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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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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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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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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DUMMY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디리터도, 알룬도도, 심드렁하게 있던 제리온조차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에레이시아는 비척이며 고개를 돌렸다.

루도는 신의 아이인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비단 이칼롯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전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간 로샤단은 오로지 동료의 복수, 안개송곳니의 척살을 목표로 달려왔다. 하지만 람카디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리고 안개송곳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이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데루루피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개송곳니가 그렇게 말했니? 또 무슨 말을 했니?”


“자기에게 협력하거나, 그것도 싫으면 멀리 떠나라고 하더군. 그럼 더는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면서.”


“후자는 솔깃하긴 한데...너희 성격으로 봐선 도저히 승낙할 만한 조건이 아니네. 안개송곳니는 정말 루도가 그 타협안을 수락할 거라 생각했을까?”


이칼롯은 레이시와 루도가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때 루도는 절충안을 두고 어느 정도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레이시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조차 레이시는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직후 레이시는 루도를 죽일 것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애초에 루도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면, 어째서 그는 대화를 시도한 걸까? 아예 처음 마법으로 전원을 묶어두었을 때, 그때 죽였으면 됐을 텐데 말이다. 설마 루도가 자신의 뜻에 따를 거라고 작게나마 기대했던 걸까? 그럴 리가. 이칼롯이 본 레이시는 소름끼칠 만큼 차갑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그가 말했다.


“레이시는 루도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죽일 거라고 협박했지. 그런데 거절할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가장 중요했던 건 루도의 죽음일 거야. 그리고, 만에 하나지만 루도가 자신의 제안을 승낙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했겠지.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루도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거지.”


모두가 그 말에 숨을 죽였다. 디리터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다가 자신이 내는 소리가 가장 크다는 걸 알고는 멋쩍게 기침을 했다.

방에 모인 사람들은 이걸 과연 낭보라 해야 할지, 비보라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데루루피아 역시 루도가 신의 아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제 그 성향이 어찌 됐든, 루도는 각성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됐어. 어쩌면 이미 불이 들어왔는지도 모르지만, 안개송곳니가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확실하지. 펠아람의 저주 알지? 저주의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루도야. 선대 펠아람이 건 저주니, 이번 신의 아이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받을 테니까. 어쩌면 레이시는 그대로 루도가 폭주하길 기대했을지도 몰라."


디리터가 말했다.


"뭐? 그럼 녀석들이 얻는 게..."


"많지. 안개송곳니는 브리토리스 왕국 소속이라고. 펠아람의 아이가 폭주하면 일단 리크나이츠는 쑥대밭이 될 거고, 그만큼 전쟁 준비에 착수한 브리토리스에겐 이득이 될 거야. 오히려 리크나이츠 국민들은 폭주한 신의 아이를 처리해준 브리토리스 군대를 열렬히 환영할 지도 모르지."


"누님, 그럼 루도는 정말로..."


데루루피아는 잠시 말을 끊고 다 식은 차로 목을 축였다. 그녀는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향하고 있었다.


“난 철들 무렵부터 신의 아이를 쫓아왔어. 그래서 신의 아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아반케즈는 브리토리스에, 베릴은 아스트리카에 있지. 그리고 주교님께 들었겠지만, 루프리모의 아이는 바로 니암이야.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던 게 있었어. 바로 펠아람의 아이지.”


이칼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는 자신들이 이미 아반케즈의 아이를 확보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녀석은 아마 신의 아이를 전쟁도구로 쓸 생각이겠지.

데루루피아의 얘기가 계속됐다.


“그러던 중 가린워드의 생존자에 대해 알게 되었지. 람카디스나 베른헬트 주교님은 그의 기억이 신의 아이를 찾는 데 있어 귀중한 정보가 될 거라 여겼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했어. 그가 펠아람의 아이 본인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조사했지. 루도의 행적에 대해. 그러다 람카디스에게서 듣게 되었는데, 한 번 납치된 적이 있지? 10년 전쯤.”


10년 전이라면 이칼롯과 제리온은 로샤단에 없을 때다. 멍하니 있던 디리터는 둘의 시선을 받자 떠듬거리며 말했다.


“에에, 뭐. 그런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산적이던가...인신 매매범이던가...그때 람 아저씨가 길드원들 끌고 가서 구출해왔다고 들었는데?”


그 시절 디리터는 아버지와 함께 산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왔을 때, 루도가 납치됐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어찌 됐든 돌아왔으니 된 것 아닌가?

그랬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기에 루도의 비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람카디스는 알면서도 묻어두려는 쪽이었고. 데루루피아가 말했다.


“에비앙이 내게 해준 얘기가 있어. 당시 루도는 전신타박상에 과다출혈, 팔 한쪽은 부러진 상태였고, 그 상태로 납치범과 싸우다 내장이 파열됐지. 그 정도면 죽는 게 보통이고, 살아나도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루도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 침상에서 일어나 같이 납치됐던 소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람카디스를 따라갔지. 믿을 수 있어? 전치 6주는 될 만한 부상을, 그것도 8살짜리 꼬마가.”


확실히, 그때 루도가 살아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절벽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찢어진 눈두덩에선 지혈이 되지 않아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태로 안젤리카를 업은 채 숲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루도가 신의 아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느 갑자기 병이 씻은 듯이 사라진 불치병 환자도 있는 법이고, 숨이 끊어졌다 갑자기 돌아온 사례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번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가 신의 아이라고 단정하기엔...

거기까지 생각하다 디리터는 침을 삼켰다. 안색이 바뀐 건 제리온과 이칼롯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이 아니지 않은가! 데루루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이번에는 바질리스크의 독에 맞고도 살아 있잖아? 두 번의 기적이라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단 말이야. 에레이시아, 그 독 말인데요, 중독되고 살아난 사례가 있나요?”


에레이시아는 고개를 흔들려다가,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팔을 들어 좌우로 저었다.


“전대미문. 워낙 구하기 어려운 독인 데다, 사망까지 이르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해독제도 없다고 봐야 해요. 나야 약사라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고매한 연금술사가 있다면 루도를 해부하려고 생난리를 칠 걸요.”


루도의 기이할 정도의 회복력, 그리고 독에 당하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 그것은 그저 체질이라고 치부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레이시가 말했던 가린워드 사건의 전말까지. 그가 비범한 능력을 타고났음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데루루피아는 여기에 하나의 근거를 더 추가했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건데, 루도에겐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재주가 하나 있다면서?”


디리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죽어가는 사람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 말이지? 나도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뚱딴지인가 했는데 람 아저씨가 죽을 때...”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데루루피아의 표정이 쓰라릴 정도로 침울해진 까닭이었다. 디리터는 생각 없이 떠든 자신을 책망했다.

데루루피아와 람카디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정작 본인들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지만, 누구든지 둘이 결혼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인연의 결실을 맺을 틈도 없이 람카디스는 죽어버렸다. 그의 죽음을 알고 누구보다 슬피 운 이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녀는 5년 전과 다름없이 쾌활하고 야무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일행은 비로소 그것이 꾸며낸 미소라는 걸 깨달았다. 날이 저물어서일까, 그렇게 푸르던 그녀의 머릿결이 지금은 빛바랜 담청색을 띄고 있었다.


“아...”


넋 놓고 있던 그녀는,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걸 깨닫고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조차 시릴 정도로 아파서 일행은 목이 메어왔다. 디리터가 말했다.


“누님...람 아저씨는...”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않을래? 지금은 루도에 관한 게 더 중요하잖아.”


그러자 이칼롯이 말했다.


“아니, 그걸로 충분해. 어차피 우리가 납득 못해서일 뿐, 안개송곳니가 루도를 신의 아이로 여긴다면 그에 걸맞게 대처해야겠지.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를 가린워드 마을로 불렀으면 뭔가 생각이 있어서가 아닌가?”


그는 적절히 화제를 바꿨다. 그의 말마따나 루도의 정체가 어찌 됐든 안개송곳니가 로샤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였다. 이것은 로샤단뿐 아니라, 데루루피아와 알룬도, 그리고 호위대 기사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가 말했다.


“안개송곳니는 브리토리스 왕국에 속해있는 비밀조직이야. 녀석들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킬 것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어. 일개 레인저인 너희들이 어찌해볼 일이 아니라는 거야.”


“어이, 누님. 누구처럼 텔아단으로 튀라는 소리는 하지 마.”


제리온의 농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너희들 극성은 내가 잘 아는 걸. 그러려고 했으면 굳이 이렇게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어.”


이번에는 이칼롯이 운을 뗐다. 그는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쪽이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리크나이츠도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야 하지 않나? 일단 이 사실을 왕실에 알리고, 천정기사단이든 뭐든 힘을 빌리는 거지.”


일행은 어떤 형태가 되던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안개송곳니의 목적을 알게 된 지금, 그러한 열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데루루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응,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건 베른헬트 주교님이나 내가 할 일이지, 너희가 맡을 만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루도가 있는 이상 안개송곳니는 계속 너희를 추격할 거야. 녀석들 실력 봤지? 웬만한 보병 중대 정도는 우습게 전멸시키는 자들이야. 좀 더 확실히, 너희를 보호해줄 수 있는 후원자가 필요해.”


“후원자라면...?”


안개송곳니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단체. 리크나이츠 왕국에 그런 집단이 있었던가? 이칼롯과 제리온은 각각 천정기사단과 마법 협회를 떠올렸다. 하지만 둘 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정기사단은 그 숫자는 월등하나 공적으로 움직이는 단체였고, 마법 협회는 5년 전 반란 이후로 그 규모가 비참하게 쪼그라져 있었다. 그럼 그녀는 대체 누구에게 기대라는 걸까? 데루루피아는 둘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내 고향으로 가지 않을래? 에메랄드 섬이라고, 아주 멋진 곳이야.”



***



루도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오른팔은 바람결을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왼팔도, 그리고 두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끔찍했던 고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기분 좋은 바람만이 피부에 와 닿았다.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눈동자뿐, 전신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다.

어깨를 두드리는 봄바람과 이마 위에서 부서지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요람으로 돌아간 듯한 그 아늑함. 루도는 공중에 뜬 채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호수 위에 누운 듯, 구름을 밟은 듯, 그런 달콤한 기분에 취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러한 자연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연한 빛깔의 보라색뿐. 루도는 곧 자신이 자색의 빛기둥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언젠가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을까, 분명 니암이 폭주했던 때일 것이다. 그땐 보라색이 아니라 연녹색이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아늑하고 이렇게 평화로운데.

루도는 어딘가 나른한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빛기둥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야. 이번 일로 내 영향력이 한층 더 커졌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안 죽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테니까.


-....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소리였다.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었다. 자신은 여기 누워 있는데, 또 다른 자신이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는 어째서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루도는 이내 그 사람이 입을 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줄기 너머로 그저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지만, 왠지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모르겠어. 내 의식이 커질수록 그의 것은 반대로 사라질 거야. 그래도 녀석은 또 전장을 향해 달려가겠지.


-....


-이것도 운명인 걸까? 이게 펠아람이 내린 저주일까? 아! 내가 무슨 소리를...방금 한 말은 잊어줘. 나도 참 못 났지. 람을 이어받겠다고 그토록 다짐했으면서.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의식은 뭐고, 그의 의식은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또 다른 나와 이야기하는 상대는 대체 누구일까?

루도는 실눈을 뜬 채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미안해. 너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네 친구는 내가 아니라 녀석일 텐데...


-으응, 괜찮아.


“아...!!”


루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잊을 리 없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목소리를 잊을 리 없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그 목소리. 한없이 상냥하고 아름다운 그 목소리.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걱정해주던 그 슬픈 목소리.

루도는 빛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장구를 치듯 빛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몸은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빛기둥 밖의 실루엣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둘 역시 그의 단말마를 들은 모양이었다.


-깼구나, 루도. 하지만 회복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우후후. 귀여워. 옛날이랑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윽...”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웃음을. 살짝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속삭이는 그 웃음을. 그토록 그리워했는데.

그녀는 루도를 향해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모양은 예전 요조숙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땅이 그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다.

서서히 빛이 걷히며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귀에는 작은 앵초 꽃을 꽂은 채로. 백옥같이 흰 피부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은발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안제! 안제!!”


-아이 참, 울지 마. 어쩜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니?


“으흐흐흑...미안...미안해.”


안젤리카는 그 작은 손을 뻗어 루도의 뺨을 훔쳤다. 그녀는 죽을 때와 다름 없이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포근한 미소와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도저히 죽은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루도는 안젤리카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분명 체구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클 텐데도, 루도는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거대하다고 느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것만 같은 아늑함. 안젤리카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루도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보고 싶었어, 흑. 정말...정말로...”


안젤리카는 다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고개를 드니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였다.


-나도.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이렇게 다시 봤잖니.


“안제, 나...난 죽은 거야? 그런 거야? 그게 아니면 내가 널 만날 수 있을 리가...”


-후후, 걱정하지 마, 루도. 넌 죽지 않았어. 잘 될 거야. 모든 게 잘 될 거니까.


죽지 않았다니, 그럼 이건 꿈이란 말인가? 루도는 안젤리카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를 찾았다. 그는 어느새 빛기둥에서 훌쩍 멀어져 있었다. 그는 둘에게서 등을 돌린 채, 빛기둥이 닿지 않는 곳으로 표표히 걷고 있었다. 어느새 손톱만 해질 정도로 멀어진 그의 뒷모습은 루도 자신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랏빛 기둥이 다시금 시야를 가린 것이었다.

또 다른 나.

그를 향해 무언가 외치려 하는데, 안젤리카의 양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루도가 팔이 부러져라 껴안고 있는데도 아프다거나 답답하다는 투정은 일절 부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와 닿았다. 자색의 빛이 다시 루도를 휘감기 시작했다.


-힘내. 힘내, 둘 다. 너흰 살 수 있어. 내가 언제나 지켜봐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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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999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4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1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0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3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2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2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1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3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4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6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2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69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5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4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8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4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1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6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2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5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1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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