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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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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2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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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람의 계승자 - ep.3 - 모든 것은 예정대로(3)

DUMMY

흐릿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든 채, 알룬도는 그를 응시했다. 까마귀에게 파 먹힌 듯 텅 빈 눈, 썩어 문드러져 흐물거리는 살, 그리고 지독한 악취. 다시 만난 마체르담은 부패한 사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특히 목 부근이 날카롭게 베여 안쪽의 뼈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은 그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분명 그 검상은 이칼롯에게 당한 것이리라.


“끽...깍...”


마체르담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라고 칭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몇 번 턱을 흔들다가, 다시금 알룬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화살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알룬도는 쓰러지듯 몸을 숙여 이를 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정식이 아득해졌다.


“크으...”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통보다도, 가슴 속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마체르담은 죽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시체가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답은 하나다. 누군가가 그의 시신을 강제로 일으켜,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는 한 안개송곳니에서 이런 일을 벌일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안다바리엘, 이 개자식!”


안개송곳니가 벌써 이곳까지 손을 써놨을 줄이야, 엄청나게 기민한 행동력이었다. 데루루피아가 왕성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도 이제 이해가 갔다. 분명 그들에게 붙잡힌 것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알룬도는 바삐 숨을 골랐다. 멀리 병사들의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마체르담의 궁사도 문제지만 이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간 병사들에게 금세 포위될 것이 분명했다. 넓디넓은 도시는 이제 그를 잡아먹기 위한 사냥터가 되어버렸다.

마체르담의 화살이 연이어 그를 강타했지만 알룬도는 아슬아슬하게 이를 막아냈다.


“예의 마궁(魔弓)은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서글프게 됐구나, 마체르담.”


“끽, 기기기...”


알룬도는 재빨리 마체르담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쟀다. 그는 옥상 난간에 선 채였는데, 오로지 공격에만 몰두하고 있어 전신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대로 도약하여 목을 날려버리면 되겠지만 알룬도에게도 근심은 있었다. 허벅지에 화살을 맞은 탓에 그가 있는 곳까지 한 번에 접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은 것이다. 평소라면 가뿐히 뛰어넘을 거리지만 지금은 도움닫기가 안 돼 그대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찰나의 망설임 후, 알룬도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되든 안 되든, 승부를 걸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형편이었다. 예상대로 마체르담은 피할 생각도 않은 채 활시위를 당겼다.


“미안하다!”


그의 부패한 손이 시위를 놓기 직전 알룬도는 시미터를 뽑아 화살을 향해 칼집을 던졌고, 화살은 기가 막히게 칼집에 꽂혔다.


“어...어?”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화살을 막은 것까진 좋았는데, 칼집이 그 반동으로 되날아와 그의 어깨에 부딪힌 것이었다. 가뜩이나 도약 거리도 부족한 마당에 어깨를 맞자 알룬도의 자세가 크게 휘청거렸다.


“제엔자앙!!!”


본래 목적은 마체르담의 목을 베고 옥상에 착지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알룬도는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둘러 그의 어깨를 절단했으나, 추락을 피하진 못했다.

우직, 우지직. 모르긴 몰라도 나무판자 부러지는 소리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아주 잘 들렸을 것이다. 알룬도는 박살 난 오크통 위에 널브러진 채 움직임이 없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그대로 의식이 끊어진 것이다. 그의 발치엔 시미터와, 산산조각이 난 류트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진 채였다.

마체르담은 쓰러진 알룬도를 향해 재차 활을 쏘려 했는데, 왼팔이 잘린 상태라 화살을 집지 못하고 헛되이 활대만 휘저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팔이 잘렸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허우적대다가, 무언가 명령을 받은 듯 비척이며 떠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알룬도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가 떨어진 곳은 상점가 으슥한 곳에 위치한 골목이라 병사들도 쉽게 찾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당장 일어나 몸을 숨겨도 모자란 마당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으니 말이다.

안타까운 적막이 이어지고 이윽고 한 남자가 골목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경비병도, 기사도 아닌 어린 소년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소년은 쓰러진 알룬도를 발견하곤 정색하여 달려왔다.


“어, 뭐지? 이봐요?! 정신 차려요!”


하지만 알룬도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당황한 소년은 경비병을 부르려 몸을 일으키다가,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자는 생각에 알룬도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갑옷 입은 병사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분주했다.

아마 그들은 이 남자를 찾는 것이리라. 소년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두려웠지만 일단 목숨은 살리고 보자는 생각에 상처부위를 손으로 찢었다. 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옆구리와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는데,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화살촉이 몸속 깊이 파고든 모양이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급소는 비껴나간 듯해도 출혈이 계속되고 있어 이대로 있다간 쇼크사할지도 몰랐다.

무언가 붕대로 쓸 게 필요했다. 소년은 알룬도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작은 서신을 발견한 그는, 발신자란에 적힌 이름을 보고 놀라 펄쩍 뛰었다.


“어...뭐야?! 데루루피아님?!”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알룬도는 자그마한 방 침대 위에 누운 채였다. 그는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라 후다닥 방어태세를 취하려다가,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고 신음했다.


“윽...빌어먹을....”


부여잡은 상처에 두툼한 붕대가 느껴지자 그는 정색하여 상처를 훑기 시작했다. 옆구리뿐 아니라 어깨와 허벅지까지, 화살은 말끔히 뽑혔을 뿐 아니라 지혈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된 상태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감옥이 아닌 평범한 방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에 있던 소년이 방에 들어왔다.


“깨어났군요. 어때요? 몸은.”


“어? 어어...괜찮은 것 같은데...”


마치 지인을 대하는 것 같은 살가운 태도에 알룬도는 경계도 잊은 채 대답했다. 소년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허벅지랑 팔에 맞은 건 그다지 크지 않지만, 옆구리 것은 잘 모르겠네요. 화살촉을 뽑는다고 뽑았는데...제대로 됐으면 생명에 지장 없겠지만, 만약 파편이 허파를 뚫고 들어갔다면...”


“....”


제 3자가 들었으면 제법 섬뜩할 얘기였지만, 소년도 알룬도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의 응급 처치에 확신이 있는 것 같았고, 알룬도는 다른 사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방에 놓인 가구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가지는 침대맡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지만, 시미터와 류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소년이 숨긴 것이리라.

알룬도가 소년을 바라보자 그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갈색 머리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10대 남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리네를 닮았달까? 연배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너...의사냐?”


알룬도가 대뜸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마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면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물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소년은 컵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의사는 아니고, 왕립 아카데미 학생이에요. 응급처치는 신전에 있을 때 배운 거죠.”


“...그러냐...”


알룬도는 맥 빠지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하긴, 의사면 어떻고 학생이면 어떤가.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가 피곤한 듯 눈을 감자 소년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아무래도 알룬도의 행동은 그가 기대했던 거랑은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저기요, 이대로 잘 거예요?”


“응? 범죄자는 잠잘 권리도 없나...아, 그러고 보니 없던 거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제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안 궁금해요?”


“...여기가 어딘데? 아무리 봐도 죄수용 진료소는 아닌 거 같은데.”


뒤늦게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소년은 엎드려 절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을 쩝쩝 다셨다.


“여긴 아카데미 안에 있는 기숙사예요. 방은 저 혼자 쓰는 거라 누구한테 들킬 염려는 없지만, 내일 아침 점호 땐 좀 숨어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기숙사? 언제 그렇게 먼 곳까지...아니 잠깐. 너 근위대 소속 아니야?”


알룬도는 정색하여 물었다. 당연히 병사들에게 붙잡혀 호송된 거라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기숙사라니.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사실이었다.

소년은 지난 몇 시간의 기억이 떠오른 듯 몸서리치며 말했다.


“병사들 몰래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개구멍을 몇 개 알아놔서 다행이지...걸렸으면 저까지 공범으로 몰렸을 거라고요.”


“그...그래, 고맙다. 그런데 왜...?”


소년은 거실로 가더니 편지 하나를 들고 왔다. 그것은 데루루피아가 알룬도에게 준, 베른헬트 주교에게 보내는 소개장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편지의 납봉을 뜯을 것처럼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거, 당신 옷에서 찾은 거예요. 어째서 데루루피아님의 편지를 당신이 갖고 있는 거죠?”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질문에 대답부터 해요! 만약 이 편지가 빼앗은 거라면 당장 병사를 불러올 테니까.”


알룬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소년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해준 건 알겠는데, 다짜고짜 데루루피아에게 받은 편지를 추궁하다니. 그럼 소년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잠깐, 잠깐!”


알룬도는 거칠게 손사래를 쳤다. 둘 다 너무 앞서나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여 흥분을 가라앉힌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정리를 해보자. 너는 기절해 있던 나를 구해줬는데, 그 이유는 그 편지 때문인 거고, 너는 아망초양을 아는 거고...근데 너 이름이 뭐냐?”


기대했던 답이 나오지 않아 뾰로통한 얼굴이었지만, 소년은 선선이 이름을 알려주었다.


“카이안 루시올라. 왕립 아카데미 1학년생이에요.”


“아, 난 알룬도다. 카이안이라...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그러니까...”


알룬도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나가다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아픔도 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소년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다가, 다시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쳐 벽에 밀착했다. 그는 완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대며 말했다.


“네...네가 니암이냐?”


“우와아악!!”


이번에는 소년 쪽에서 도망치듯이 몸을 날렸다. 알룬도는 정신이 아득해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자신을 구해준 게 하필이면 루프리모의 아이라니.



***



레이시는 평의회 전당 중앙에 선 채 귀족들의 눈빛을 살폈다. 마치 역적을 바라보는 듯한, 혹은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 예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중앙에 선 그를 중심으로 20여 명의 고위귀족들이 원형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귀족평의회는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로 본래는 재상인 베셸리모 공작이 중앙에서 회의를 주도해야 하지만, 오늘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레이시가 그 자리를 맡았다. 물론 그게 레이시가 베셸리모 공작의 직책을 위임받아서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발베릿 공작 주도하에 열린 ‘특별’ 귀족평의회는, 마치 법원의 그것처럼 레이시를 심문하고 질타하기 위해 모여진 자리였다.

천장에 치렁치렁 달린 샹들리에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레이시는 전당 안에서 역겨울 정도의 음습함을 느꼈다. 자신을 쏘아보는 마흔 개의 눈동자들. 레이시는 결코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부귀영화에 취해, 선조들이 쌓아올린 권력에 취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자들.


“레이시 단장, 자네가 왜 여기 소환됐는지 알고 있나?”


베셸리모 공작이 말했다. 20년 가까이 브리토리스의 국정을 맡아온 그는 이미 칠십을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당당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뽐냈다. 노쇠해 움푹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레이시는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재상.”


“네 이놈! 여기가 어디 안전이라고 시치미를 떼느냐!”


베셸리모 곁에 앉아있던 귀족이 버럭 화를 냈다. 레이시는 그를 슬쩍 쳐다보았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상대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절차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찌 됐든 재상은 질문했고 자신은 대답했으니까.

레이시의 거만한 태도에 전당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귀족 사이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자 보다 못한 발베릿 공작이 귀족들을 제지했다.


“정숙! 정숙하시오!”


그가 탁자를 탕탕 두드리자 귀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레이시는 발베릿 공작에게 말없이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눈길을 돌렸다.


‘하, 차라리 욕을 하는 쪽이 낫겠는데.’


발베릿 공작은 베셸리모 공작과 함께 브리토리스를 이끄는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레이시가 안개송곳니 암살단을 결성할 때 뒤에서 후원해주었고, 그 뒤로도 재정적, 정치적 협력을 지속해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안개송곳니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그는 암살단을 자신의 사병으로 부리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시는 그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작 그따위 것에 허비하려고 만든 조직이 아니니까.


“레이시 단장. 얼마 전 내게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네.”


발베릿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상자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미 모든 귀족들이 몇 번이고 돌려본 것이기에 재차 낭송할 필요는 없었지만, 증거를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그는 편지를 들어 레이시가 잘 보이게 팔랑거렸다.


“자네 단원이던 알룬도 던워커에게서 온 것이지. 여기에는 꽤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더군.”


레이시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갔다. 편지의 내용은 읽지 않아도 훤했다. 이미 제스터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으니까. 그는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알룬도는 조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라 함은?”


“신의 아이에 대해. 그리고 로시느에 대해.”


“...제가 그 편지를 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지금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까.”


베셸리모 공작이 둘의 대화를 끊고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쓰윽 훑어보자, 백작, 후작들은 물론이고 발베릿 공작까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가 말했다.


“레이시 단장. 브리토리스 왕국은 지금까지 자네의 정보만 믿고 전쟁을 추진해왔네. 리크나이츠의 군 편재는 어떠한지, 폭풍협곡에 쳐진 결계가 언제 사라질 것인지, 아반케즈의 아이는 언제 각성할 것인지.”


“평가해주시니 송구합니다.”


베셸리모는 조금 전의 젊은 백작처럼 욕지거리를 하거나 삿대질을 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엄숙하고, 또 절도있게 말했다.


“그럼 왜 숨긴 거지? 아반케즈의 아이 또한 ‘펠아람의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으니까요.”


“...자네...평의회를 우롱할 생각인가?”


베셸리모의 목소리가 더더욱 가라앉았다. 아마 그만 아니었다면,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전부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공기가 전당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화선이 모두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텐데도, 레이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로시느는 폭주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거쳐 온 실험에서 단 한 번도 파괴적인 성향을 보인 적이 없었던 데다, 타혼(他魂)과의 동조도 뛰어납니다. 그 아이는 지금껏 기대했던 대로, 브리토리스의 통일 전쟁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겠지요.”


그러지 이번에는 발베릿 공작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예의 편지를 뒤적이며 말했다.


“레이시 단장, 우리를 두 번 실망시킬 생각인가? 알룬도가 전부 전해왔네. 결국 신의 아이라는 건 숙주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다른 영혼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펠아람의 저주는, 숙주의 상태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그 영혼을 타락시키는 거고.”


여전히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레이시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발베릿 역시 최근 안개송곳니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베셸리모야 말할 것도 없으니, 두 명의 공작에 대다수의 귀족들, 아니 높여 말하면 평의회 모두가 그를 적대하는 상황이었다.

레이시는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대체 어쩌란 말이냐.


“다시 말씀드리지만, 로시느는 폭주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녀가 없이는 대륙통일도 뭣도...”


“아니, 전쟁은 없네.”


“...잘 못 들었습니다.”


베셸리모는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는 듯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그를 따라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상! 방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이시가 힘을 주어 물었다. 그러자 베셸리모는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레이시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니 평의회가 소집되기 전부터 귀족들과 합의했던 내용을.


“아반케즈의 아이를, 저주받았을지도 모르는 자에게 국가의 명운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네. 로시느는 외딴 섬으로 유배시킬 거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말이지. 그리고 전쟁 준비는 전면 취소일세. 협곡의 결계가 사라지는 대로 리크나이츠에 사자를 보내 수교를 맺을 생각이니까.”


“...진심이십니까.”


아무리 무표정한 그라고 해도, 완벽히 감정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레이시는 그 짓눌린 목소리와 더불어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셸리모는 레이시의 태도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추가로, 안개송곳니 암살단에 무기한의 활동 금지를 명하는 바이네. 그리고 레이시 단장, 평의회를 속인 죄는 조만간 다시 벌하도록 하겠네. 그때까지 자택에서 조용히 근신하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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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2) +4 15.04.09 745 25 13쪽
120 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1) +1 15.04.09 1,013 25 17쪽
119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6) +3 15.04.09 940 28 16쪽
118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2 15.04.09 826 30 15쪽
117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4) +7 15.04.07 1,139 35 22쪽
116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3) +2 15.04.07 937 31 17쪽
115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2) +2 15.04.07 743 32 11쪽
114 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1) +2 15.04.07 1,032 28 18쪽
11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4) +1 15.04.07 985 28 14쪽
11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3) +4 15.04.06 991 31 15쪽
11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2) +1 15.04.06 987 28 15쪽
11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1) +1 15.04.06 962 27 16쪽
109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0) +1 15.04.06 1,000 27 13쪽
108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9) +2 15.04.06 895 30 12쪽
107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8) +4 15.04.06 856 28 12쪽
106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7) +3 15.04.05 986 25 12쪽
105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6) +1 15.04.05 891 28 10쪽
104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5) +1 15.04.05 882 30 11쪽
103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4) +2 15.04.05 797 30 15쪽
102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3) +4 15.04.05 987 27 13쪽
101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2) +1 15.04.05 791 29 12쪽
100 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1 15.04.05 1,026 28 12쪽
9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1) +5 15.04.04 962 33 11쪽
98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0) +3 15.04.04 941 31 14쪽
97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9) +2 15.04.04 884 25 12쪽
96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8) +1 15.04.04 1,083 25 14쪽
95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7) +1 15.04.04 976 27 15쪽
94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6) +3 15.04.04 1,018 25 15쪽
93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5) +2 15.04.03 1,139 32 11쪽
92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4) +2 15.04.03 788 28 18쪽
91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3) +2 15.04.03 940 26 13쪽
90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2) +2 15.04.03 739 29 13쪽
89 람의 계승자 - ep.3 - 펠아람의 저주(1) +2 15.04.03 1,074 31 11쪽
8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1) +2 15.04.02 963 34 11쪽
87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0) +1 15.04.02 942 33 13쪽
86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9) +2 15.04.02 1,006 33 17쪽
85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8) +1 15.04.02 915 35 15쪽
84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7) +2 15.04.02 844 34 16쪽
83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6) +2 15.04.01 1,074 31 14쪽
82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5) +1 15.04.01 1,008 37 16쪽
81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4) +3 15.04.01 1,078 33 18쪽
80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3) +1 15.04.01 1,115 36 14쪽
79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2) +2 15.04.01 916 38 19쪽
78 람의 계승자 - ep.3 - 추격자(1) +1 15.04.01 935 33 18쪽
77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6) +3 15.03.31 1,115 39 17쪽
76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5) +1 15.03.31 1,022 33 14쪽
75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4 15.03.31 1,047 33 13쪽
74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2 15.03.31 943 34 14쪽
73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2) +1 15.03.31 870 38 13쪽
72 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1) +4 15.03.31 886 34 15쪽
71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7) +7 15.03.30 1,017 43 23쪽
70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6) +4 15.03.29 891 40 16쪽
69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5) +2 15.03.29 935 34 17쪽
68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4) +1 15.03.29 1,119 35 20쪽
67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3) +1 15.03.29 1,115 32 16쪽
66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2) +2 15.03.29 1,083 38 14쪽
65 람의 계승자 - ep.3 - 어느 좋았던 봄날(1) +4 15.03.29 1,292 35 13쪽
64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完) +7 15.03.28 1,170 44 17쪽
63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8) +3 15.03.28 1,253 35 14쪽
62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7) +2 15.03.28 1,076 39 12쪽
61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6) +4 15.03.28 1,141 37 15쪽
60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5) +2 15.03.28 1,119 38 16쪽
59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2 15.03.28 1,067 34 14쪽
58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3) +2 15.03.28 1,014 35 17쪽
57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2) +3 15.03.27 1,121 39 10쪽
56 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1) +5 15.03.27 1,123 45 10쪽
55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2) +2 15.03.27 1,065 46 15쪽
54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1) +4 15.03.27 1,053 41 20쪽
53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10) +2 15.03.27 1,106 44 17쪽
52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9) +2 15.03.27 1,156 50 15쪽
51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8) +4 15.03.27 1,235 39 16쪽
50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7) +2 15.03.27 1,071 42 12쪽
49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6) +3 15.03.26 1,144 45 9쪽
48 람의 계승자 - ep.2 - 루프리모의 아이(5) +3 15.03.26 1,122 4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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