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조회수 :
359,113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4.11 04:09
조회
836
추천
28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7)

DUMMY

“으악!”


마리네에게 달려오던 사내는 허벅지를 베이고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이걸로 상황은 종료였다. 한 명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는 벽에 달라붙은 채 벌벌 떨기만 했고, 나머지는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리네는 품에서 헝겊을 꺼내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치마폭 안에 메어놓은 검집 안에 검을 집어넣었다. 검은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알룬도가 무기를 숨기던 방식을 응용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서 있는, 그러니까 겁에 질린 남자를 향해 접근했다. 그가 다가가자 사내는 무기를 거뒀는데도 비명을 질렀다.


“히...살려줘!”


“잘못했죠?”


“자..잘못했습니다. 잘못...”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무릎 꿇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마리네는 씨익 웃고는, 쪼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혹시 손수건 있어요?”


“네! 드리겠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에겐 마리네의 부탁이 마치 손수건이 없으면 죽여버린다는 식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노란 천을 꺼내 마리네에게 건넸다.


“앗...예뻐라. 되게 비싸 보이네요.”


그의 말마따나 사내가 내민 손수건은 깡패 것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질 좋은 비단 소재에 중앙에는 장미 무늬 자수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고, 가장자리엔 금사가 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기사가 사용해도 될 법했다. 사내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저희 누나가 지...지어준 겁니다. 관청에 메...메이드로 있어서...”


“아, 그래요? 어쩐지 섬세하더라. 뭐 그래도 비단이니까, 나중에 잘 빨면 금방 원래대로 될 거예요.”


마리네는 손수건으로 다른 깡패의 상처를 동여멨다. 그는 부상당한 사람들에게도 붕대를 얻어, 빠짐없이 지혈해주었다. 애초에 치명상을 입은 이는 없었으므로 상처가 전원 치료되자 골목길에 울리던 비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렸다. 깡패들은 벽에 기대거나 주저앉은 채 멍한 눈으로 마리네를 바라보았다.


“아호, 이것도 일이네 일.”


마리네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깡패들과 싸우던 때는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으면서, 응급처치를 할 때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장바구니를 들고 떠나려다, 망연해 있는 깡패들에게 말했다.


“양아치 짓 또 할 거예요?”


부드럽게 말한 거지만, 그의 경고에 깡패들은 식겁해서 외쳤다.


“아...아닙니다!”


“직접 말하긴 뭐하지만...전 되게 착한 거예요. 정말 제대로 걸리면 지금쯤 다들 꽥, 이라고요. 알았죠? 그리고 거기 혀...이 아니라 오빠. 식구 먹여 살린다고 뼈 빠지게 일하는 누나 생각 좀 하세요. 누군 그 나이에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데.”


“죄송...죄송합니다.”


깡패는 바닥에 머리라도 찧을 기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마리네는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그냥 두면 곪으니 병원 가보세요. 치료비는 액땜이라고 생각하시고요. 그럼 이만.”


그는 사뿐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전보다 치마나 단화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바탕 운동을 해서 그런 걸까.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마리네는 움직임을 서둘렀다. 해는 일찌감치 떨어져, 사위는 짙은 푸른색이었다. 멀리 등대에서 불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봄인데도 바닷바람은 꽤 쌀쌀했다.


랄프의 집에 돌아오자 마리네는 일행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시작은 디리터의 목조르기였다.


“너 이눔시키, 먹을 거 구해 오랬더니 어딜 온 종일 싸돌아다녀! 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왁! 뭐...뭐야!”


식재료를 전적으로 마리네에게 일임한 관계로 일행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쫄쫄 굶어야 했다. 특히 제리온 같은 경우 식량이 없자 안주도 없이 랄프와 럼을 들이켰다. 그리고 빈속에 마시는 술은 취기가 놀라운 속도로 올라오는 법이다. 그는 마리네가 나타나자 딸꾹질을 해대며 다가왔다. 마리네는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우왓, 차라리 평소처럼 욕을 해! 루도, 도와줘!”


그는 루도에게 도움을 청했다. 루도는 벽난로 가에 고상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역시 허기에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여봐라, 저 녀석을 매우 쳐라.”


“예압!”


디리터와 제리온이 일제히 응징을 시작했다. 디리터가 마리네의 정수리를 쥐어박는 동안, 제리온은 옆구리며 겨드랑이를 사정없이 간질였다.


“힉, 우히약, 악!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 더러운 로젤리나!!”


“미천한 하녀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아악, 잠깐, 내 말 좀...”


마리네가 몸부림을 치자 발치에 있던 장바구니가 채여 날아갔다. 그러자 안에 있던 햄이며 당근이 바닥을 굴렀다. 에레이시아는 떨어진 식료품을 주워담으며 둘을 말렸다.


“어휴, 그만 좀 해. 그렇게 못 미더우면 너희가 갔다 왔으면 됐잖아.”


디리터는 그녀의 지적에 곧장 괴롭힘을 멈췄지만, 살짝 맛이 간 제리온은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막 제리온의 사타구니를 꼬집던 디리터는, 마리네의 옷이 다소 찢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히 관찰하니 핏자국도 군데군데 보였다.


“응? 뭐냐 이거. 웬 피야? 꼬락서니 보니까 제대로 당한 거 같은데.”


그는 붉게 물든 옷소매를 쥐며 물었다. 마리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으응...오다가 깡패를 만나서. 그래서 좀 늦은 거야.”


“그래? 그래서 어떻게, 따였냐?”


“뭔 소리야!! 혼쭐을 내주고 왔구만.”


만취한 랄프와 제리온을 침대에 던져놓은 후 일행은 저녁 준비에 들어왔다. 루도가 부엌에서 물을 끓이는 동안 에레이시아와 디리터는 식재료를 다듬었다. 마리네는 음식을 공수해온 공로로 저녁 준비에서 제외됐지만, 얼마 후 좀이 쑤신지 부엌에 얼굴을 기웃거렸다.

루도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벗어 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물을 데우고 있었다. 하지만 속옷조차 데루루피아가 준 여성용 원피스였다. 마리네가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렸다.


“귀하신 몸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인 행차십니까, 아가씨?”


루도는 바가지에 남은 물을 한 줌 떠 마리네에게 뿌렸다.


“그럼 네가 끓일 테냐? 요 건방진 마를로네.”


“킥킥. 이제 말투도 완벽해졌네. 사교계로 진출해도 되겠다.”


“웃기지 마셔. 진짜 여자 노릇하기 지친다. 원피스는 나름 입기 편하지만.”


마리네는 루도 옆에 쪼그려 앉았다. 냄비에 앉힌 물 위로 거품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루도가 연기를 창밖으로 내보내는 동안, 마리네는 장작을 한 개씩 집어넣으며 불 조절을 했다.

한창 냄비가 시끄러워질 때 즈음이었다. 루도는 부채질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죽였어?”


장작을 집던 마리네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아궁이에 던지려다 말고 잔가지를 뚝뚝 부러뜨렸다.


“섬뜩한 소리 하지 마. 죽긴 뭘 죽여. 그냥 혼 좀 내줬을 뿐이야.”


“그래? 다행이네. 그런 상황까진 안 가서.”


‘그런 상황’이란 부득이하게 살생을 해야 하는 경우, 즉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말했다. 람카디스는 생전에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허투루 검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마리네는 레인저가 된 17살 때에나 ‘살아있는 것’을 베어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많은 사건을 겪으며 루도는 그 규율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겪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판단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상대의 안위를 고려하다간 이쪽 목이 달아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선제공격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최근 레이시와 만났을 때가 그랬다.

마리네가 말했다.


“너라면...죽였을 거야?”


루도는 약간 뜸을 들인 후에야 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상대가 무기를 들었다면, 봐주거나 하진 않을 거야. 어린애가 들었든 노인이 들었든 칼은 심장을 찌를 수 있어. 그리고...많이 겪었잖아? 세상엔 나쁜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그래...”


마리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자신은 루도처럼 하지 못했다. 깡패들은 분명히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몇몇은 그를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 덕에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만약 그들이 뛰어난 군인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죽이지 않으면 죽을 상황이 온다면...


“이런, 내가 괜한 소릴 했네. 너무 마음에 두지 마.”


루도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자 자못 걱정이 된 것이다.


“응? 아아, 괜찮아.”


마리네도 그의 배려를 눈치 채고는 밝게 웃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기도 하지만, 둘은 로샤단 내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았다. 유년기를 지나 여기까지, 둘은 서로의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가기로 한 에메랄드 섬이라는 곳 있잖아. 아까 이칼롯이 스나우그 영감님에게 위치를 물어봤거든.”


루도는 분위기 전환도 할 겸, 마리네가 없는 동안 입수했던 정보도 알려줄 겸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응. 근데 그게 왜?”


“지도에는 없는 곳이래. 영감님도 리크나이츠 내에서 그곳으로 배를 몰 수 있는 건 자기뿐이라고 하시더라고. 도감에 없는 게 그런 이유였어. 놀랍지 않냐?”


마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디리터의 도감에 안 나와 있다 싶었다. 그의 도감 맨 앞장엔 대륙의 전도가 크게 그려져 있었고, 그다음 넉 장은 각 나라의 지도가 세밀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디리터의 아버지 케셔가 남긴 유산으로, 그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다. 제리온이 아무리 찾아봐도 에메랄드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며 핀잔을 주자 버럭 화를 낼 정도로 그는 도감을 애지중지했다.

에레이시아가 다 다듬은 양파와 당근을 가져왔다. 둘은 재료를 물에 씻은 후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때까지 마리네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왜 지도에 없는 거지? 루루 아줌마 말로는 사람도 꽤 사는 곳 같던데.”


“어, 그런가? 생각해보니 또 그러네. 도감뿐 아니라 여기 사람들도 모두 모른다고 하던데.”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 왜 랄프만이 에메랄드 섬으로 항해할 수 있는 걸까? 마리네는 이것에 대해 가설을 내놓았다.


“요는 이거 아냐? 안 가거나, 못 가거나.”


“흐응~.”


안 간다는 것은 너무 멀거나, 혹은 갈 필요가 없는 오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못 간다는 것은...

바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불어온 바람 때문에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루도와 마리네는 요리보다 부채질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폭포수 같은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지붕 위를 두드렸다. 산간 도시인 델키아의 경우 태풍의 영향을 그다지 많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루도로서는 이렇게 비가 몰아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랄프의 집은 거실이나 침실은 튼튼하게 지어져 빗물이 새지 않았지만, 부엌 같은 경우 이미 군데군데 바가지가 놓여져 있었다. 그 조그만 틈새로 빗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라비와 에레이시아는 정신없이 가득 찬 바가지를 비워야 했다.

창은 판자로 막아 두었지만 그래도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떨어져 나갔다. 결국 디리터는 비가 그치면 떼어준다며 창에 못질을 해버렸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루도는 바깥은 어떤지 확인할 겸 문을 열었다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에 질겁했다.

디리터는 바다가 요동치는 광경을 넋 놓고 구경했다. 높이 수 미터는 되는 파도가 곰실거리며 바다를 유린하고 있었다.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똬리를 트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디리터는 탄성을 질렀다.


“와, 말도 안 돼. 저기에 어떻게 배를 띄워!”


새벽부터 쏟아진 빗줄기는 정오가 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한낮인데도 사위는 초저녁처럼 어두웠고, 몇몇 가게에서는 벌써 등불을 밝힐 정도였다. 주민의 절반이 어업에 종사하는 도시인만큼 배를 띄울 수 없게 되자 거리 자체가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상인들도 태풍이 물러가면 움직이자는 생각에 여관이며 음식점에 틀어박혔다.

일행은 각자 침대맡이며 식탁, 난로 옆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마리네는 장부를 펼쳐놓은 채 남은 여비를 점검했고, 루도와 제리온, 라비는 식탁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했다. 디리터와 에레이시아는 난로의 불을 쬐며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도란거렸다. 굳이 현상금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폭우 때문에 외출은 꿈도 못 꾸었다.

물론 모두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었다. 탕탕탕, 현관이 작게 흔들렸다. 루도는 처음엔 특이한 빗줄기가 문을 강타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날씨는 괴팍스러웠다. 탕탕탕! 문이 열리지 않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좀 더 강하게 들려왔다. 루도는 그제야 어기적거리며 움직였다.


“엇, 이제 오는 거야?”


“....”


이칼롯은 금방 물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뺨에 착 달라붙었고, 움직일 때마다 턱이며 망토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입술이 어지간히 빗속을 헤집고 다닌 모양이었다. 제리온은 그의 몰골을 이렇게 평했다.


“저 인간이 저렇게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이칼롯은 현관에서 옷을 남김없이 짠 후에야 들어올 수 있었다. 그가 조용히 난로 가로 앉자, 마리네가 모포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루도가 그에게 데운 우유를 건네며 물었다.


“뭐 건진 거 있어?”


이칼롯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상당히 폐쇄적이다. 작은 정보라도 허투루 알려주질 않더군. 하지만 주민 중에 로샤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설마 이런 바닷가까지 오겠냐는 거지. 무장한 검객도 간간이 보이긴 했는데, 대부분 개별적으로 움직이더군.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 다행이네.”


이칼롯은 오전 내내 입수한 정보를 일행에게 알렸다. 그는 혹시 누군가가 로샤단을 쫓아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안개송곳니에게 제대로 당한 선례도 있고, 그는 조그마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제리온이 물었다.


“그냥 가십거리라도 없어? 의외로 그런 데에서 정곡을 찔리는 경우가 많다고.”


“별로. 퀴넨으로 가려던 무역선이 태풍 때문에 결항하였다는 것, 몇몇 어선이 아직까지 귀항하지 않는다는 것, 폭우로 귀리 창고가 내려앉았다는 것 정도? 모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쳇, 전부 태풍 얘기군. 재미없게 스리.”


그는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카드 게임에 열중했다.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칼롯의 꼴을 보아 외출도 무리고, 적어도 사흘은 이곳에서 무료함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우유를 마시던 이칼롯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부둣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더군. 피해자는 다섯 명인데, 모두 질 나쁜 불량배였다던가...”


“...뭐?”


그때까지 마리네는 별 관심 없이 장부정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칼롯의 마지막 발언이 그를 환기시켰다. 그는 책을 덮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인이라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


“어...어디서?”


“부둣가에 있는 어패류 창고였던가...”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그들이다. 그 깡패들이 죽었다고? 혹시 자신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깡패들은 마리네가 떠날 때에는 모두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고, 떠나는 그에게 우렁찬 인사까지 했다. 때문에 마리네로 인해 그들이 죽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은 마리네가 떠난 뒤, 다른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이 된다. 마리네는 황급히 무기와 옷을 챙겼다.


“자...잠깐만 나갔다 올게.”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건데?”


막 현관을 나서려 하는데, 제리온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탁자에 턱을 괸 채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뿐 아니라 루도와 디리터, 에레이시아도 같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제리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아니야. 그러니까 그 문 닫아.”


“아니라니? 뭐가...”


“너를 공격한 놈들이 아니라는 거야. 그리고, 혹시 맞다 하더라도 너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


마리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그들은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리고 부상으로 말미암아 살인범에게 대처하지 못했다 치더라도, 오히려 화를 자초한 건 그쪽이지 마리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깡패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제대로 걸리면 지금쯤 다들 꽥, 이라고요. 알았죠?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가 문고리를 쥔 채 머뭇거리자, 루도가 다가가 대신 문을 닫았다.


“진정해. 네가 나간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살인범이라도 찾으려고? 우린 수배 중이야.”


“루도...”


루도는 마리네의 어깨를 붙잡고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그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자리에 앉았다. 루도의 조언에 이성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침착하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살인이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는 거고, 오히려 자신이 당하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고...

그런데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루도는 탁자에서 럼을 한잔 따라 그에게 건넸다. 마리네는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는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루도가 말했다.


“정 궁금하면 비가 그치고 난 뒤라도 늦지 않아. 그때 알아보자고. 알았지?”


마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작가의말

마리네 : 손수건 내놔 새끼야

깡패: 드...드리겠습니다!

마리네 : 필요없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람의 계승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7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 +3 15.04.16 771 27 19쪽
146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10) +5 15.04.15 739 36 18쪽
145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9) +3 15.04.15 766 29 19쪽
144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8) +3 15.04.15 749 31 17쪽
143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7) +3 15.04.15 803 27 21쪽
142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6) +4 15.04.14 738 30 18쪽
141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5) +2 15.04.14 817 28 17쪽
140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4) +6 15.04.14 735 27 15쪽
139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3) +1 15.04.14 718 29 18쪽
138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2) +3 15.04.14 725 30 17쪽
137 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1) +3 15.04.14 733 24 17쪽
136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完) +3 15.04.12 826 25 15쪽
135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5) +3 15.04.12 656 23 17쪽
134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4) +2 15.04.12 666 25 17쪽
133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3) +1 15.04.12 657 27 19쪽
132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2) +3 15.04.12 754 25 21쪽
131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1) +1 15.04.12 880 25 17쪽
13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1) +6 15.04.11 969 30 16쪽
129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0) +1 15.04.11 939 26 19쪽
128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9) +2 15.04.11 976 25 21쪽
127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8) +2 15.04.11 979 25 19쪽
»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7) +2 15.04.11 837 28 18쪽
125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6) +1 15.04.11 838 23 21쪽
124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5) +1 15.04.11 931 29 18쪽
123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4) +3 15.04.09 1,052 33 25쪽
122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3) +3 15.04.09 973 25 19쪽
121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4 15.04.09 744 25 13쪽
12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 +1 15.04.09 1,013 25 17쪽
119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6) +3 15.04.09 940 28 16쪽
118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2 15.04.09 826 30 15쪽
117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4) +7 15.04.07 1,139 35 22쪽
116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3) +2 15.04.07 936 31 17쪽
115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2) +2 15.04.07 743 32 11쪽
114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2 15.04.07 1,032 28 18쪽
11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4) +1 15.04.07 985 28 14쪽
11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3) +4 15.04.06 991 31 15쪽
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1,000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5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2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1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4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3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3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2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4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5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7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3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70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6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5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7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3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6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