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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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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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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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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3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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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DUMMY

만약 그녀가 암살자와...손을 잡은 것이라면?

카이안은 여전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현재의 정보를 토대로 피아를 판별해야 한다면, 적어도 유미르네가 아군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여자의 발걸음은 마치 빙판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15m 정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암기를 던져 디리터를 괴롭혔다. 그가 접근하면 아예 달음박질쳐 거리를 벌렸고, 그가 걸음을 멈추면 다시 등을 돌려 나이프를 던져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물적이든 심적이든 디리터가 받는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간 계속 뭔가 날아오니,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체력싸움인데, 한밤중의 추격전은 쉬이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제엔자앙! 잡히기만 해봐, 오르타 슈터크!”


한편 초조하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암습 때 이마를 꿰뚫려 죽었을 텐데, 벌써 몇 번이고 암기를 던진 상황인데도 디리터는 이를 전부 막아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동체시력인지, 그는 그녀의 나이프가 허공에 흩뿌려지기도 전에 귀신같이 무기로 몸을 보호했다.

슬슬 가져온 암기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육중한 대검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일 자신은 없으니, 암기가 떨어지는 시점이 ‘진짜’ 달아나야 할 마지막 찬스라고 봐야 했다. 그녀는 다시 나이프를 던지는 한편 눈을 굴려 위치를 확인했다. 작전을 실행한지는 3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꽤 멀리까지 나온 느낌이었다. 이는 그만큼 디리터의 추격이 그녀를 압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원래는 실컷 가지고 놀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호호호...그렇게 노려보지 마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가자고요.”


그녀는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디리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임무는 최대한 그의 발목을 붙잡아놓는 것이니, 1초라도 공격을 늦출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공격해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그는 상대가 등을 돌리면 그대로 도약해 찍을 생각으로 발목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들이 대치하는 사이 뒤따라오던 기사 둘이 디리터의 뒤로 따라붙었다.


“항복해라...고 해봤자 안 듣겠지? 안개송곳니니까.”


“어머, 대화라면 진지하게 고려할 의사가 있는데요.”


디리터는 이미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알룬도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슈터크는 제스터 다음가는 암살자로, 잠입에 능하고 각종 투척무기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꿍꿍이였다. 이 시점에서 디리터는 아케니온의 존재와 유미르네와 레이시의 유착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그녀가 승산 없는 기습을 택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알룬도의 요청이 있으니 일단 권유는 해보겠어. 투항해.”


그러자 슈터크는 어둠 속에서 생긋 미소 지었다.


“알룬도라...그리운 이름이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말 돌리지 말고 투항할 건지 아닌지나 말해.”


“뭐가 그리 급해요?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숨도 찬데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죠.”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지르고 있었다. 알룬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덕분에 이렇게 거저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운이 좋다면 지금쯤 아군이 카이안의 목을 땄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디리터는 여전히 카이안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를 향한 과도한 집중력이 본연의 임무조차 잊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슈터크의 집요한 공격이 그의 사고를 마비시켜버린 탓인지도 몰랐다.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슈터크는 이대로 몇 분이고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려하지 못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디리터의 말도 안 되는 청각이었다. 이미 숙소와는 수백m나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디리터는 아련히 들려오는 카이안의 비명에 눈을 크게 떴다. 환청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카이안은, 누군가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굳어있던 그의 사고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


디리터 이 멍청한 놈! 이 먼 곳까지 뛰쳐나와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머리가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네 임무는 카이안을 지키는 거지, 안개송곳니를 붙잡는 게 아니지 않냐. 머리가 식자 눈덩이처럼 불어난 자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칼롯, 아니 루도나 마리네라도 함께 있었더라면 이따위 실책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1초라도 빨리 카이안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내디딘 오른발에 모든 무게를 집중했다. 흙바닥이 움푹 패어 들어갈 정도로 그가 응축하는 무게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갑자기 팽창한 살기에 슈터크도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앞으로 튀어 나가는 디리터의 도약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거대한 투핸드소드의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슈터크의 시야를 뒤덮었다.


“..큭?!”


디리터의 필살기라고 해도 좋은, 강맹한 회전 횡베기였다. 특유의 완력에 상체를 비트는 원심력을 더하고, 여기에 육중한 투핸드소드의 무게까지 추가한 위력은 ‘막아서’ 상쇄할만한 수준이 결코 아니다. 이전 라키시아의 일전에서는 그 고르딘까지 날려버렸던 일격이다. 근접무기라곤 짧은 망고슈가 전부인 슈터크가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검의 궤도는 허벅지 아래에서부터 대각선 위로 비스듬히 치고 올라와 회피하기에도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쿠와아-!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마치 폭포수 같았다. 허리가 동강나기 직전, 슈터크는 방어를 포기하고 상체를 뒤로 젖혀 아예 바닥에 납작 쓰러졌다. 콧잔등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검의 궤적에 순간 주마등이 보일 정도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자마자 그녀는 황급히 공중제비를 돌아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디리터는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카이아아안!!”


그는 검을 물리고는 곧장 뒤를 돌아 쏜살같이 자리를 이탈했다. 여기까지의 동작이 차라리 처음부터 후퇴를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끄러웠기 때문에, 그녀도 어안이 벙벙해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 어라?”


뒤늦게 따라가려고 자세를 잡았으나 조금 전의 공격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온 기사 둘이 길을 막아서자, 아무리 그녀라도 디리터를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어떻게 알았지? 좀 더 붙잡아놔야 하는데...그렇다고 싸울 수는 없고...아악, 내가 미쳐 정말!”


4인의 안개송곳니와 11인의 아케니온, 그리고 디리터와 유미르네. 서로의 원한이 얽히고설킨 이 난전은 어느새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안개송곳니는 이제 3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디리터를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것인지, 슈터크는 추격할 의지도 잃은 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기사들이 황급히 뒤를 쫓았으나 무거운 갑옷을 걸친 그들은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


“캬하하하, 하하하!”


그녀의 망토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순백의 궤적이 대여섯 번씩 허공을 수놓았다. 그녀의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카칵, 카칵 하고 칼 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맹수와 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뭐냔...”


유미르네의 미칠 듯한 연격에 제랄드와 게네스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2:1인데도 공격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제랄드는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란 말인가. 그 역시 용병으로 살며 수많은 사선을 거쳐 왔지만 이런 수준의 검사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냥 너무 빠르다. 이도류로 펼쳐지는 그녀의 검무를 받아내고 있노라면 자신이 무슨 푸줏간의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눈앞의 여자가 왜 저리 강한 것인지, 왜 저런 고수가 이제껏 나타나지 않았던 것인지, 그리고 왜 미친년처럼 자신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도. 그때 제랄드의 귓가에 카이안의 한 마디가 꽂혔다.


“유미르네...당신...”


유미르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처럼 멍청하지 않았던 그는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크아아압!”


쩌엉! 양손으로 휘두른 그의 반격에 유미르네도 잠시 몸을 물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촌음의 여유가 생기자 제랄드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생각났어. 유미르네, 유미르네 발렌스. 발렌스 상회의 그 마지막 생존자로군?”


“.....”


“나는 분명 죽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그 돼지가 이렇게 돌아와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거지? 군터, 블라키.”


그에게 호명당한 두 사람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제랄드의 분노는 안개송곳니에게서 유미르네로, 그리고 다시 군터와 블라키에게로 옮겨갔다. 당장 두 얼간이를 족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제랄드도 이번만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유미르네 발렌스, 그녀는 대책이 없었다. 그 엄청난 실력도 그렇지만, ‘발렌스’라는 성부터가 이미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무력으로도 밀리고, 대화로서는 더더욱 가능성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반쯤 광기에 젖어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루프리모의 아이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정면의 미친 여자는 신의 아이를 인질로 잡아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아케니온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진형 자체도 포위된 형국인데다, 몇몇은 카이안을 지키고, 또 몇몇은 맞닿은 적을 상대하느라 원호도 엉망이었다. 신의 아이를 붙잡아 최후의 한 수를 노려보려 한 것인데, 이대로는 그를 이용할 틈도 없이 이쪽이 전멸해버릴 판이었다.

후퇴. 비통하지만 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자리를 이탈할 경우 아케니온은 어느 세력에도 기댈 곳이 없는 유랑민 신세가 되어버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 미친 여자에게 개죽음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제랄드는 유미르네의 공격을 받아내다가, 기회를 봐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당연히 유미르네는 그를 추격해왔다. 달아난다면 우선은 그녀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제랄드는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대장이 달아나자 몇몇은 잽싸게 그를 따라왔고, 또 몇몇은 이전에 내린 명령(카이안을 지키는)은 어떻게 해야 하나싶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랄드는 마침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군터를 향해 말했다.


“군터, 네가 우리의 후위를 맡아줘야겠다.”


“에....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제랄드가 그의 정강이를 가볍게 베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크악...대, 대장?”


“네가 뿌린 씨앗이니 한 번 잘 거두어봐라.”


군터는 비명을 지르며 멀어져가는 동료들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다친 다리로는 힘겹게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제랄드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다. 어느새 접근해 온 유미르네가 그를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채앵! 군터는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자 유미르네는 내찌른 검을 축으로 삼아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양 허벅지로 군터의 목을 감싸며 내려왔다. 바닥에 쓰러진 군터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광소하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미르네의 얼굴이었다.


“신세가 참 처량해졌네? 군터.”


사실 그녀의 기량을 생각하면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과거 그녀를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긴 장본인이었다. 제랄드도 중요하지만, 그 역시 유미르네의 살생부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운해하지 마. 아무도 도망 못 가니까. 킥킥킥, 아케니온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잠깐 기...”


채 목숨을 구걸하기도 전에 그녀는 군터의 목에 에스터크를 꽂았다. 기괴한 비명과 함께 군터의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크에.....히.”


유미르네는 몸부림치는 그를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구멍을 뚫었으니 수십 초에서 길게는 1분가량 괴로워하다 죽게 될 것이다. 군터가 피거품을 물며 발목을 붙잡았으나 그녀는 가볍게 뿌리쳤다. 아케니온에게는 편한 죽음마저도 허락해줄 수 없었다.

한편 그녀가 벌이는 참극은 카이안은 물론, 두 명의 안개송곳니도 목적을 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카이안은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그녀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군터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유미르네는 힐끗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


대화는 없었으나 주고받은 메시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분노로 카이안의 턱이 덜덜 떨렸다. 유미르네는 그런 그를 보며 키득 미소 지었다.


잘 해보라고, 꼬마.


그를 홀로 남겨두고서, 유미르네는 달아난 아케니온을 쫓아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녀와 아케니온이 떠나가고 나자 건물에는 카이안과 안개송곳니밖에 남지 않았다.


“으, 으앗!”


두 명의 암살자가 다시 카이안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미르네의 변절이 분했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카이안은 석궁을 가진 암살자가 볼트를 장전하는 사이 재빨리 뒤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원래 예배실로 사용하던 꽤 넓은 크기의 홀이었다. 무작정 달리는 와중에 의자가 발에 채여 시끌벅적한 소리를 냈다.

방해꾼이 전부 사라지자 암살자들은 느긋하게 그를 따라왔다. 석궁을 든 암살자는 아예 변수가 생기지 않게 홀 문을 막아섰다. 카이안은 창문에서라도 뛰어내리려 했으나 곧 창가에 비친 실루엣을 발견하고 기겁하여 물러나야 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또 하나의 안개송곳니였다.


“왜, 이 높이에서 뛰기라도 하려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자 카이안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한다니. 자신을 둘러싼,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모르는 그 비밀이라는 작자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왜...”


“별거 없어. 네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


마치 카이안의 절규를 기다렸다는 듯이 석궁을 든 암살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카이안은 기가 막혔다. 누가? 왜? 6년 전 레인스터의 참극이 그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이제 이유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카이안은 누군가가, 자신을 열렬히 증오한다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일평생 선(善)을 베풀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건만.


“자아, 이제 죽어다오. 너만 죽으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야.”


카이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그가 끄집어낸 감정은 아주 작은, 그러면서 또 아주 순수한 ‘분노’였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 일색으로 나아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래도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신이 틀렸던 모양이다. 그래, 유미르네 발렌스. 그 여자야말로 악의 표본이었다. 그 여자만 없었다면, 그 여자만 배제했더라면.


“아쉽군. 그 로샤단의 대장이라는 자와 싸워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언제고 다시 온다. 그때가 오면 텔슈피드의 주인은 내가 되겠지.”


암살자들은 제법 여유까지 부렸다. 워낙 상황 자체가 압도적인지라 서두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가 태만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도끼를 든 남자가 그 길쭉한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걸어왔다. 카이안은 이제 달아날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영광스럽군. 나는 이제 신을 죽인 남자가 되는 거야.”


‘뭐?’


분노로 마비되어 있던 카이안의 이성을 환기시킨 것은 암살자가 내뱉은 ‘신’이라는 한 마디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카이안이 유미르네의 문제를 잊게 만들었다.

문이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콰자작. 예리한 일도양단과는 거리가 먼,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내리는 일격이었다. 목조문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고, 문에 기대어 있던 남자 역시 같은 신세가 되었다. 시야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허공으로 솟구치는 남자의 상체는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나뭇조각 위로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는지라 남자는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이게 무슨...!”


나머지 두 명의 안개송곳니는 그 강렬한 임팩트에 질려 잠시 행동을 머뭇거리는 실수를 범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거대한 투핸드소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박력이 넘쳐흘렀다.


“카이안!!”


디리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숙소까지 전력으로 뛰어온 데다 기습 직전에 숨을 참았던 탓에 그의 이마엔 시퍼런 핏줄이 돋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말 것도 없이 그는 곧장 카이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디리터의 신속한 접근에 도끼를 든 남자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카이안부터 죽일 것인지, 아니면 방해꾼부터 처리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사이 디리터의 검이 날아들었고, 남자는 허겁지겁 방어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검과 도끼가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디리터는 공세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의 몸이 카이안을 가리도록 최대한 위치를 수정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생각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상대 역시 내로라하는 고수인 데다, 장거리를 전력으로 주파하느라 디리터의 체력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상대도 그걸 알았는지 곧장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디리터는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남자의 도끼세례를 받아내야만 했다.


“슈터크를 뿌리치고 온 건가? 하지만 그 운도 여기서 끝이다.”


검과 도끼가 맞부딪히는 소리로 귀가 먹먹해져 왔다. 디리터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한 번 밀리기 시작하자 자세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게다가 주변에 흐트러져있는 의자도 그의 디딤발을 꼬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사이 창문으로 들어온 남자가 단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카이안을 향해 접근했다.


“젠장, 멈춰!”


디리터는 사력을 다해 상대를 뿌리치고는 카이안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남자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기민했고, 카이안은 다리가 풀려 서툴게 뒷걸음질치는 게 고작이었다. 단검이 복부에 파고들자 카이안의 상체가 일순 경련을 일으켰다.


“윽....”


마치 고통을 참으려는 듯 그는 입을 굳게 다물며 신음했다. 암살자는 단검을 꽂아 넣은 자세 그대로 부르르 팔을 떨었다. 반쯤 들어간 칼날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의 눈은 승리감에 도취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바득 깨물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단검은 그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이.....자식.”


단검이 카이안의 몸을 파고든 그 순간, 디리터는 손을 뻗어 나머지 부분을 움켜쥐었다. 물론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은 것이기에 피가 주르륵 쏟아졌으나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칼에 찔렸어도 내장이 상하지만 않았다면 아직 회복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디리터는 어깨로 상대를 밀쳐내고는 서둘러 카이안의 배에 꽂힌 검을 빼냈다.

카이안은 쇼크를 받은 것인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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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8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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