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무덤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쪽 능선에 만들어졌다. 언젠가 루도와 마리네가 늑대에게 쫓긴 적이 있는, 그 언덕이었다. 스무 명에 다다르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일행은 밤낮으로 땅을 파야 했다. 사망자의 유족이나 경비대가 찾아와 도와주긴 했으나, 그래도 사흘이나 걸릴 정도의 대작업이었다.
시신을 묻는 동안일행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파고, 파고, 또 팠다. 힘이 다해 나중에는 삽을 쥔 손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은 정신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이 묻힐 흙바닥은 항상 누군가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델키아 영주가 호의를 베풀어 장례는 제법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쾌청한 날씨가 이어졌다. 자그마한 조각구름만이 하늘에 떠 있는 가운데, 루도는 람카디스를 땅에 묻었다. 그가 안치된 관에 뚜껑을 덮는 순간, 그는 다시 한차례 눈물을 쏟아냈다. 금방이라도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빌 것 같은 그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일행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흙을 덮었다. 지난 며칠 간 너무 흐느껴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을 놀리는데도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게 루도는 그를 떠나보냈다.
시야가 탁 트이던 넓은 능선은, 어느샌가 이십여 개의 봉분이 울퉁불퉁하게 자리 잡았다. 마치 다른 장소에, 다른 시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허무하다....”
마리네는 람카디스의 무덤을 응시한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옆에 앉은 루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둘은 넋 나간 사람처럼 온 종일 무덤가에 앉아 있었다. 짧은 대화조차 오고 가지 않았다. 람카디스를 잃은 충격으로 둘은 지난 나흘간 빵 한 조각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둘은 몰라보게 해쓱해진 얼굴을 한 채, 결코 무덤가를 떠나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고, 다시 아침이 오고. 누군가 그들을 발견한다면 사람이 아니라 굳어버린 비석처럼 보일 것이다. 늑대가 나타날지도 몰랐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 한 시라도 람카디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는 차가운 땅속에 묻혔지만...
루도와 마리네가 무덤가를 지키는 반면, 나머지 셋은 각자 바쁘게 돌아다녔다.
디리터는 길드원의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전했다. 그 스스로도 슬픔에 목이 잠겨 있었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가끔 그가 둘에게 음식을 주러 올 때면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는 굳이 소년들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다만 그는 몸 상하지 않게 주의하라는 짧은 충고만 던지고는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는 무덤가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으면 슬픔이 복받쳐오기 때문이었다.
제리온은 델키아 영주나 치안 경비대에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사건 경위에 대해 조사받았다. 하지만 그 조차 진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딱히 쓸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로브 입은 자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아낸 것뿐이었다.
로브 입은 자들이 이번 사건의 주범이라 여겨졌으나 그들 역시 몰살된 상태라 심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합쳐 30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지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걸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경비대는 며칠 안 가 로샤단에 원한을 가진 용병들의 습격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미심쩍은 점이 많았으나, 물증이 너무나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이칼롯은 다 타버린 건물 폐허를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다. 그는 로샤단의 비밀과 이번 사건이 관련이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집은 형편없이 파괴되어 있었지만 그는 끈기 있게 파편 사이를 조사했다.
로샤단이 습격당한 지 다섯째 날, 일행은 이칼롯의 부름으로 무덤가에 모였다. 다들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초췌한 모습이었다. 일행은 무덤가에 둘러앉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리온은 진이 빠진 얼굴로 산봉우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귀찮고 난처한 일을 맡은 건대도, 그는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이칼롯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유품...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이칼롯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가방을 열었다. 그는 먼저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 디리터에게 건넸다.
“창고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 건물이 폭발할 때 창문 틈새로 날아간 것이겠지.”
디리터는 얼떨떨한 얼굴로 책을 받았다.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아아, 무사했네. 완전히 타버린 줄만 알았는데...고마워.”
그건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동물도감이었다. 도감은 살짝 표지가 그을렸을 뿐, 별다른 훼손은 없어 보였다. 디리터는 책장을 주르륵 넘겨보고는 이내 책을 덮었다. 다행이라고 안도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도감 따윈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칼롯은 다시 책 두 권을 꺼냈다. 그건 디리터의 동물도감과 달리, 리넨 천에 둘둘 말려져 있었다. 그것도 대충 감은 게 아니라 정성스럽게 포장한 모습이었다.
그가 천을 풀자 일행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은 형편없이 불에 타, 원형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것도 이칼롯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종이쪼가리들을 모아 겨우 복구한 것이었다.
일행은 이칼롯이 들고 있는 책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책이라기보다 차라리 잿더미에 가까웠다. 제리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뭔데? 유품도 유품 나름이지...”
“이틀 동안 건물 폐허를 뒤졌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건 이 두 권이 전부였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지난 10여 년간 람카디스 대장과 카토르가 기록한 일지다.”
그 말에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를 외면하고 있던 루도조차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이칼롯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치안 경비대가 어영부영 사건을 종결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대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증거가 모자란다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그래서?”
“내 말대로다. 로샤단이 뭔가 비밀스런 일에 몸담고 있다는 건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잖아? 난 이번 사건이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간 불타버린 폐허를 조사한 거고, 결국 발견한 게 이거다.”
제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발로 서자 다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는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다잡으며, 이칼롯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알아냈어? 그 로브 입은 시체들의 정체를?”
“아니, 알아낸 건 없다. 하지만 대강의 윤곽선은 잡았지.”
제리온이 책을 낚아채려고 다짜고짜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맥없이 허공을 저었다. 그는 이칼롯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야! 내가 보면 안 된다는 거야?!”
“서두르지 마. 어차피 모두 봐야 할 내용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 권의 책을 루도에게 던졌다. 멍하니 있던 루도는 엉겁결에 책을 받았다. 그는 심하게 그을린 겉표지를 보고는, 이내 책을 던진 이칼롯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제리온은 이칼롯의 어깨가 낮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는 멀뚱하니 있는 루도를 향해 말했다.
“중요한 내용은 거의 다 카토르의 일지에 담겨 있더군. 대장의 것은....너와 마리네만 보도록 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머지 한 권을 제리온에게 넘겼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따끔거렸다. 아마 잿가루가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리라.
제리온은 정신없이 책을 넘기고 있었다. 루도는 등을 돌린 이칼롯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하게 책장을 넘겼다. 어느새 다가온 마리네가 어깨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책은 첫 장부터 심하게 불에 타버려, 내용을 유추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처음 석 장은 도저히 읽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넉 장째에 가서야 잔뜩 그을린 검댕 사이로 드문드문 글자가 보였다. 루도는 조심스럽게 일지를 읽어 내려갔다.
508년 9월 11일
(훼손)....란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서둘러 가린워드 마을로 향했다.
508년 9월 14일
(훼손)..워드 마을에서 상처 입은 아이를 발견했다. 서둘러 지혈을 해
(훼손)..외에는 생존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이곳에서... (훼손)
그 밑 부분은 불에 타 보이지 않았다. 루도는 다시 책을 한 장 넘겼다.
508년 10월 18일
루도와 마리네가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난 거절하려 했지만, 녀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508년 11월 13일
일지를 거의 한달 만에 쓴다. 꼬마들을 가르치느라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다. 녀석들이 나한테 달라붙을 때마다 병아리가 생각나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훼손)
508년 12월 14일
아이들에게 솜옷을 지어주었다. 큰맘 먹고 산 건데, 둘이 뛰어놀다 하루 만에 옷이 망가졌다.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으려다 녀석들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휴우, 나도 참 모자란 것 같다.
509년, 2월 24일
문득 한밤중에 문을 열어보니, 루도가 이불을 팽개친 채 잠들어 있었다. 녀석이 그렇게 잠버릇이 고약했었나? 감기 걸릴까 싶어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세상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녀석들과 만난 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흑...”
마리네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한 손으로 연방 눈가를 훔쳤다. 행여 눈물이 책에 묻어 잉크가 번지면 큰일이었으니까. 울음을 참느라 어깨가 사정없이 들썩거렸다.
그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람카디스의 일지는 둘에 관한 이야기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두 아이와 식사를 한 얘기, 두 아이에게 검술을 가르친 얘기, 두 아이와 외출을 한 얘기. 그것밖에 쓸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람카디스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가 본다면 그저 소소한 육아일기일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람카디스가 남긴 행복의 기록이었다.
“으윽....람....”
루도는 어느새 눈물 콧물로 범벅되어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부분에 손이 멈췄다.
509년 4월 3일
납치된 루도를 구해냈지만, 그 아이는 이미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하다. 루도는 나에게 진실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잘 타일러서 무마시켰지만, 나 역시 회의감이 들었다. 펠아람의 아이가 죽은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나 또한 전장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그럼 루도와 마리네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에 몸담고 있다. 일이 자칫 잘못되면, 애꿎은 아이들마저 휘말릴 지도 모른다. 내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에 아이들을 위험에 내몬 것은 아닐까?
루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간신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려 했는데, 녀석은 또다시 악몽처럼 슬금슬금 기어올라왔다. 머리가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현기증에 시야가 캄캄해졌으나, 루도는 결코 그 단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펠아람의 아이.
“이....”
마리네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루도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선선한 날씨인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는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책장을 헤집어댔다.
“대체...대체...”
그는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다가, 다시 어느 한 페이지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또 있었다. 수많은 행복의 찬사 속에 몸을 숨긴 채, 꿈틀대는 악몽의 씨앗이.
514년 9월 19일
가까스로 광휘의 결사와 수호기사단의 결전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데루루피아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니암이 폭주했다는 것과, 루도와 마리네가 그를 막았다는 것. 그렇게 휘말리지 않게 하려 노력했는데, 어째서 녀석들이 니암과 만나게 된 거지?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루도는 결국, 가린워드의 생존자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마리네는...(훼손)
“가린....워드...!”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분노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어째서 그 단어가 다시 나타난 걸까? 10년이나 흘렀는데도, 가린워드라는 단어는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동요를 눈치 챈 마리네가 어깨를 감싸 주었다. 루도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며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 모두 무너져 내렸다.
514년 9월 23일
델키아로 돌아오자마자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발렌스 상회가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받아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것. 유미르네는 그 직후 실종되어, 현재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상회가 류이너스 교단에 협력하고 있던 걸 고려하면 평범한 도적떼에 당한 건 아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안개송곳니라는 단체가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번 사건조차 녀석들의 소행이라면 놈들은 예상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위험한 무리임이 틀림없다. 아직 루도와 마리네는 이 사실을 모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아...아아...맙소사...”
“유미르네...”
오싹한 한기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둘은 늘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녀가 말없이 델키아를 떠난 것,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 하나 보내지 않는 것. 하지만 워낙에 바빠서, 그리고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다. 머나먼 남쪽 마을 같은 건 없었다. 유미르네는, 그녀는 그렇게 5년 전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던 것이다.
그 페이지 이후로는 다시 불에 타 읽을 수가 없었다. 더욱더 이번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루도는 낙담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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