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다시 고르딘의 공격이 들어왔다. 베리어스는 이번에는 막을 생각을 버리고 그대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 가르는 철퇴 소리가 싸늘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 틈을 타 다른 호위대가 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캉, 순간적으로 불꽃이 일었다. 기사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갑주를 뚫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검. 그의 공격은 고르딘의 갑옷에 속절없이 차단되고 말았다.
대체 두께가 얼마나 되기에 저런 방어력을 지닌단 말인가.
고르딘은 방패를 들어 자신을 공격한 기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기사는 무방비하게 있다가 얼굴을 가격 당하고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커억!”
피와 함께 이빨 몇 개가 땅바닥에 흩어졌다. 디리터가 다시 외쳤다.
“에리!! 에리이!! 어서 도망치란 말이야!!”
에레이시아의 눈이 그를 향했다.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극도로 공포에 질린 눈동자.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리가 풀린 건가? 답답함에 숨이 막혀왔다. 지금 저 남자도 상대하기 벅찬데, 에레이시아까지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에레이시아의 떨림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디리터의 외침을 들은 것일까, 그녀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은 듯 침을 꿀꺽 삼킨 후, 기절해 있는 제리온에게 달려갔다. 디리터가 그 광경을 보고 황당함에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야 이 계집애야!! 도망가라고 했잖아!! 뭐 하는 거야!!”
“그럼 얘는 어떻게 하라고? 그냥 죽으라고?!”
그녀도 지지 않고 표독스럽게 답했다. 그녀는 제리온의 양다리를 붙잡고는 근처에 있는 헛간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아무래도 헛간에 들어간 후에 문을 걸어 잠글 모양이었다.
디리터는 속이 탔지만 계속 에레이시아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고르딘은 막 쓰러진 기사의 명치에 메이스를 내리꽂는 중이었다.
“꺽.....”
그의 가슴팍이 초콜릿처럼 으깨어졌다. 짧은 단말마와 함께, 그는 그 즉시 절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디리터와 베리어스뿐이었다. 고르딘이 베리어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의 철퇴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시신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용서를.”
“좆 까고 있네, 이 괴물 자식이!!”
디리터가 뒤에서 그의 허벅지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한손만을 썼기 때문인지 위력이 형편없었다. 그의 공격은 플레이트 레깅스조차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왔다. 이쯤 되니 저 남자를 쓰러뜨릴 방법 따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리터는 후속타조차 포기한 채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겉으로 보기에 고르딘은 디리터와 베리어스 사이에 포위된 형국이었지만, 오히려 심적으로 압박당하는 쪽은 둘이었다. 고르딘이 누굴 먼저 죽일지를 고민하는 동안 디리터는 재빨리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상황은 지극히 나빴다. 저자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도망가는 게 최선이긴 한데 제리온과 에레이시아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상대는 움직임도 꽤 빨라 도망친다고 해서 따돌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때 멀리서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살인자! 순순히 항복...?”
“우...우왓?!”
자경단이었다. 마을 주민의 신고로 자경대원들이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르딘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겁을 집어먹었다. 기사도 물러서는 마당에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자경단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맡은 사명이 있는지라 그들은 주춤거리면서도 고르딘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방해꾼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한지 연방 숨을 몰아쉬었다.
“...방해다.”
디리터는 잽싸게 눈을 굴렸다. 에레이시아가 제리온을 헛간에 밀어 넣은 뒤 자신에게 손짓하는 게 보였다. 자경단에겐 미안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디리터는 슬금슬금 물러서다가 냅다 헛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베리어스! 뛰어!”
베리어스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왔다. 고르딘이 둘을 붙잡으려 했으나 자경대원 하나가 그를 포박하러 접근했다. 그 자경대원의 얼굴이 그대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아?!”
“이...뭐야 이놈!”
그동안 일행은 무사히 헛간으로 도망쳤다. 디리터는 건물 안에 들어간 뒤 빗장으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어...이젠 어쩌지?”
무작정 건물로 도망치긴 했는데, 그걸로 상황이 끝났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 추적자라면 여기서 시간을 벌 수 있을 테지만, 저런 괴물에게 이런 목축 건물 따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헛간의 문이 그자의 철퇴 한 방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저...저게 안개송곳니입니까? 저런 괴물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베리어스는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눈 깜빡할 새에 자신의 동료 셋이 당했다. 복수도 복수 나름이지, 저런 괴물 같은 자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는 아직 검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칼자루를 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밖에서는 자경단의 비명이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르딘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은 자경대원들이 그대로 줄행랑을 놓은 것이었다.
자경단의 난입은 1분도 안 되어 정리됐다. 디리터는 그들이 조금은 시간을 벌어줄 거로 생각했기에 더욱 애가 탔다.
“야, 야 임마! 언제까지 쳐 자고 있을 거야! 안 죽었으면 제발 일어나라!!”
그는 제리온을 붙들고는 냅다 뺨따귀를 날렸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지만, 너무 세게 때린 탓에 그의 양 볼은 금세 부어올랐다.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제리온의 마법뿐이었다.
“제발 일어나라, 좀! 눈 좀 떠 씨발!!”
철썩철썩, 따귀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하지만 제리온은 고통스러운 신음만 낼 뿐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에레이시아가 헛간 구석에 놓인 여물통을 들고 왔다.
“비켜!!”
“어?!”
여물통 안에는 빗물이 반쯤 고인 채 썩어가고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고약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베리어스는 냄새를 맡고 즉시 코를 막았다.
“윽...그웬드린 양, 설마...”
“으랏차차!!”
그녀는 여물통을 들더니 그대로 기절한 제리온에게 쏟아 부었다. 회갈색의 액체가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크웩, 어푸푸, 우워...”
효과는 대단했다. 안면을 강타한 물세례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번쩍 드는 냉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엄청난 악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리온은 그 즉시 깨어났다.
“웨엑, 썅! 이게 뭐야! 어...여긴 어디냐.”
침을 퉤퉤 뱉던 그는 자신이 처음 보는 장소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어리둥절했다. 왠지 모르게 뺨도 엄청 쓰라렸다. 그는 그제야 조금 전에 자신이 기절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뭐냐,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자신을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봐도 좋아 보이는 상황은 아니다. 이 인원 말고는 전부 당한 건가?
디리터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이제 너밖에 없어! 이 개새끼야!”
“뭐 어쩌라고 썅놈아!”
“저 자식 좀, 어떻게 해봐아!!”
그는 절박하게 외치며 밖을 가리켰다. 제리온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굳게 닫힌 문과, 베리어스가 밀가루 포대며 오크통으로 문을 막는 광경뿐이었다.
하지만 제리온은 ‘저 자식’의 의미를 단박에 파악했다.
“밖에...있냐?”
“그래! 자경단도 모두 도망가고...이젠 정말 우리뿐이다!”
제리온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꼭 도망쳐도 이런 데로 와야겠냐!!”
사실 도망친다기보다는 숨는다는 개념이지만, 그 상황으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자인 에레이시아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디리터가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피리 소리...분명 여관 쪽에서 났는데.”
“응? 피리? 그 이상한 소음 말하는 거냐?”
“그 소리를 들은 후 저 자식이 우릴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관...방향이었다고?”
둘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도쪽에도 안개송곳니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철컹, 철컹. 고르딘의 걸음걸이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일행의 심장도 요동쳤다. 제리온이 헛간을 둘러보더니, 욕지거리를 했다.
“....썩을! 일단 벽에서 좀 떨어져!!”
“응? 벽? 문이 아니라?”
에레이시아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리온이 말했다.
“너라면 정직하게 문 열고 들어오겠냐?! 그 미친 메이스를 쓰는 자식이? 빨리 정중앙으로 모여!”
이런 때만큼은 다들 말을 참 잘 듣는다. 일행은 순식간에 헛간 중앙으로 집결했다. 제리온은 호흡을 가다듬고서 천천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디리터가 그 광경을 보고 간절히 말했다.
“제발, 좀 죽여주라. 너만 믿는다.”
“아, 좀, 닥쳐!”
서서히 그의 머리 위로 보랏빛 구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마법, 포스 미사일(Force missile)이었다. 제대로 맞으면 갈비뼈가 사정없이 부러지는 기술이지만, 그 괴물이 상대다 보니 그도 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워낙 익숙한 기술이라 평소에는 무(無)캐스팅으로도 무난히 사용하는 기술이지만, 그는 만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보컬라이즈(Vocalize)를 행했다.
자색의 구체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두 개밖에 못 만드는 기술이지만, 그가 혼신을 다해 쥐어짜 낸 탓인지 구체의 수는 무려 네 개였다.
기잉, 기잉, 기이이이... 네 개의 구체가 금방이라도 발사될 것처럼 포효했다. 그것들이 회전하며 내는 소리에 다들 숨을 죽였다. 그 남자도 그 남자지만, 지금 제리온이 행한 마법도 눈이 휘둥그레 해지기에 충분했다.
“좋군! 그 씨발같이 멋진 마법이구나!”
디리터가 쾌재를 질렀다. 그는 제리온이 만들어낸 구체가 얼마나 터프한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 그는 포스 미사일을 이용해 마체르담을 쓰러뜨린 전적이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혹시 그 남자가 이것조차 막아낼 상황을 고려해 디리터는 머리통만 한 돌덩이를 가져왔다. 여차하면 그의 몸통에 던질 생각이었다.
헛간 안으로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것은 제리온의 마법이 내는 회전음뿐이었다. 고르딘의 발자국소리는 조금 전 문 앞에서부터 뚝 끊어져 있었다.
숨 막히는 대치의 순간, 돌연 헛간 뒤쪽의 벽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디리터는 나무파편을 막으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고르딘은 문이 아닌 벽을 부수고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 난 구멍 사이로 보이는 그의 철갑에 일행은 오금이 저리는 공포를 느꼈다.
쾅! 쾅! 그가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벽은 힘없이 부서져나갔다. 순식간에 사람이 들어올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가 헛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제리온이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포스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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