
“누님, 이게 이칼롯이랑 짠 계획이요?”
“응. 시간만 있으면 진짜 신분증까지 만들어보겠지만...뭐 이걸로도 충분할 거야. 지방도시야 신분 확인을 대충 하는 데다 여차하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잔인하시네, 정말.”
그의 말마따나, 마리네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델키아에 있을 때 곱상하게 생겼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고 급사로 일할 땐 여성 취향의 제복도 입었었지만, 실제로 여장을 하긴 처음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생머리에 분을 너무 발라 하얗게 질린 얼굴, 포플린 블라우스와 치마, 귀여운 여성용 단화까지. 마리네는 10대 소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아나이스가 이 모습을 봤다면 그녀의 순정이 산산이 부서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발까지...언제 저런 걸 준비한 거야?”
“가발이라면 꽤 있어. 알다시피 난 머리카락색이 독특하잖아? 광휘의 결사나 안개송곳니의 눈을 피하려면 변장은 필수거든.”
디리터는 그녀의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입이 떡 벌어지는 코디는 둘째 치고라도, 옷이며 단화가 전부 전문 재봉사가 만든 고급품이었다. 그녀의 가방에 든 게 모두 저런 종류의 것이라면 그것만 갖다 팔아도 상당한 목돈이 될 것 같았다.
“히야...진짜 이쁘다...”
“...에리 누나...누나까지 이러기에요?”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아닌 게 아니라 여장한 마리네는 그 정체를 모른다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다 그는 아직도 앳된 목소리를 하고 있으니, 먼저 밝히지 않는 한 그가 여자라는 걸 의심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 같았다.
데루루피아는 일행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한껏 턱을 치켜세웠다.
“에헴, 얘는 누구냐면 말이지. 웨버 집안의 장녀 마를로네라고 해. 너희들도 잘 기억해둬. 앞으로 쓸 가명이니까.”
루도가 손을 들었다. 그도 뒤늦게 데루루피아의 계획을 눈치 챈 것이었다.
“루루 아줌마. 혹시 우리도 변장해야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데루루피아는 그게 무슨 뚱딴지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지. 수배서에 나온 사람은 전부 변장시킬 건데?”
“엑...?”
루도와 디리터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리네의 치욕을 보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낄낄대고 있었는데, 그게 남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데루루피아는 다시 옷가지를 뒤적이며 말했다.
“이칼롯과 함께 계획한 게 있어. 너희들은 이제 텔아단에서 온 남작 가문의 딸과, 그녀를 보좌하는 수행원으로 신분을 위조할 거야. 원래 귀족이라고 하면 무사통과가 많은 데다, 신분이 들통나도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보통 관리들은 타국과의 마찰을 꺼리거든.”
“수행원이라고 하면 호위 무사라던가 집사 같은 걸 말하는 거죠?”
“보통은 그렇지.”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적어도 자신들은 여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까. 마리네는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 침을 찍찍 뱉어대는 중이었다. 루도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남작의 딸인가 뭔가는 쟤겠네요? 그럼 나는 뭐에요?”
데루루피아는 팔짱을 낀 채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루도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깜박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루도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안 좋은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다. 그녀는 가방 안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고급 시폰 소재에 목과 소매엔 프릴이 장식되어 있고, 가슴에서 허리까지 레이스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 정말 귀족 아니면 못 입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구겨 넣어 잔주름이 생긴 것인데도 그 정도니 제대로 손질만 하면 당장 무도회에 입고 나가도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팡팡 털더니 루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남작 영애는 넌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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