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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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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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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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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6.02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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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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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6)

DUMMY

「뭐, 뭣?!」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루도가 당황하여 유미르네를 밀쳐냈다. 어찌나 힘을 실었는지 유미르네는 그대로 주르륵 벽장까지 가 부딪쳤다. 그녀는 이 또한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처연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루도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 요구만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죽겠다고? 그게 네가 낸 해답이야? 멍청하긴!”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니...내가 죽으면 니암도 기뻐할 거야. 모든 원흉인 나만 사라진다면.”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힘이 빠진 그녀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질질 끌려왔다.


“웃기고 있네 진짜. 말끝마다 니암, 니암. 네 인생은 오직 동생밖에 없냐? 우리는 대체 뭔데. 나랑 마리네, 레미나! 디리터와 이칼롯! 다 팽개치고 뒈지겠다고?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내가 있으면 그 아이는 점점 나빠질 거야...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안 돼.”


철썩! 루도는 더 참지 못하고 유미르네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목이 크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고개를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루도는 억지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그래. 네 덕분에 지금 카이안이 그 모양 그 꼴이 났지. 일을 저질렀으니 직접 책임을 지란 말이다!”


“...책임?”


“카이안과의 관계를 네 힘으로 되돌려놔.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우리도 그랬으니 너도 할 수 있어. 카이안이 네 진심을 알아줄 때까지 노력해봐. 그럼 그때 가서 네가 친누나임을 당당히 밝히면 돼.”


“으흐흑...아으....”


유미르네는 다시금 감정이 복받쳤는지 바닥에 엎드린 채 구슬프게 흐느꼈다. 루도는 그런 그녀를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여린 성격이었는지 이제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루도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운이 빠진 그녀는 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제오프가 말했다.


「나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거잖아. 일단 기운부터 차리게 해야지.」


“아차, 그랬지. 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루도는 급한 대로 밖에 나가 잘게 부순 감자 샐러드와 물을 가져왔다. 유미르네는 의외로 새끼고양이처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든 잔을 건네기 직전 루도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주지시켰다.


“이걸 받으면 앞으로 내 말대로 하는 거야. 죽는다느니 그런 개소리 하지 말고. 알았어?”


하지만 여전히 유미르네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물속에 비친 자신이 경멸스러워 의식적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니암은 죽어도...그래. 말 그대로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까고 있네. 니암은 몰라도 카이안 루시올라는 너보다 내가 잘 알아. 그 녀석은 그렇게 속 좁은 성격이 아니야. 차근차근 노력하면 반드시 너에 대한 평가도 바뀔 거야.”


루도는 억지로 그녀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유미르네는 잔을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마치 뜨거운 수프라도 먹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텅 빈 식도로 차갑게 식은 물이 흘러내려왔다. 그 청량감에 유미르네는 다시 한 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루도가 그 모습을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이제까지 울음 참느라 힘들어서 어쨌냐. 레미나도 저리가라구만.”



********



마르테너스로 집결했던 리크나이츠 연합군은 정전협정이 맺어지자 다시 한 번 재편성을 가졌다. 우선 가이잘모가 이끄는 천정기사단은 흑연기사단과 혹시 모르는 레오문드의 변심을 견제하기 위해 남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쳤다. 반면 케이달이 이끄는 왕실기사단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레인스터에 자리를 틀었다. 이는 남하하는 브리토리스 군대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브리토리스가 진군한다는 정보를 아는 이는 기사단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반병사는 물론 하급장교들까지도 자신들이 왜 아무것도 없는 북부로 움직여야 하는지 몰랐다. 이미 평정이 끝난 레인스터는 전선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도시였다.


“아, 쌀쌀하군. 역시 북부는 좀 추운데.”


“이 계절에도 가끔 눈이 내린다고 하니 말 다했지. 이거 뭐 산이랑 나무밖에 없는데 무슨 정찰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네.”


선봉에 선 병사가 옷깃을 여미며 투덜거렸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로 카잘산맥 근방을 살피러 온 정찰대였다. 숨을 내쉬자 부연 입김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봄의 아지랑이가 무색하게 카잘산맥의 봉우리는 여전히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세 번째 지점까지 완료. 수상한 낌새 전혀 없음. 이거야 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정찰대는 적당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지도에 정찰을 완료했다는 표식을 남겼다. 제법 넓게 펼쳐진 들판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물결치는 게 전부였다. 정찰대장은 쓰게 입술을 핥았다. 명을 받았으니 군소리 없이 수행하고는 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시간낭비였다. 이 험준한 땅을 대체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빨리 부대로 복귀해 뜨거운 거나 한잔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후미에 있던 병사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어? 저게 뭐지?”


정찰대의 시선이 일제히 병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산양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인지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커다란 눈망울이 정찰대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볍게 생각하면 초식동물로서 당연한 행동이지만 정찰대는 방심하지 않았다.


“비트렌, 석궁 장전해라. 한 방에 끝내자.”


허황된 소문이라 치부하고는 있으나 얼마 전 맹수부대에게 습격당했다는 왕실기사단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침 정찰대 내에는 북부출신의 레인저도 섞여 있었다. 그는 석궁에 작살형 볼트를 재며 말했다.


“전혀 겁을 먹지 않는군요. 게다가 제 석궁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무기를 인식한다고? 산양이라는 게 그렇게 영리한 동물인가?”


“글쎄요. 저도 좀 의아하긴 합니다. 애초에 서식지가 이런 낮은 지대가 아닌 걸로 아는데.”


비트렌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석궁을 조준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표적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실패할리는 없었다. 그렇게 막 격발하려던 참이었다.


“....어라?”


산양의 바로 옆 덤불 속에서 노루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뒤 나무에서 여우가, 바위 너머로 순록이, 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곳곳에서 출몰했다. 삽시간에 백 단위까지 불어난 녀석들의 시선은 소름끼치도록 정찰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 대장님. 이거 예감이 안 좋은데요.”


정찰대장은 빠르게 반응했다. 한가롭게 사냥이나 하고 있을 분위기가 아니다. 이건 명백하게 매복이었다. 예의 소문이 사실이라고 판단하자마자 그는 지체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당장 부대로 복귀한다. 전원 현 위치에서 전력으로 이탈하라. 이랴아!”


정찰대의 행동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그들’과 마주쳤을 때 다소의 시간을 허비한 것, 그리고 그들의 전투방식을 접해보지 못한 게 불운이었다.

콰드드득! 거대한 지렁이가 정찰대의 후미에 솟구쳐 올랐다. 녀석은 병사 하나를 말과 함께 집어삼키고는 땅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으악?! 저게, 저게 뭐야!”


“뒤돌아보지 마라! 달아나는 데만 집중해!”


“씨발 저게 뭐야, 저게 대체 뭐냐고!”


말이 가속도를 붙일 틈도 없이 지렁이가 재차 솟구쳤다.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정찰대장은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 진형이고 뭐고 없이 막무가내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그에게는 겁에 질린 부하들을 진정시킬 수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뒤통수에 후끈한 바람이 불어온 것은 그때였다.


“헉...?”


사위가 돌연 어두워진다고 느꼈을 땐 이미 그것이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정찰대가 아무리 말을 채찍질한다한들 그 거대한 날갯짓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쿠우웅...! 드레이크의 발톱이 지면을 짓찢었다. 착지의 충격으로 주변의 들풀이 뿌리 채로 뽑혀 허공에 흩날렸다. 말들은 갑자기 경로가 가로막히자 혼비백산하여 자리에 멈춰 섰다. 병사들은 말을 진정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드레이크의 위용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크와와와왁!”


드레이크가 길게 포효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모조리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정찰대장은 멍한 얼굴로 주변의 상황을 확인했다. 드레이크가 도주로를 차단한 덕에 정찰대는 완벽하게 발이 묶였다. 그사이 다른 짐승들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말들은 겁에 질려 거칠게 투레질을 해댔다. 병사들은 아예 넋이 나가 오줌을 지리는 자도 있었다.

완벽하게 포위됐다.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정찰대장은 쭈뼛거리며 손에 쥐인 검을 응시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항복해야 한다. 그러면 포로가 되더라도 최소한 목숨은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드레이크가 힘껏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바스러진 풀잎조각이 요동치며 녀석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찰대장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목에 가져갔다.


“아루시여,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정찰대의 행방불명 소식이 마르테너스로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



그날 이후로 유미르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애용하던 검은색 가죽 블라우스와 혁대 대신 흰 천옷을 입고 빨래바구니를 들었다. 몸매가 드러나던 바지의 자리는 풍성한 치마가 차지했다. 머리에는 보닛을 두르고 언제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행여 다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칠라하면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농염한 자태로 추파를 던지던 그녀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소심하게 길 가장자리로 걷는 아낙네의 정체가 그 유명한 로샤단의 까마귀임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혹 알아도 그저 닮은 사람이라고만 여기는 데 그쳤다. 그만큼 과거의 유미르네는 평범한 부녀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기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유미르네는 날붙이 비슷한 것도 손에 대지 않았다. 목숨처럼 아끼던 에스터크와 숏소드는 다락 한구석에 처박았다.

너무 유난떠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그녀는 진심이었다. 오히려 루도가 장난으로 검을 뽑아 보여주자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 그렇게까지 놀랄 정도야?”


루도가 멋쩍게 검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실전에서 보여주었던 거짓말 같은 검술이 여전히 그의 기억에도 남아있었다. 그녀의 변화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그이지만 그 폭이 너무 커서 오히려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유미르네는 안쓰러울 정도로 어깨를 떨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절대 검을 잡지 않을 거야. 날붙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가가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루도는 더는 그런 장난을 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유미르네는 요새 밖의 세탁소에 틀어박혀 온종일 세탁에 몰두했다. 병사들의 더러워진 속옷이며 코트가 하루에도 수백 벌씩 들어왔기 때문에 일감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지위나 재산을 생각하면 세탁소의 수입 따위 어린애 용돈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과거의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 그러면서 너무 바빠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세탁소든 푸줏간이든 탁아소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양잿물 냄새로 가득한 세탁소에서의 나날이 이어졌다. 틈틈이 루도가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러 들렀으나 유미르네는 그마저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수치스럽게 여겨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려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언제 카이안에게 말할 건데?”


루도는 유미르네의 자기혐오가 자칫 자폐증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유미르네는 한참 동안이나 세탁물을 주무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일...쯤 가보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혹시 무서우면 같이 가줄까?”


“아니야...나 혼자 갈게.”


루도는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잠자코 그녀의 의견에 따랐다. 다음날 유미르네는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카이안을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빈민촌 골목에 머물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었다. 늘 그렇듯 골목 안쪽은 난민들이 처량하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유미르네가 그곳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집중됐다. 그러나 이는 이전번의 경우와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전의 시선이 지위 높은 군인을 바라보는 동경과 부러움이라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백의의 구호대원이라도 보는 것처럼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입은 순백의 치마는 진흙과 오물로 가득 찬 거리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막 구름을 뚫고 움트기 시작한 햇살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수녀님, 꽃 한 송이 사주세요. 아주 예뻐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그녀에게 들꽃 뭉치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녀의 복장이나 가라앉은 분위기 탓에 수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유미르네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반응이었다.


“이, 이거면 되니? 꽃은 네가 가지렴.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단순히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그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난민들은 삽시간에 그녀를 둘러싸고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수녀님, 한 푼만 주십쇼.”


“도와주세요 아씨...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들놈이 괴질에 걸려 오늘내일 하고 있습니다. 부디 류이너스의 가호를...”


그녀는 인파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큰소리로 위협하는 것조차 지금의 그녀에겐 버거웠다. 해결법은 결국 돈이었는데,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소란은 카이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탕약을 짓던 것도 놔두고 서둘러 인파가 몰린 곳으로 향했다. 과격해진 난민들이 자칫 동냥하러 온 이를 습격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그게 여자라면 무법지대인 이곳에서 어떤 험한 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벌써 40명 가까운 난민들이 꾸역꾸역 파고드는 중이었다.

카이안은 챙겨온 피리를 힘껏 불었다. 그 날카로운 음향에 난민들의 주의가 일순 그에게 집중됐다.


“아. 루시올라님.”


“뭐하는 겁니까 이게. 모두 해산하세요.”


난민들은 카이안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들은 쭈뼛거리면서도 하나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인파에 가려져 있던 동냥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자 카이안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어찌나 차갑고 매몰찬 시선인지! 유미르네는 그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수천 번이고 연습했던 대사는 이미 백지장이 되어버린 뒤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것이 남매로서의 첫 만남이었다.


“아, 안녕...?”


어색한 인사.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수도 없이 남자를 상대해온 그녀건만 여기서는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카이안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유미르네는 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건강...건강해 보이네. 밥은 먹었니?”


카이안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는 경멸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 이건 또 무슨 촌극이지? 어울리지 않는 옷까지 걸치고는. 그게 요즘 살인마가 즐겨 입는 패션인가?”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카이안은 이전보다 훨씬 표독스러워져 있었다. 그는 유미르네를 못 견딜 만큼 혐오했다. 일평생 꺼내본 적이 없는 촌철살인이 그녀만 앞에 있으면 술술 잘도 나왔다.

유미르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런 반응이 오리라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카이안에게 폭언을 듣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목이 메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네게 못할 짓을 했어.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오늘은 그냥 사과하려고 온 거야. 너에게.”


“사과라. 당신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이제 와서 루프리모가 두려워지기라도 한 건가? 난 받아줄 마음이 없는데.”


“용서해달라고는...하지 않을게. 그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미안해.”


그러자 카이안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작은 소년이 뿜어내는 살기가 어찌나 형형한지 주위에 있던 난민들이 모두 겁에 질려 물러날 정도였다. 유미르네는 살기에 짓눌려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카이안이 밟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카이안은 손에 쥐고 있던 피리를 있는 힘껏 던졌다. 모서리 부분이 유미르네의 이마를 정통으로 찧었고, 곧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아픈 시늉도 내지 않았다. 피가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려도 닦아내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저자세로 나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카이안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에 말했을 텐데. 내 눈에 띄지 말라고. 그럼에도 다시 튀어나오다니, 내가 그렇게나 우스운 거야?”


유미르네가 처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그건 아니야. 난 단지...”


“듣기 싫어! 당신 같은 쓰레기가 세상에 도움이 될 방법은 하나야. 사과하고 싶다고? 그럼 성의를 보여봐.”


“성의...라면...”


소리치는 카이안의 얼굴은 흡사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는 유미르네에게 다가가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실어서. 그것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줘. 영원히.”


장막이 걷힌 세상은 잔인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진실은 거대한 거울이 되어 그녀를 둘러싼 채로 끊임없이 달아나려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보아라, 네가 저지른 짓을. 보아라, 네 추악한 모습을.

입술에 닿는 피맛이 비릿했다. 꽃을 팔던 소녀가 뒤늦게 헝겊을 건넸으나 그녀는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유미르네는 포기하지 않고 카이안을 찾아갔다. 루도가 말했듯이 계속 눈을 마주치고 진심을 전한다면 언젠가는 그가 마음을 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안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하는 경멸의 언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히려 폭언을 퍼부어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다른 음험한 꿍꿍이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미르네는 카이안을 만나러 가지 않을 때에는 하루 종일 세탁소에 머물렀다. 가끔 화덕에 들러 빵을 굽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카이안에게 줄 선물로 만든 것이지 그녀 자신은 거의 먹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아 그녀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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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8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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