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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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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7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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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DUMMY

가슴이 아려왔다.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람카디스에게 했었던 것 같다.


-진실은 무엇이죠?


-네가 원하는 진실은...불행이야. 굳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행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진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여전히 똬리를 튼 채 루도를 괴롭히고 있다. 그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욕망이 되어 불타오른다. 크리드라고 달랐을까? 단 며칠을 알고 지냈던 루도조차 그녀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였다. 하물며 그는 안젤리카의 아버지다. 어느 날 실종되었던 딸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걸 납득할 수 있는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안제는...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예요.”


“....”


크리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루도 역시 그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람카디스가 해주었던 말을 믿기로 했다.


“안제는 수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지요.”


그 말에 크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덧없는 추억이 쓰라리게 되살아났다.


“그랬지. 그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어. 뛸 듯이 기뻐하며 만점 성적표를 보여주던 게 생각나는군.”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크리드 역시 루도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그의 입가에 고인 미소는 잔잔했고, 그래서 더 슬펐다. 그 미소를 보며, 루도는 결정을 내렸다. 안젤리카에 대한 것은 아니더라도, 현 상황에 대해선 그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 역시 완벽하게 알고 있진 않아요. 제가 휘말린 사건의 진위가 무엇인지, 어째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지도요. 어찌 됐든 루시올라 경은 저희들의 은인이십니다.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씀드리겠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진위가 어찌 됐든, 너희를 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내 작위가 박탈되는 한이 있더라도.”


루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데루루피아에게 들었던 얘기를 크리드에게 찬찬히 설명했다. 니암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시종일관 몸을 떨었다. 루도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크리드의 표정도 굳어졌다. 류이너스 교단, 상트룸 수도회, 그리고 두 단체를 반목시키려 하는 무리. 그 역시 루도처럼 격전지가 레인스터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아이가...목적이란 말인가?”


“네. 그리고 아까 쫓아오던 자들은 광휘의 결사구요. 저도 오늘 처음 본 거라 확실히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건 저도 정확히는.... 저 역시 데루루피아 아줌마에게 들은 이야기니까요. 그분은 지금은 그냥 이해해달라고만 했어요.”


크리드는 몸을 약간 일으키며 니암을 바라보았다. 니암은 잔뜩 겁먹은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니암이라고 했나? 자네가 문제의 열쇠인 것 같은데, 내게 알려줄 수 있겠나?”


니암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도 몰라요. 왜...왜 저를 쫓아오는 건지도, 왜 제가 중요한 건지도...전 그냥 사제님들 잔심부름이나 하는 복사일 뿐인데...”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인가.”


“저 역시 궁금해서 물어봤었지만, 데루루피아님은 저에겐 모른 채 있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셨어요.”


크리드는 잠시 니암을 응시했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여기서 더 캐물어 봤자 나올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도의 설명 자체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 있었다고?”


“네. 그 후에 처음 보는 괴한들에게 습격당했어요. 광휘의 결사는 결코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은 훨씬...뭐랄까...압도적이었어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 만약 지붕 위의 마법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예요.”


“지붕 위의 마법사?”


루도는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괴한들에게 공격당하기 직전, 저희들을 구해줬어요. 아니, 우릴 구해준 건지, 그들을 공격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들이 뭐라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경황이 없어서 정확히는... 아! 절 공격한 자가 그 마법사를 ‘단장’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단장이라...”


그들의 정체를 유추해보려 했으나, 쓸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어떤 단체에 속해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렇다 쳐도 범주가 너무 광범위했다. 단장이라는 말에 기사단이 떠올랐으나, 기사가 마법을 사용할 리는 없었다.


‘왕실 마법친위대? 아니, 그들은 위그라프 후작의 반역 때 몰살당했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그자들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크리드는 또 들은 것 없냐며 루도를 재촉했다.


“그...글쎄요. 이름을 불렀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안다뭐시기? 지붕 위의 마법사는 감? 람? 뭐였던 거 같은데...”


루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니암을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크리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태라면 범인의 정체를 간파하기엔 무리였다. 루도는 갑자기 생각난 듯 탁자를 쳤다.


“아, 맞다! 갑주를 입은 남자가 그 마법사한테 말했어요. ‘경비병을 재운 것이 당신이었군.’ 이라고요.”


“마법사라고 했었지. 그럼 경비대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설명되는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도와 니암은 광휘의 결사가 다시 나타난 거라 생각하고 어깨를 떨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의 신변에 위험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크리드는 조용히 일어나 커튼을 들춰보았다. 뜻밖에 예상과는 다른 낭보가 전해졌다.


“치안 경비대로군. 아까 그자들은 전부 사라진 모양이야.”


“저...정말요? 그럼 마리네는 어떻게 된 거지.”


“데...데루루피아님은...”


헤어진 사람들에 대한 걱정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가로 뛰어왔다. 그의 말대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경비병과 조우하자 퇴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산한 분위기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특유의 육중한 투핸드소드는. 아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디리터!”


***


“허 참 괴상하단 말이야.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깊이 잠들어버리다니...우리가 그렇게 혹사당했었나?”


“글쎄요, 뭔가 좀 해괴하긴 하네요. 뭐 별문제는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램프의 불이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마리네는 신기한 눈으로 지구대 안을 둘러보았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녔다. 로샤단과는 달리 멋지게 빼입은 체인 메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갑옷이라면 웬만한 몽둥이로는 흠집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치안 경비대는 조금 전 들어온 살인 사건으로 인해 모든 병력이 급히 소집되었다. 상업 지구에 있는 자그마한 술집에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 있더란 것이었다.

경비대는 있는 인원을 모두 끌어 모아 현장에 투입했다. 수십 명의 대원들이 열을 맞춰 분주하게 뛰어갔다. 남아있던 경비대장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지었다.


“하아...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야? 건물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어버리다니...”


그의 관심은 온통 술집 살인사건에 쏠린 듯했다. 그 덕분에 조금 전 지구대에 도착한 강도 피해자들에겐 단 한 명의 인원만 배정되었다. 그마저도 반쯤 풀린 눈으로 데루루피아의 미모만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가 느끼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하,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강도들이야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아작이 나버릴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아망초양은 참으로 아름다우시군요.”


“아...네...감사합니다.”


교단과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미리 둘러댈 준비를 해놓았으나, 그건 애초부터 기우에 불과했다. 지구대에선 그녀의 이름과 거주지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강도에게 수사력을 집중할 틈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이런 느슨한 수사 방식이 전형화된 모양이었다.

슬슬 조서 작성이 마무리되자 일행의 관심도 다른 곳에 쏠렸다. 마리네가 눈치를 살피며 제리온에게 말했다.


“저분들이 말하는 살인사건, 나 아까 봤어. 어떤 마법사가 우리를 쫓아왔는데, 그 사람 짓이 분명해. 하마터면 우리도 죽을 뻔했다니까. 아! 옆에 동료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는데, 입고 있는 복장이 수호기사랑 똑같았어.”


“앙?”


데루루피아가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를 노렸다고? 마법사가?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왔니?”


“다른 마법사가 나타나 구해줬어요. 우릴 구해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둘 다 엄청나더라고요. 마법이 그런 거였다니...카토르는 만날 그저 그런 재주만 부리던데.”


그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이번 사건의 원흉일 확률이 컸다. 그런 괴물 같은 실력이라면 수도회 일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데루루피아는 몸을 바짝 숙이며 물었다.


“혹시 생김새라던가 인상 깊은 점이라던가 기억나는 것 없니?”


마리네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는 곰곰이 그때 상황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우릴 도와준 마법사는 정말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또 한 명은 갑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어요. 나머지 한 명은 좀 뭔가 날카로운 느낌이었는데, 그것도 어두워서 잘...”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너무 경황이 없다 보니 자세히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잠시 머리를 싸매더니,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붕 위의 마법사가 그 사람들을 뭐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뭐라고 했는데?”


데루루피아와 제리온이 일제히 그를 재촉했다. 마리네는 부담스러운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안..송곳니...아! 안개송곳니! 틀림없어요!”


데루루피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



“누가 발견했습니까?”


“누구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델키아로 오던 상인들이죠. 아이크루와 자작 역시 이 일을 알고 있지만, 저희가 미리 손을 써두었습니다.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발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카토르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방 역시 간단하게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거창한 격식은 필요 없었다. 류이너스의 심볼이 새겨진 사제복. 카토르는 그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과 조우하게 될 때마다 매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예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루프리모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세한 정보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수호기사단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지요. 그때까지 무사해야 할 텐데 걱정이군요.”


“사제님께서도 이 일이 상트룸 수도회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제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교단을 습격한 수도회, 수도회를 습격한 교단. 서로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다. 아니, 정말로 잡아떼고 있는 것일까?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작은 톱니바퀴는 여전히 멈춘 체다. 카토르는 그 미세한 의문점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사제님이 쉽게 판단을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 얘기해볼까요? 이건 이간책입니다.”


그의 말대로다. 사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단체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유혈충돌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었다. 아니, 충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학살과, 그것에 대한 다른 한쪽의 보복에 가까운 살육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두 단체가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제의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


“르휘베트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행 장소엔 서로를 상징하는 휘장 이외에는 단서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간책이라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요? 무엇을 얻기 위해?”


카토르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뿐이지, 짐작이 가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아스트리카 왕국만 생각하더라도. 하지만 카토르는 굳이 그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지금은 늙은이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펠아람의 아이를 죽인 자들에 대한 단서는 찾았습니까?”


사제의 얼굴이 즉시 굳어졌다.


“아직입니다. 르휘베트님께선 그 일과 이번 사건의 주동자가 같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교단의 허술한 정보체계를 파고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요.”


사제는 계면쩍게 웃었다. 눈앞의 사내는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 역시 그의 심정을 모르진 않았다. 그 누가 평정을 지킬 수 있겠는가. 깊이 알고 지내던 지인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는데.



“....제기랄.”


바트넬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을 조사하던 일행의 눈가엔 비통함이 깃들어 있었다. 일부러 냉정한 자들만 간추려 왔기에 그나마 간신히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는 각각의 얼굴은,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즉시 폭발해버릴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그는 이미 굳어버린 후커 영감의 눈을 힘겹게 감겨주었다.


“편히 가셨소? 아직 영감님에게 귀한 술 한 잔 대접하지 못했는데...어찌 이리 급하셨소?”


가크스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얇은 핏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바트넬의 옆에 무릎 꿇고는, 짧게 망자를 위한 기도문을 읊었다.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도, 후커 영감의 눈을 덮은 바트넬의 손도, 가늘게 떨렸다.


“...유미르네가 알면 슬퍼하겠군요.”


“그렇겠지...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 어린 나이에 가엾게 됐군.”


“너무 느닷없으니 눈물도 잘 안 흐르네요.”


“아아...잠시 잊고 있었던 탓이야. 우리가 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하다는 것을.”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들 공적인 이야기는 극도로 삼갔다. 이들의 죽음이 교단과 관련됐기 때문이라고, 로샤단에게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발렌스 상회는 전멸했다. 조합장에서부터 말단 조합원까지,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큰 건수를 잡았다며 호기 있게 떠났던 사람들은, 목적지엔 도착하지도 못한 채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미처 저항할 틈도 없었다. 공포에 질려 도주하다 뒤에서부터 심장이 뚫린 이도 있었다. 검을 뽑던 자세 그대로 목이 날아간 자도 있었다. 후커 영감의 양손은 아직도 고삐를 쥔 채였다. 한칼에 한 명씩. 검상은 모두 하나씩. 정확하게 급소만 노렸다. 일격에 절명했을 것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시체를 조사하던 에비앙이 땅바닥에 떨어진 작은 휘장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말없이 그것을 주워 카토르에게 보여주었다.


“상트룸의 심볼입니다.”


카토르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 너무 착착 맞아떨어져서 오히려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상트룸 수도회의 정보력은 그리 대단치 않아. 발렌스 상회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몰랐을 거야.”


“누명을 씌우려는 게로군요. 하지만, 이 정도 정보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가 자신들의 계략을 알아챌 거란 예상도 하지 않았을까요?”


“네 말대로야. 이건 차라리 우리를 기만한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군.”


가크스와 바트넬은 시체를 마차에 싣기 시작했다. 현장을 더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상트룸의 심볼 이외엔 그 어떠한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설령 남아있다 하더라도, 발렌스 상회의 조합원들을 이런 차가운 길바닥에 계속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땅에 늘러 붙은 핏자국만이 그때 있었던 참상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사제가 그들에게 다가가 성불을 위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카토르는 애써 시신에서 눈을 돌렸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문득, 무작정 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어쩌면 도주 중인 루프리모의 아이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아야 할 텐데.

망자를 위한 기도가 끝나자, 카토르는 사제에게 말했다.


“이젠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수호기사단과 광휘의 결사를 맞붙게 할 생각입니까?”


“르휘베트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교단에도 여럿 있습니다. 수도회에도 사려 깊은 자가 존재한다면, 머지않아 서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필요한 건 머지않아가 아니라 당장입니다. 칼부림이 일어나고 나서야 타개책이 나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제는 나직이 미소 지었다. 그는 해가 기울어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란도...아니, 국왕께서 말입니까?”


카토르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 소식이 벌써 란도스의 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실낱같은 희망이 되살아난 것은 분명했다.


“국왕의 능력이라면, 일시적으로나마 싸움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둘을 중재시키기 위해 사자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과연...그거라면 확실히...하지만 어떻게 그리 빨리?”


“좋은 일에도 굳이 까닭을 물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사태해결에 주력해야 할 때입니다.


카토르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시신은 모두 마차에 실렸다. 시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출발하는 마차의 움직임이 묵직하게 전해져왔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 몸을 짓누르는 묵직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지겠지.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체를 짊어져야 할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게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람카디스가 선택한 길, 카토르가 선택한 길, 로샤단이 선택한 길. 저무는 태양이 오늘따라 유달리 붉게 느껴졌다.

옆자리에 앉은 사제가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앞날이 점점 불투명해지는군요. 우리가...막을 수 있을까요?”


따각거리는 말발굽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일행은 말이 없었다. 카토르는 문득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이런 가시밭길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가야 한다.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났다. 정말 간절히 기원하면 그것이 수정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그는 힘을 담아 말했다.


“막습니다. 모두가 포기해도, 로샤단만은.”


지금은 믿어야 할 때다. 옛날 어딘가의 언덕에서 새긴 맹세를 가슴에 품은 채로. 신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다. 그것이 카토르가 내린 답이었다.

때 이른 낙엽이 어지럽게 바람에 흩날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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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8) +2 15.04.11 979 25 19쪽
126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7) +2 15.04.11 836 28 18쪽
125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6) +1 15.04.11 838 23 21쪽
124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5) +1 15.04.11 931 29 18쪽
123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4) +3 15.04.09 1,052 33 25쪽
122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3) +3 15.04.09 973 25 19쪽
121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4 15.04.09 744 25 13쪽
12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 +1 15.04.09 1,013 25 17쪽
119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6) +3 15.04.09 940 28 16쪽
118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2 15.04.09 826 30 15쪽
117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4) +7 15.04.07 1,139 35 22쪽
116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3) +2 15.04.07 936 31 17쪽
115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2) +2 15.04.07 743 32 11쪽
114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2 15.04.07 1,032 28 18쪽
11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4) +1 15.04.07 985 28 14쪽
11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3) +4 15.04.06 991 31 15쪽
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1,000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5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2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1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4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3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3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2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4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5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7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3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70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6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5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7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3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6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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