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다음 날이 되자 루도는 급사가 알려준 의원을 찾았다. 말이 의원이지, 에레이시아의 약재상보다 규모가 작은 허름한 집이었다. 의원을 운영하는 사람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가게에는 에레이시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양의 약재가 쌓여 있었다.
루도는 그에게 프란츠의 소재를 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에서 찾아온 것이지만, 뜻밖에도 주인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프란츠? 류세프 강가에 살았던 프란츠를 말하는 건가?”
“아! 아마 맞을 거예요. 아저씨처럼 의원을 운영했던 걸로 아는데...”
주인장은 안경을 벗더니 셔츠 자락으로 쓱쓱 닦기 시작했다. 그는 루도의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어째서 젊은 소년이 과거 속의 인물을 찾는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옛 추억을 회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프란츠를 찾는다는 사람이 이 마을로 온 건가? 그를 아는 이는 이제 이곳엔 아무도 없어. 류세프 강에 있는 히단 마을이면 또 모르겠군.”
루도는 침묵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을은 한때 모든 주민이 사라지는 참사를 겪었다는 것을. 주인장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전부 다 외지 사람들이야. 토박이는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지. 지금 주민들은 모두 집이며 전답을 헐값에 제공한다기에 혹해서 모여든 사람들이야. 물론 사기를 당했다는 건 아니야. 처음에는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지만 말이지. 완벽하게 지어진 마을로 입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거든. 개간조차 할 필요가 없었어. 논이며 밭이며 모두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남이 지어놓은 집에 산다는 것은, 무언가 오묘한 기분이지.”
그는 처음 이 마을에 왔던 때를 회상하며 낮게 몸을 떨었다. 아무도 없는 마을. 그곳에서 느낀 것은 새로운 정착지에 대한 설렘이 아닌 불안감이었다.
“가격도 거저먹는 거겠다, 몸만 들어가면 되겠다, 독립을 준비하던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어. 나는 프란츠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지. 하지만 그 녀석은 거절하더라고.”
“왜죠?”
루도가 물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왠지 알 것만도 같았다.
“아내가 죽어버렸거든. 실종되었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지. 쯧쯧, 그렇게 금실이 좋더니...아내 이름이 분명...”
“이녜스 아닌가요?”
주인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다시 안경을 쓴 뒤 루도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눈앞의 젊은이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주인장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맞아! 이녜스였지. 그런데 자네가 그 이름을 어찌 아는가?”
루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 생명의 은인이거든요.”
그는 ‘그리고 저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녀의 마지막을 생각하자 다시금 코가 시큰해졌다. 루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 사람은 이제 이 부근에는 살지 않는 건가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라도...”
“글쎄...그건 잘 모르겠구먼. 그 녀석조차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프란츠는 그냥 이녜스의 채취가 남아있는 이 지역 자체가 싫다고 했었거든.”
“그런가요...”
루도는 프란츠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흐르면 분노로 바뀌는 법이니까. 굳이 람카디스와 카토르의 일지를 찾아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델키아를 떠날 작정이었다. 그가 죽으니 도시 자체가 무가치해졌다. 레인저라는 위치 또한 귀찮게 느껴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한 번 이녜스의 남편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미 떠났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가게를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가게주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이! 젊은이! 혹시 프란츠를 만나거든, 꼭 이리로 돌아오라고 전해주게. 나는 영 의사 체질이 아니라고 말이야!”
가게 밖에서는 마리네와 베리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도는 그들을 향해 애써 미소 지었다. 마리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대?”
“...아니.”
그가 어깨를 다독여주려 다가왔으나 루도는 이를 사양했다. 그는 동정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또 그 정도로 낙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약간 지쳤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 자신이 죽인 사람.
불현듯 망자의 얼굴들이 차례로 그의 기억을 스쳐갔다. 이녜스의 얼굴, 안젤리카의 얼굴, 길드원들의 얼굴, 람카디스의 얼굴.
그들은 결코 루도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주민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골목길 너머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11년. 가린워드 마을은 그때의 악몽을 전부 씻어낸 것처럼 보였다. 자신도 그럴 수 있을까? 루도는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4월 18일, 데루루피아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개인적인 볼일은 모두 마친 후였고, 일행은 소일거리나 하며 데루루피아를 기다렸다. 마을의 규모가 크지 않아 그다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상점가를 둘러보는 것도 점점 질려가고 있었다. 류이덴사를 떠난 지 일주일 째, 검을 뽑기는커녕 주먹다짐을 할 상황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포기한 것이 맞다는 제리온의 주장은 점점 더 신빙성을 얻고 있었다.
“아아~.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
마리네가 탁자에 엎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아나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날씨 좋잖아. 난 매일 이런 날씨였으면 좋겠는데.”
“내내 햇볕만 내리쬐니까 너무 건조해. 좀 시원하게 퍼부었으면 좋겠어.”
“흐응...하긴 비가 너무 안 오면 농사에도 지장이 있겠네.”
둘은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나이스는 「여행자의 요람」의 급사로 근무하는 소녀였다. 말이 급사지 아버지가 가게 주인이라 그냥 집안일을 돕는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여관은 봄철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저녁이 되어야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있는 편이지, 아침에는 늘 파리만 날렸다. 때문에 주인 내외는 낮에는 짬을 내어 감자밭을 일구러 나갔다. 그들이 나간 사이 가게는 딸인 아나이스가 지켰다.
가린워드 마을에 도착한 지 나흘, 일행은 줄곧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대련을 하거나 날을 갈러 대장간을 찾을 때를 빼면 루도는 항상 여관 홀에서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데루루피아가 언제 도착할지 몰랐으므로 그의 행동반경은 자연스레 여관 주변으로 좁혀졌다.
아나이스는 언제부터인가 루도와 마리네의 대화에 끼기 시작하여, 지금은 자연스럽게 탁자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기 또래의, 그것도 타지에서 온 소년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기 저기! 너희들 그럼 전쟁터에 나가봤어? 막 기사들이 싸우고 그런다며.”
“...아니 전쟁이 나야 뭘 참전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넌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 거야?”
“아...그런가?”
그녀는 ‘시골소녀’라는 커리어답게 무척 순진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움직일 때 항상 커다란 쟁반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다녔다. 루도가 묻자 그녀는 서빙을 하며 매일 달고 다니다가, 이제는 없으면 불안하다고 설명했다. 마리네는 그녀의 쾌활함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너도 그럼 다른 곳에서 살다 이주해온 거구나. 어때 여긴? 살 만해?”
“으응,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좋은 곳이야. 너무 한적해서 지루한 게 흠이지.”
“하하하. 그게 좋은 거지. 여긴 산도 별로 안 깊으니 늑대 나타날 걱정도 없겠네.”
“늑대? 아아, 커다란 들개 말이지? 나도 한번 보고 싶다.”
“안 보는 게 만수무강에 이롭다.”
실없는 질문과, 실없는 대답의 연속이었다. 으레 그렇듯 10대의 대화는 가볍고, 또 그래서 화기애애했다.
루도와 마리네, 아나이스의 목소리로 여관이 떠나갈 듯했지만, 여관 안에 셋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귀퉁이에는 이칼롯과 호위대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안개송곳니와 조우했을 때를 대비해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이칼롯은 마체르담의 마법 화살을 예로 들며 예상치 못한 공격방식과 마주쳤을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설명했다. 그들은 루도 쪽 테이블에 비해 훨씬 분위기도 진중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너희는 그럼 언제 떠나는 거야?”
아나이스가 찻잔을 주섬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놋쇠쟁반이 일거리를 찾자 부산하게 움직였다.
“일단 내일이 기한이긴 한데...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일단 에리 누나는 곧 떠나겠지만.”
루도가 답했다. 그러자 아나이스는 「그래?」라고 말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있어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가자 홀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쉽기는 루도와 마리네도 마찬가지였다.
“에리 누나도 이제 작별이네. 아쉽다, 그지?”
“그러게.”
둘은 마주 보며 기지개를 켰다.
에레이시아는 어젯밤 늦게 수도로 가는 차편을 확보했다. 융단을 팔러 간다는 한 상인이었는데, 꽤 커다란 마차까지 가지고 있어 이동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는 아리따운 처자가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하겠냐고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차편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떠날 때였다.
그녀의 출발시각은 내일 아침이었다. 지금 그녀는 떠나기에 앞서 간단한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가로 나가 있었다. 디리터가 그녀를 돕겠다며 따라나서자, 제리온도 바람 좀 쐰다며 밖으로 나갔다. 베리어스를 비롯한 기사 넷도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갔다. 그녀도 그녀지만, 일행도 이른 시일 안에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마리네가 창 너머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늦네. 먹을 것 사는 게 오래 걸리나?”
눈치 없는 그의 대답에 루도는 킥킥 웃었다. 하긴 그때 마리네는 자고 있었으니 모를 만도 했다.
“글쎄다, 챙겨줄 게 좀 많겠지. 이별의 징표 같은 것도 사야 할 테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쇼핑하러 갈 때 득달같이 따라간 사람이 누구겠냐?”
루도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리네가 이해를 못 하자, 그는 디리터와 에레이시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설명해주었다. 마리네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와아아! 정말?! 진짜?! 대단하다아~! 하긴, 둘이 좀 그래 보이긴 했지?”
그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루도는 그가 입방정을 떨지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절대 내색하지 마. 나도 그냥 추측일 뿐이니까. 이따가 디리터 돌아오면, 반지라든가 브로치라든가 뭐 그런 거 있는지 찾아보자고.”
마리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인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대단히 감명을 받은 듯했다. 이윽고 여관을 향하는 발자국소리가 들리자 둘은 가슴을 졸이며 기대하기 시작했다.
둘이 같이 들어올까? 아니면 따로?
루도와 마리네는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디리터와 에레이시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기대는 깨어졌다.
그들이 아니다. 그것은 디리터의 큼지막한 보폭도, 에레이시아의 종종걸음도 아니었다. 뒤꿈치를 땅에 디딘 후 조심스레 앞을 밟는, 절제된 발걸음. 굉장히 기계적인 보폭이었다. 이칼롯은 발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일찌감치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문이 열렸다.
“아, 여기인 것 같습니다. 있네요.”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약간 호리호리한 몸매에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눈이 내린 것 같은 순백의 머리칼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는 작은 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루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몸을 비키자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담 회색 망토를 두르고, 짙은 갈색 튜닉을 입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흰 머리 청년이 그에게 물었다.
“레이시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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