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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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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4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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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DUMMY

회의가 끝나자 이칼롯은 가장 먼저 루도와 레미나의 소식을 다른 일행에게 전했다. 뜻하지 않은 낭보에 디리터와 마리네가 간만에 활짝 미소 지었다.


“이야아 역시 그놈은 불사신이라니까. 정말 잘 됐어.”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분위기는 금세 썰렁하게 가라앉았다. 딱히 트러블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이유를 뽑자면 마리네의 변화에 있었다.

요새로 복귀하고 나서, 정확히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나서 마리네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혼자 사색에 잠기는 시간도 많아져 한가로울 때면 늘 창가에 턱을 괴게 되었다. 그가 우수에 젖어있을 때면 이칼롯도 섣불리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아마 제르칸트의 죽음과 악마토벌 때 발생했던 민간인의 희생에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카이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병상에서 회복되자마자 혼자 있게 해달라며 방안에 틀어박혔다. 두 소년이 입을 닫아버리니 숙소는 늘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곳 마냥 공기가 무거웠다.

이렇다 보니 디리터는 대화할 상대가 없어 죽을 맛이었다. 유미르네는 낮에는 밖을 싸돌아다니고, 이칼롯은 재미가 없다. 심심하니 그림이라도 그려야겠는데, 안개송곳니 습격 때 손을 크게 다쳐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러니저러니 지루한 나날이었다.


“이 생활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봄이 오면 전쟁이 재개될 테니까 우리도 빨리 다음 수를 생각해 봐야지.”


“흐음...루도가 펠아람의 저주가 아니라니 큰 고비는 넘겼는데, 역시 레이시 그 새끼가 문제구만.”


디리터가 붕대감긴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칼롯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고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얘기인데, 디리터, 역시 너에게 부탁해야겠다.”


“응? 뭐가.”


“루프리모의 수정.”


그는 품속에서 몇 겹으로 밀봉된 가죽주머니를 꺼내 디리터에게 건넸다. 내용물은 디리터도 한 번 확인한 후였다.


“이걸 왜?”


“정전협정. 아무래도 내가 직접 사절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꽤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지.”


디리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절단이 자꾸 습격당해 곤란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갈 거면 같이 가지 왜 혼자 폼은 잡아?”


그러자 이칼롯이 카이안이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잖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카이안의 보호야. 유미르네는 자꾸 돌출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으니...역시 너와 마리네가 이곳에 있는 게 맞아.”


그는 마리네를 잠시 요양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를 전력 외라고 상정하면, 역시 디리터밖에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눈짓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통한 것인지 디리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뭐...그런데 혼자 가려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니 인원이 많을 필요는 없지만, 역시 아스트리카 지리에 밝은 사람이 하나 필요하겠지.”


이칼롯의 강행군을 따라올 수 있으면서 아스트리카 지리에 익숙한 사람, 그러면서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마침 딱 하나 있었다.



***



“직접 사절로 가겠다고? 왜지?”


“정상적인 사절단으로는 정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밀정 형식으로 직접 아스트리카 국왕을 만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흠, 그래서?”


“은밀하게 국왕을 만난다 - 라는 상황은 저희 로샤단에 현상금이 붙어있던 때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만약 지그문트 왕이 정말로 마인드컨트롤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이에 따른 적절한 대응도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안개송곳니와 교전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그 어떤 이보다 적합한 인물이라 자부합니다.”


란도스는 국가적 중요인물로 급부상한 그가 왜 굳이 이런 굳은 일에 자원하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사절 문제를 잘 처리했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칼롯의 제안에 그는 가장 먼저 죄책감부터 느꼈다.


“허허...누구도 아닌 로샤단의 대장입니다.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군요.”


지스카르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고민에 빠진 란도스를 대신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자네가 움직여준다면 우리로선 그 이상 바랄 게 없지. 그런데, 혼자 갈 생각인가? 밀정이니 따로 부대를 붙일 수는 없고.”


“네. 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대신 동행인은 미리 정해놓았습니다. 부디 허가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란도스의 눈썹이 씰룩였다.


“동행인? 로샤단이 전부 가는 게 아닌 모양이지?”


“네. 알룬도 던워커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알룬도라...”


곁에서 듣고 있던 가이잘모가 나직이 미소 지었다. 확실히 그만큼 이런 작전에 완벽히 배치되는 인재도 없었다. 능숙한 전투기술과 오랜 첩보생활로 다져진 지리정보, 그리고 안개송곳니에 대한 완벽한 이해까지. 이칼롯이 밀정 작전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알룬도의 존재가 가장 컸다.


“알룬도라면 그 데루루피아와 함께 다니는 그 청년을 말하는 건가? 안개송곳니 출신이라던.”


“네. 그라면 어떤 사람보다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칼롯이 누차 강력히 건의하다 보니 란도스도 허가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인을 고생길로 떠나보내기는 내키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이칼롯과 알룬도, 이만큼 완벽한 조합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출신인 이칼롯이라면 사절의 임무도 능숙하게 소화해낼 수 있었다.


“좋아. 허락하지. 그런데 베스티언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인가?”


이칼롯은 기다렸다는 듯이 리그니체 공국을 언급했다. 중립국인 리그니체를 경유해 아스트리카로 잠입한다는 이칼롯의 작전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거라면 가능하겠군.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는가?”


“봄이 오기 전까진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전투를 지연시키는 게 두 기사단장님의 몫이 되겠군요.”


늘 그래왔지만 이번 여정 역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봄이 오면 훼창기사단이 진격을 재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싸움을 피하려고 언젠가는 맞붙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최후의 일전이 오기 전에 정전협정서를 들고 와야만 했다. 막중한 임무였으나 이칼롯은 편하게 마음을 먹었다. 루도와 레미나도 그 험한 산맥을 등정하고 왔으니, 이 정도는 오히려 약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케이달의 푸념에 대답한 것도 긴장을 풀려는 의도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착오가 되었지만 말이다.


“리그니체 공국이라...그러고 보니 내 딸애에게 호위를 좀 붙여야 할 텐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서 걱정이로군.”


“아, 그럼 저한테 맡기시죠. 리그니체까지는 자국령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나 훗날 이칼롯은 이렇게 회고했다. 호위란 외부의 위협보다 호위 당사자를 상대하는 게 가장 힘든 법이라고.



***



라키시아를 우회해 말을 달려 리그니체 공국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아스트리카로 들어가 수도인 베스티언까지. V자로 이어지는 여로는 어림잡아도 가는 데에만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아무런 방해 없이 움직였을 때의 이야기고, 아스트리카에 들어가면 또 나름의 사정이 생길 테니 넉넉잡아 한 달 반 정도의 거리였다. 이미 1월도 중순에 접어들었으니 전쟁이 재개되는 봄까지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상당히 빡빡한 스케쥴이었다.

때문에 이칼롯은 두 연금술사 아가씨에게 다소 빨리 이동할 수도 있다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두 사람은 빨리 가면 오히려 환영이라며 그의 제안에 적극 동의했으나,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해도 한겨울의 대지는 여전히 순백색이었다. 말고삐를 열심히 흔들고 있노라면 튀어 오른 서리가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이따금 말이 길가에 비죽이 빠져나온 나뭇가지를 치고 갈 때면 참새 무리가 놀라 하늘로 날아 올랐다. 멀리 얼어붙은 강가에 한 노인이 구멍을 뚫어 낚시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드뷔사가 손을 흔들자 정겹게 받아주었다. 전시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말을 몰고서야 그날의 일정은 끝이 났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움직이는데 보낸 것이었다. 군마 중에서 가장 튼튼하다는 놈들을 골라왔는데도 너무 혹사당했기 때문인지 녀석들은 연방 숨을 푹푹 몰아쉬었다. 녹초가 되긴 두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아윽...아야야..”


엘라니가 멍이 든 엉덩이를 문지르며 귀여운 신음을 흘렸다. 승마 경험이 없는 그녀는 엉덩이와 허벅지가 배겨 울상을 지었다. 빠른 건 좋지만, 하루 종일 말을 달리는 것도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녀가 통증으로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것을 보곤 알룬도가 모포를 말아 둥그렇게 쿠션을 만들어 주었다.


“이걸 쓰라고. 많이 힘들지?”


“앗, 감사합니다!”


사교성이 좋은 그는 첫날부터 두 아가씨와 말을 터놓았다. 그는 말수가 적은 이칼롯을 대신해 어떻게든 그녀들과 친해지려고 갖가지 농담을 건넸다. 효과가 있었는지 엘라니도 그와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반면 이칼롯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특히 여행 중에는 말이 없기로 익히 잘 알려진 그는 처음 통성명을 할 때 이후론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겁 많은 소녀인 엘라니는 은연중에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봐, 이칼롯. 좀 뭔가 얘기라도 해보지그래? 아가씨들이 무서워하잖아.”


알룬도가 넌지시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칼롯은 한결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할 말이 없소.”


저녁을 먹기 전에 두 사람은 미리 여관 식당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되면 또 의외로 이칼롯은 말이 많아졌다. 그는 공과 사에 있어 언변의 변화가 극과 극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역시 지그문트 국왕도 마인드컨트롤에 걸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혹시 아는 거 없소?”


알룬도가 류트 코드를 잡다가 멈칫 손을 내려놓았다. 안개송곳니 시절 그는 직접적인 암살보다는 첩보나 연락책의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그러니 정보통인 그가 모른다면 아예 마음 편히 손 놓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마법사는 안다바리엘 뿐이었다네. 하지만 그 남자는 리크나이츠에서 주로 활동했지. 아스트리카 담당은 따로 있었어.”


“그게 누구요?”


“딱 1년 전까지만 해도 마체르담과 슈터크였어. 그런데 내가 막 안개송곳니를 나오기 전, 그러니까 로샤단 습격이 있기 며칠 전에 한 소녀가 새로 입단했지. 레이시가 자세한 내용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마체르담과 슈터크가 복귀한 것으로 보아 그 소녀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한 게 틀림없겠지.”


이칼롯이 손을 들어 잠시 알룬도를 제지했다. 안개송곳니에 또 다른 실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의아한 것은 알룬도가 그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소녀라니?


“소녀라고 했는데, 나이 어린 여자를 지칭하는 그 단어가 맞소?”


알룬도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가 잠시 끊어진 사이 여관주인의 아들이 종종걸음으로 에피타이저를 가지고 왔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며 허리를 굽히는 그 꼬마가 귀여워 알룬도는 동전 하나를 꼬마의 손에 쥐여주었다. 꼬마는 신이 나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알룬도가 말했다.


“저 꼬마보다 좀 더 어린 여자아이였지. 8살? 아니 9살쯤 됐을라나?”


이칼롯의 눈이 살짝 커졌다.


“8살? 그런 아이가 안개송곳니의 정식단원으로 있다는 말이오?”


“틀림없어. 나랑 위첼도 지금 자네보다 더 놀랐었으니까. 「세실」...성은 듣지 못했군. 레이시는 그 아이를 세실이라고 불렀지.”


이칼롯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단순히 웃어넘길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안개송곳니라고? 지금까지 일행이 마주쳤던 안개송곳니는 하나같이 ‘전투’라는 키워드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한인 고르딘과 갑옷으로 온몸을 가린 제폰, 폭발하는 화살을 날리던 마체르담, 그리고 제스터.

알룬도의 정보가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9살짜리 어린애가 뭘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여기서 딜레마에 빠지겠지만, 이칼롯은 비상식적인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겪어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세실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어렴풋이 유추해냈다.


“외형은 단순한 눈속임일 수 있소. 세실이라고 했나? 아마 악마가 아닐까...그렇게 생각하오만.”


이칼롯은 허리춤에 묶인 가죽주머니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이미 여러 번이고 일행을 구한 악마식별의 안경이 들어 있었다. 세실이 누구인지 아직까지는 모두 가정에 불과했다. 그러나 베스티언에서 마침내 그와 마주친다면, 그가 인간인지 악마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형의 존재인지는 안경이 판단해줄 것이 확실했다.



***



도중에 엘라니와 드뷔사가 내려왔기 때문에 안개송곳니에 관한 토론은 급히 마무리 지어졌다. 네 사람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늦은 저녁만찬을 즐겼다. 알룬도에게 팁을 받은 급사는 신이 났는지 주방을 오가며 분주히 요리를 날랐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렸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영양만큼은 충분히 섭취해 두는 게 좋았다. 때문에 이칼롯은 넷이 먹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양파와 후추로 간을 한 토끼구이를 시작으로 계란프라이와 블루베리잼을 듬뿍 바른 빵, 콩 요리와 더불어 복숭아 소스로 산뜻한 맛을 낸 베이컨 등이 차례로 식탁 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보글보글 끓는 민물장어 스튜가 올라오자 안 그래도 음식세례에 지쳐있던 엘라니는 손을 내저어 포기선언을 했다.

반면 이칼롯과 알룬도는 밥심으로 움직이는 남정네답게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있을 때 든든하게 먹어두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여행자의 자세다. 그들은 엘라니와 드뷔사가 일찌감치 숟가락을 내려놓자 장어스튜를 반씩 나눠 폭풍처럼 흡입했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이었다. 얼린 대추를 만지작거리던 드뷔사가 이칼롯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제르비안 경은 참 말이 없으시군요.”


정말로, 단 한 마디의 은유적 표현도 없는 돌직구였다. 곁에 앉은 엘라니는 이 계집애가 왜 군인에게 뜬금없이 시비를 거나싶어 전전긍긍했다. 당황하기는 알룬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칼롯은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이라는 호칭은 붙일 필요 없습니다. 기사가 아니니까.”


“네. 정말 말수가 적으시네요. 제르비안씨.”


이쯤 되면 명백한 도전이다. 이칼롯도 이번에는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러나싶어 잠시 눈을 깜박였다. 식탁 위에 놓인 램프가 을씨년스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제 말수가 거슬리십니까?”


“아니오. 말도 없고 표정변화도 없고 특이하신 분이다 싶어서요.”


무표정하기는 드뷔사가 절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칼롯은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이런 평가를 받는 게 한두 번도 아니기에, 그는 대충 얼버무리고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드뷔사는 아직 궁금한 게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사실 위릭 경에게 당신에 대해 조금 물어봤어요. 아, 나쁜 의도는 없었답니다. 리그니체까지 저희를 에스코트해줄 분이 어떤 사람인지 살짝 궁금해져서요.”


이칼롯은 케이달이 딸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 드뷔사가 막무가내로 물어보자 페이스가 말려 이것저것 떠들어 댔겠지. 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길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를 호위해주는 건 그저 경로가 겹쳤을 뿐이고, 그들 본연의 임무가 있으니 절대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군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드뷔사는 이칼롯의 강한 항의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제르비안씨는 지금 리크나이츠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웅이라면서요? 그럼 그 임무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거겠네요. 혹시 루도와 레미나 공주님이 엄동설한에 산을 오르내리던 것도 연관이 있나요?”


“드, 드뷔사...”


엘라니가 보다 못해 그녀를 타박했다. 그러나 드뷔사는 단지 질문하는 것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물러섬이 없었다. 한편 잠자코 있던 알룬도는 제법 놀라 이칼롯의 표정을 살폈다. 그저 있는 대로 끄집어내는 것 같았던 드뷔사의 질문이 의외로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칼롯이 어떻게 대응할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칼롯은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답변으로 그녀의 궁금증을 차단했다.


“기밀입니다.”


어쩌겠는가, 공적인 이유로 말할 수 없다는데. 연거푸 질문을 던져대던 드뷔사도 이번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기심 많은 소녀와 말수 적은 청년의 대화는 싱겁게 막을 내리는 듯 싶었으나....드뷔사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기밀사항을 더 물어보면 실례겠죠. 아, 그런데 군인들은 평소에 뭘 먹고 사나요? 육류는 따로 보급이 나오는 건가요?”


“.....”


끝없이 쏟아지는 드뷔사의 질문세례는 이후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엽차가 다 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디리터나 제리온이었다면 일찌감치 역정을 냈겠지만, 이칼롯은 또 여자에게 매몰차게 구는 성격이 아니라 그녀의 폭포수 같은 질문을 묵묵히 받아냈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에 완전히 묻혀버린 엘라니와 알룬도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구경했다.


“아아아 정말...드뷔사는 말이 너무 많은 것만 빼면 정말 좋은 아인데...저러다 제르비안씨 화라도 내면 어쩌죠?”


“왜? 잘 어울리는데. 이칼롯은 너무 심각하게 사는 게 문제라고. 아무 의미 없는 잡담도 때로는 필요한 법이지.”


알룬도는 키득거리며 찻잔을 기울였다. 이제 막 여정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스트리카의 수도 베스티언까지는 아득히 먼 거리. 신의 아이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순진한 연금술사 아가씨들과의 동행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와 음모에 찌들어 늘 심각한 표정을 달고 사는 이칼롯에게는, 의외로 드뷔사 같은 아가씨가 치료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드뷔사의 그칠 줄 모르는 질문과 이칼롯의 단답형 대답은 리그니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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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0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69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8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09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3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2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6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0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3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1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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