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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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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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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DUMMY

카토르의 연구실은 여전히 산만했다. 낡은 책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양피지 조각은 그 주변을 발 디딜 틈 없이 메운 채였다. 그가 사용하는 책상엔 마법에 사용하는 촉매들이 그득하게 쌓인 채였다. 그것은 일반 약초에서부터 희귀 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전부 값을 따지자면 집 몇 채도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음습한 지하실에 이런저런 약초까지 널려 있어, 방 안은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 람카디스는 바닥에 깔린 책들을 치워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먼지가 그득하게 쌓여 있었지만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램프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그 진중하고 엄숙한 표정은 평소 루도와 마리네를 대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카토르는 책상에 앉은 채 작은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그 두루마리에 담긴 내용은, 그가 흔히 읽는 마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왕실을 비롯해 류이너스 교단, 상트룸 수도회, 아스트리카 제국까지. 신의 아이와 관련된 모든 단체들에 관한 관계도가 빼곡하게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두루마리 가장 끝 부분에 적힌 명칭은 다른 것들과 달리 굵게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안개송곳니 암살단.


람카디스가 흔들리는 불빛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제르칸트가 보낸 정보니까 믿을 만하겠지?”


카토르는 두루마리를 다시 접고는 일지에 무언가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번졌다.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머리엔 이미 흰 머리가 희끗희끗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간 그들의 정체를 추적하기 위해 그가 벌인 수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일지를 다 적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길었지, 빌어먹을. 정말로 안개 속을 헤집는 기분이었어. 데루루피아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명칭조차 알아내지 못했을 거야.”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어. 녀석들의 규모도, 본거지도 모두 오리무중이니까.”


“그래도, 전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진 않는다는 거지. 이제 이 사실만 왕실에 알리면 즉각 전시체제에 들어설 거야. 그리고 우리도 지금까지처럼 얌전히 레인저 짓만 할 수는 없겠지.”


람카디스는 허공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들의 정체. 하지만, 그들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카토르가 말했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아. 브리토리스라니, 협곡은 아직도 결계로 막혀 있잖아? 그럼 어떻게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거지?”


“아반케즈의 아이가 있다면 굳이 협곡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길은 얼마든지 있어.”


“쳇, 거지 같군. 국왕께서 아스트리카와의 일을 잘 처리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두루마리를 펴 선을 찍찍 그었다. 어느덧 관계도는 거미줄처럼 빽빽해져, 어디가 어딜 향한 건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많은 변수. 일이 잘 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앞으로의 미래는 가시밭길일 것이다. 하지만 람카디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건 결코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거처를 옮길 때가 되었어. 안개송곳니 암살단이 우리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카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로샤단 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로샤단은 지금껏 철저하게 행동을 은폐해 왔고, 루도를 만난 후부터는 활동을 거의 중지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적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모를 거란 보장은 없었다.

5년 전 수도회와 교단이 습격당한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발렌스 상회가 궤멸된 것은 로샤단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발렌스 상회 역시 로샤단처럼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던 단체 중 하나였다. 어디서 꼬리를 밟힌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당했다면 로샤단도 안전할 순 없었다.

발각에 대한 가능성은 지난 몇 년간 람카디스가 끊임없이 고뇌해오던 문제 중의 하나였다.


“교단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놈들의 정보력은 상상을 초월해. 그들 역시 우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운이 없다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적의 움직임이 파악됐다면 행동은 빠를수록 좋았다. 하지만 논리적인 결론과는 달리, 방 안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것은 결코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루도와 마리네, 그리고 도중에 길드에 들어온 디리터, 제리온, 이칼롯까지. 그들은 로샤단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람카디스는 일부러 그들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언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 모르는 일에 애꿎은 아이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밝히고 협조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람카디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루도와 마리네는 귀여운 아들이자 제자일 뿐이었다.


“애들은...천정 기사단에 부탁할 거야. 거기엔 가이잘모가 있으니, 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람카디스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델키아를 떠나라고 하면 아이들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져 왔다. 카토르가 그의 의중을 눈치 채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녀석들에겐 끝까지 숨길 셈이야?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진실을 알게 될 때가 올 거야. 그때가 되면....”


람카디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알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녀석들은 그냥 지금까지처럼 지내면 돼. 일이 잘 풀린다면, 올해 안에는 다시 델키아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카토르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제자 떠받들기를 아주 하늘처럼 하는군. 너도 참 팔불출이야.”


“뭐, 그렇지.”


“그럼 언제 움직일 거야? 빨리 움직일수록 좋을 것 같은데.”


람카디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짐을 꾸려 떠나는 일은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일은 마리네의 생일이자 길드의 회식 날이었다. 길드원들은 내일만 기다리며 지금껏 손을 꼽아왔다. 그들의 작은 행복마저 망치고 싶진 않았다. 내일이 지나면 언제 다시 여유가 찾아올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창이 없어 바깥 풍경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그믐달이 떠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동치던 하루도 어느덧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이제 곧 날짜가 바뀔 것이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람카디스는 카토르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일단 회식은 해야지. 루도랑 마리네가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는데. 움직이는 건 며칠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카토르가 그 말을 듣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람카디스는 애들에 관한 일이라면 한없이 물렁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10년 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만, 카토르는 굳이 그를 탓하진 않았다. 가족이야말로 그를 지탱해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일 테니까. 대신 그는 혀를 차며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쯔쯔, 어련하시겠어. 홀아비가 애들 둘이나 키우느라 고생이 많지. 그럼 이주 계획은 다음 주로 잡아놓을게. 대신, 내일 음식은 확실하게 해놔. 나도 간만에 술이나 진탕 마셔볼 생각이니까.”


“하하, 맡겨둬.”


람카디스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달빛이 거실에 부서지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구름에 가린 그믐달. 달도 이제 기울었다.



***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입구에서부터 풍겨오던 향냄새도 이젠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 더 진한 피비린내가 신전 안을 덮어버린 까닭이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남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먹고살기 힘들군. 앞으로는 코를 막고 일해야겠어.”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시체로 가득했다. 사제, 복사, 신도 할 것 없이 모조리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수려하게 제작된 상트룸의 조소에는 어지럽게 피가 튀어 있었다. 그렇게 아비규환을 이루던 신전 안도 이젠 제법 조용했다. 죽은 자는 입을 놀릴 수 없어서, 산 자는 공포에 질려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갑작스런 습격에 상트룸 수도회는 변변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몇 안 되는 경비병들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미 신전 안에 남은 거라곤 수도회 대주교와 그를 보좌하는 사제들뿐이었다.

그를 피해 뒷걸음질치던 여사제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남자가 다가오자, 그녀는 경악에 찬 표정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그렇다고 서둘러 일어나 달음박질치지도 않았다. 공포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다리는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덧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명치에 칼을 겨누었다. 검에 묻은 피가 그녀의 가슴 언저리로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위태하게 흔들리던 눈물방울은, 다시 한 방울이 더해지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남자는 그녀를 응시한 채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사...살려...”


“미안.”


푹.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명치에 검을 꽂았다. 날카로운 비명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왈칵 피를 토해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대주교와 사제들은 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한 줌의 자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그의 눈은 마치 파리를 잡는 것만큼이나 무심했다.

바깥은 이미 잠잠해져 있었다. 그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움츠러들어 있던 풀벌레들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대주교를 향해 다시금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제들은 변변한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촛대며, 빗자루 등을 쥔 채 벌벌 떨 뿐이었다. 이미 도망칠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제들이 대주교를 에워싸고 있긴 했지만 그들이 남자를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는 대주교의 앞에 섰다. 쭈뼛거리고 있던 사제 중 하나가 용기를 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이야압!”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목이 날아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른 이들도 쉽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이조차 자신의 목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목이 날아간 사제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들고 있던 촛대가 맑은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으..히익..”


“오...신이시여...”


사제들은 눈앞의 광경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 남자에게 달려든다 해도 조금 전 사제와 같은 신세가 될 거란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들에게 대주교를 보호할 힘 같은 건 없었다. 그 압도적인 살인마 앞에 그들은 그저 나약한 늙은이들일 뿐이었다.

남자는 피곤한 듯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그의 검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상태였다. 그 검에 의해 몇십 명의 목숨이 날아갔고, 잠시 후면 앞에 있는 사제들의 숨통도 끊어놓을 것이었다. 조금 숨을 돌린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그렇게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상황을 즐겼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고 있자, 대주교가 사제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저항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리 무참히 살해하다니, 그들이 무슨 대죄(大罪)를 지었단 말이오!”


대주교는 이미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당당한 태도에 남자도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둘러보았다.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체의 길.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저 사람들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거야?”


“이...이 간악한 자가!”


사제 중 하나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시체가 다시 한 구 늘어났다.

대주교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이제 남자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대주교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 만들었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까지 전도질이라니, 종교인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류다.


“난 그저 의뢰받은 일을 하는 것뿐이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돈 벌기 정말 힘들거든. 탓하려면 박복한 내 생활고를 탓하라고.”


사제 중 하나가 대주교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돈? 고작 돈 때문이라고? 그런 하찮은 이유로 대주교님을 노린단 말인가!”


남자는 코웃음만 칠 뿐, 딱히 대꾸하진 않았다. 사제들의 목을 날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눈앞의 상황을 즐겼다. 사제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갔다. 겁에 질린, 그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이라니, 불쌍하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었다.

남자는 얼굴에 묻은 피를 쓰윽 훔쳤다.


“뭘 그리 기다리시나? 구원자라도 오는 건가? 아니면 댁들이 믿는 상트룸께서 친히 강림하시는 건가?”


“그...그대도 언제까지 그렇게 웃고 있진 못할 거요! 곧 있으면 광휘의 결사가 이리로 올 것이오. 신을 능멸하고, 무고한 사람들마저 학살하다니, 결코 그대를 용서하지 않을 거외다!”


“아하? 광휘의 결사 말이군? 나도 지금 소식을 하나 기다리는 중인데 말야....”


그는 싱글거리며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 개의 쇼텔(shotel)을 들고 있었는데, 그 역시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그 남자는 애꾸인지,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는 널브러진 시체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다가왔다. 그는 대주교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지만, 이내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제랄드 대장, 신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안개송곳니가 마련해 준 스크롤(Scroll) 정말 쓸모 있더군요. 이 난리를 피우는 데 아무도 모르다니.”


“오, 상트룸이시여.”


대주교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전엔 모두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하나도 남김없이?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제들의 눈동자 역시 경악에 휩싸였다. 제랄드는 그들의 질린 표정을 보며 느글거리게 웃었다. 그는 애꾸 남자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그건 그렇고, 광휘의 결사는 어떻게 되었지? 이 사제님들께서 녀석들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모양인데.”


애꾸 남자가 그제야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잊고 있었군요. 워낙 일에 몰두하다 보니,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안개송곳니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뭐라고?”


애꾸 남자는 사제들을 한번 흘겨보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대화를 들어도 되는지 걱정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제랄드의 괴팍한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 봤자 늙은이들의 명줄을 아주 약간 늘리는 데에 불과할 터였다.

사제들의 얼굴은 이미 질린 채였지만, 사람이 놀랄 길은 무궁무진한 모양이다. 애꾸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의 얼굴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광휘의 결사를 궤멸시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목표로 이동한다더군요. 뭐, 저희야 이 일만 끝나면 볼 일 없겠지만 말입니다.”


“뭐...뭣이?!”


“궤멸? 광휘의 결사가? 그...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아아!”


사제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그저 입만 벌렸다. 광휘의 결사가 궤멸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기사를 뛰어넘는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수호기사단과 맞붙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전력을 보유한 집단이었다. 물론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의 전투력은 대외적으로도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그들이 패하다니, 대체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제랄드는 사제들의 경악한 표정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렇다는데, 이젠 무얼 기다릴 거지? 정말로 상트룸이라도 나타나는 건가?”


사제들은 절망하여 하나 둘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오직 대주교만이 꼿꼿이 선 채 제랄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짧은 기도문을 읊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나, 이걸로 우리 상트룸 수도회가 끝날 거라 생각하지 마시오. 우린 그저 신을 모시는 작은 길잡이일 뿐, 수천, 수만 신도들이 각지에 퍼져 있소이다. 언젠가 그대들도 땅을 치며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오.”


“아앙?”


짧은 적막이 이어졌다. 제랄드는 멍한 표정을 한 채 대주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괴상하게 비틀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신전을 휘감았다.


“풋, 푸하하하하! 걸작이군, 정말 걸작이야!”


대주교와 사제들은 그의 반응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제랄드는 배를 움켜쥐며 겨우 웃음을 가라앉혔다. 어찌나 우스운지,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정말 이 늙은이들은 자신이 왜 여기 온 건지, 왜 사제들을 모조리 죽인 건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하핫,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었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유감이지만, 난 종교탄압 따위를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애초에 난 무신론자라고? 상트룸이든 류이너스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거지.”


“그...그럼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거요?”


“말했잖아. 사주받았다고.”


애꾸 남자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이 말이 너무 많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랄드는 그의 주의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건 그저 작은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요는 당신들이야. 대주교 나리와, 고위 사제 분들. 댁들만 사라지면, 수도회가 추진하던 신의 아이와 관련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거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정을 잃지 않던 대주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아...그럼 당신들은....당신들에게 사주했다는 이들은...!”


제랄드는 히죽 웃었다. 대주교의 반응과 비슷한 것을 예전에도 본 기억이 났다. 아마 5년 전 발렌스 상회를 습격했을 때일 거다. 그들이 상회를 습격했을 때에도, 상회 조합원들은 그들을 그저 산적 무리라고 여겼었다. 제랄드가 자신의 목적을 밝혔을 때, 후커 발렌스는 지금의 대주교처럼 놀란 눈을 부릅떴었다.


“뭐 그렇다는 거야. 나머진 저세상에서 실컷 추론해봐.”


짧은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제랄드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이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날아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애꾸 남자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딱히 불쾌함을 토로하진 않았다.

제랄드는 근처 창에 난 커튼에 검을 닦았다. 커튼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곧이어 ‘일’을 끝낸 그의 부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잔뜩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을 도륙하고, 살려달라 울부짖는 자들을 난도질했다. 단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상트룸 신전은 초토화되었다.

제랄드는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애꾸 남자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랄드는 경쾌하게 휘파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고요한 신전 안에 울려 퍼지는 휘파람 소리는 날카롭고, 오싹했다.


“리크나이츠도 이제 끝났어. 사람은 자고로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 법이거든. 자아, 안개송곳니라는 패에 내 명운을 걸어보도록 할까. 우리 아케니온 용병단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날도 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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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9) +2 15.04.11 976 25 21쪽
127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8) +2 15.04.11 979 25 19쪽
126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7) +2 15.04.11 836 28 18쪽
125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6) +1 15.04.11 838 23 21쪽
124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5) +1 15.04.11 931 29 18쪽
123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4) +3 15.04.09 1,051 33 25쪽
122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3) +3 15.04.09 973 25 19쪽
121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4 15.04.09 744 25 13쪽
12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 +1 15.04.09 1,013 25 17쪽
119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6) +3 15.04.09 940 28 16쪽
118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2 15.04.09 825 30 15쪽
117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4) +7 15.04.07 1,139 35 22쪽
116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3) +2 15.04.07 936 31 17쪽
115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2) +2 15.04.07 743 32 11쪽
114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2 15.04.07 1,032 28 18쪽
11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4) +1 15.04.07 984 28 14쪽
11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3) +4 15.04.06 991 31 15쪽
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999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4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1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0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3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3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2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1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4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4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7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2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69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6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4 34 17쪽
»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2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6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0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2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5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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