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4)
불타는 길드, 잿가루에 파묻힌 들판, 끝이 오지 않는 새벽.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은 결코 꺼질 기미가 없다. 또 그 꿈이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이 꿈이 다시금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드 건물이 불타고 모두가 죽던 그날 밤으로 - 그리고 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미르네...”
등에는 화살이 박히고, 옆구리는 갈라지고, 오른쪽 어깨는 반쯤 벌어져 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나를 미치게 하는 건 피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었다. 아니, 누군가 눈을 파버린 것인지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퀭한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원한에 가득 차 죽어갔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유미르네...흐흑, 미안해...”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 하지만 이미 시체가 된 그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또, 또다. 람카디스, 카토르, 에레이시아, 제리온, 제르칸트...그리고 이제는 유미르네까지. 내가 사랑하던 이가 또 한 번 스러져갔다. 이제 정원은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으흐흐..흐으으흐...
그러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흐느낌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웃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나.
-뒤늦은 후회, 뒤늦은 절규, 뒤늦은 좌절...흐흐...흐흐흐...
그는 어느새 내 곁에 와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는 이 꿈에서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물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꿈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바로 그였다.
“...어쩔 수 없었어. 유미르네는 카이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야.”
그러자 그의 입이 나를 집어삼킬 만한 크기로 팽창했다. 그 속에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말했다.
-나는...홀로 이 들판에 남아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지...그리고 너는 이곳에 시체를 던져놓고 사라지지...먼저 간 이들의 유해가 채 식기도 전에...유미르네...유미르네...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지?
그의 원한서린 외침이 고막을 찢고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턱이 바르르 떨렸다. 온몸에 흐르는 한기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그와 나 사이에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내 모습을 보고, 내 행동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우리는 맞닿았다.
마치 그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해? 그녀가 없었다면 카이안은 악마들에게 넘어갔을 거야. 적은 서른 명이 넘었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치명상을 입었..컥!”
그러자 그는 내 멱살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와 나는 거칠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원망스럽다...무능력한 네가...무기력한 네가...그녀가 죽어야만 했던 현실이...이 부조리한 세상이. 나는 원망스럽다.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공허한 눈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나 고통스럽고 두려운데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게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만들어낸 건 바로 나 였다.
그가 나를 붙잡자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와 대조되게 그의 몸이 차츰 팽창하기 시작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은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듯이 꿈틀거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슴에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강렬했던 슬픔과 분노가, 마침내 피가 되어 몸 밖으로 분출했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이 내 뺨 위로 부서졌다.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으흐흐...흐으...이 부조리한 세상...이 세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지. 너는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어떻게...”
-너에겐 언제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너는 그때마다 눈을 돌렸다. 자신은 고결한 인간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서...
그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흐느끼는 것 외에는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나에겐 언제나 기회가 있었다. 람을, 에레이시아를, 제리온을, 제르칸트를...그리고 유미르네를.
나에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먼저 죽였더라면.
그가 흘리는 피눈물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눈꺼풀을 가득 적신 피로 동공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팽창한 근육을 버티지 못했는지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팔이며 어깨, 목이 비틀리는 광경이 소름끼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달아나고 싶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경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피로 범벅된 입술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다르다...나에겐 그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흐흐...
번쩍. 불타는 건물 지붕에 낙뢰가 떨어진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나는 잃지 않는다. 결코 주저하지 않으리라. 너와는 달리, 그들을 위해.
얼어붙은 능선 위로 폭풍이 불기 시작한다.
-너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나? 흐흐흐...뻔한 질문이지. 사실은 너도 갈망하고 있음을 알아...자, 나를 보아라. 이 부조리한 세계를 보아라. 이제...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그러진 미소에 살의가 덧씌워진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있지 않은 곳으로, 1초라도 더 멀리. 그는 나를 쫓지 않았다. 다만 음울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내 등 뒤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소리는 환청처럼 결코 내 귓가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코 그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나와 그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야가 붉게 물들어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훔쳤다. 피가 손등을 새빨갛게 적시는 게 보였다.
어느새 나 역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으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이 해갈될 기미가 없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불로 달군 돌덩이가 몸 전체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땀 때문에 셔츠가 밀착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헉, 허억, 허억...!”
그는 의식적으로 침대 맡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갔다. 어둡고 건조한 방 안에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 남은 새벽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몸을 식혀줄 수 있는 곳으로, 좀 더 강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골목길을 걷던 그는 코너를 돌다 마주오던 순찰병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상체가 휘청거렸으나 양쪽 다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갑작스런 충돌에 순찰병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우, 놀래라. 이런 오밤중에 웬...거 앞 좀 제대로 보고 다니지 그러시오.”
“.....”
그는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을 뿐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사과의 뜻으로 짧게 묵례를 올리고서 그는 병사들을 지나쳐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그 무례한 행동에 순찰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 사과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네. 뭔가 수상한데 저거 혹시 범죄자 아냐? 어이-.”
그런데 그와 함께 걷던 상관이 그를 제지했다. 상관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놔둬. 유명인이니까. 범죄자는 더더욱 아니고.”
“엇..예에? 유명인이요? 누군데 그러십니까.”
“로샤단 알지? 레인스터에서 흑연기사단을 격퇴한.”
병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 이제 리크나이츠에서 로샤단의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역시 로샤단의 무용담에 이끌려 군에 자원한 케이스였다. 그가 말했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왜...아니, 설마 저 소년이?”
상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전입한지 얼마 안 됐으니 모르는 게 당연해. 이참에 얼굴을 익혀두라고.”
“예에...헌데 저런 앳된 소년이 그 명성 자자한 로샤단의 일원이라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루도 클로람이라는 분이신가요?”
두 사람은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상반신은 어느새 어둠에 파묻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관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사는 소년의 뒷모습을 좇다 상관이 걸어가는 걸 뒤늦게 눈치 채고는 황급히 따라붙었다. 을씨년스러운 새벽이었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고요한 거리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상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뭐, 이칼롯 제르비안이나 요즘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디리터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긴 하지. 그래도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실력도 알짜라 하더군. 나도 직접 보지 못해 확신은 못하겠는데 같이 있어 본 기사들이 그리 말하니 거짓은 아니겠지.”
“헤에~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군요. 재능이라는 걸까요?”
“글쎄...그걸 재능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여하튼 이름은 외워두라고.”
상관은 말을 꺼내기에 앞서 잠시 소년과 맞닥뜨렸을 때의 장면을 회상했다. 한 순간이지만 소년의 눈동자가 무언가에 덧씌워진 듯이 보인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그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 번 그가 떠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있던 자리에는 이미 고요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리네 캄블러란 이름이다. 잊지 않도록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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