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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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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7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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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DUMMY

*********************************************

얄궂게도,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데루루피아 아망초-

*********************************************





“뭡니까? 이 사람들은.”


신경 안 쓰려 해도 마주앉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자신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그들이 영 불편해 디리터가 연방 헛기침을 했다.


“명분제조기...랄까?”


레오문드는 그들이 디리터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맹위의 추종자들의 반응은 상이했는데, 한쪽은 그들의 등장이 못미더운지 입을 비죽이 내밀고 있었고, 한쪽은 레오문드의 결정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이 레오문드를 대신해 말했다.


“거짓말과 광대의 신 규네포를 믿는 자들입니다. 저들에게는 언행 속에 숨겨진 거짓을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와...그런 신도 있었어? 신기하네.”


규네포의 광대들이 의식을 준비하는 사이 모인 인원들을 위한 간단한 식사가 마련되었다. 식사라고 해도 거창할 건 없고 말린 빵과 올리브, 양젖 한 잔이 전부였다. 디리터는 두 손은 자유로웠으나 두 발의 사용, 즉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는 한쪽 다리를 꼰 자세로 개의치 않고 빵을 우겨넣었다. 그는 음식을 먹는 내내 옆에 앉은 기사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아쉽게도 대다수가 그를 무시했다.

심심해하는 그를 위해 레오문드가 말했다.


“저들은 자네가 허튼 짓을 할 경우 목을 날리기 위해 대기하는 걸세. 그래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허튼 짓 안 할 거니까 상관없잖습니까.”


“하하핫, 참 넉살 좋은 친구로군.”


그사이 나란히 앉은 광대들 사이로 목재 칸막이가 세워졌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는 게 금지되었으며, 입을 열 수도 없는지 식사 내내 침묵을 지켰다. 레오문드가 올리브를 베어 물며 말했다.


“거짓을 가려내는 능력이라니. 그럴듯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당사자들이 옆에 있는데 대놓고 험담이라니, 디리터로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광대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뭐...그 정도까지야...”


“솔직히 나는 저들을 그다지 신용하지는 않아. 하지만 높으신 분들의 의견은 달라서 말이지. 선택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적은 근거만으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저들을 찾곤 하지. 뭐 나도 싫지는 않아. 저들에게 판결을 맡기면 일이 틀어져도 책임회피하기 편하거든.”


“총사령관다운 묵직한 발언이네요.”


심문방식은 간단했다. 레오문드가 질문을 던지면 디리터가 답한다. 그리고 규네포의 광대들이 그의 발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광대들은 각자의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진위의 여부를 적어 표시하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만장일치가 아닌 적이 없다는 게 아슬란의 설명이었다.


“만약 작정하고 저를 음해하면 어떡합니까?


디리터의 질문에 레오문드가 나직이 웃었다.


“규네포의 의식은 그리 세속적이지 않네. 의식에서 거짓을 고하면 거짓말의 신이 평생 진실을 얘기할 수 없는 저주를 내린다고 하더군. 뭐 이건 그들 얘기고,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겠지. 그럼 내 친히 저들의 목을 매달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광대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디리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맹위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디리터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좌우로 넓게 퍼졌다. 당연히 잡담을 나누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금지되었다. 심문을 시작하기 전 레오문드가 디리터에게 말했다.


“규네포의 의식은 피대상자가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도 중요하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게나.”


그러자 디리터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제 검을 주시죠. 하도 몸에 붙이고 다녀서 이제 없으면 조금 불안하거든요.”


당연하게도 곳곳에서 고성이 터졌다. 인질에게 무장을 허락하다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는 요구였다. 그런데 레오문드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곰곰이 턱을 쓰다듬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이르지만 의식을 시작하지. 디리터 아쟉스, 무기를 준다고 허튼 짓을 꾸미진 않겠지?”


“물론이죠. 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러자 규네포의 광대들이 일제히 종이에 판결을 적어 올렸다. 글씨체는 모두 달랐으나 적힌 내용은 한결 같았다.


-진실

-진실

-진실


지켜보던 기사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는 레오문드의 기지와 소문으로만 듣던 광대들의 능력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레오문드가 만족한 듯 말했다.


“그롬노어. 저자에게 무기를 돌려주도록.”


“하오나 장군...”


“설마 맹위의 추종자가 다 모여 놓고 레인저 하나 상대 못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길 바라네.”


“.....”


곧 빼앗겼던 투핸디드소드가 디리터에게 전달되었다. 디리터는 빙긋 웃고는 검을 지팡이처럼 거꾸로 세운 채 가볍게 기댔다. 힐트 부분을 감아쥔, 말하자면 언제든 발검할 수 있는 자세였기 때문에 주변에 선 기사들은 아예 무기를 뽑은 채 의식을 관전했다.


“뭔가 싶었는데 재미있는 방식이네. 좋아, 어디 계속 해보시죠.”


레오문드는 팔짱을 낀 자세로 디리터의 바로 뒤에 섰다. 게다가 디리터는 반드시 시선이 정면을 향하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던져지는 질문, 사방에는 오직 적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디리터가 믿는 것은 검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그가 보고 듣고, 절절하게 느껴왔던 경험들. 거짓은 설 자리가 없다. 진실만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미래는 변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묻겠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아까 말했잖습니까.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 전쟁은 조작되었습니다. 이득을 보는 건 결국 브리토리스와 안개송곳니뿐이죠. 그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라도 이 불필요한 전쟁을 종결시켜야 합니다.”


-진실.

-진실.

-강한 진실.


“자네는 지그문트 황제가 조종당하고 있고, 로샤단이 그분을 원상태로 되돌렸으며, 지금 정전협정서를 들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발언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가?”


“물론이죠. 반드시 도착합니다.”


-진실.

-명백한 진실.

-진실.


단 두 번의 질문만으로도 디리터의 목적이 교란일 것이라 주장하던 기사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레오문드는 그의 결백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규네포의 의식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안개송곳니라고 했지.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지?”


“전쟁을 통해 약화된 리크나이츠와 아스트리카를 동시에 정복하는 것. 그 중심에는 신의 아이가 있죠.”


“신의 아이가...그렇게 대단한가? 국가의 존속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온전히 각성한 신의 아이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진실.

-진실.

-한 점의 거짓도 없음.


“루도 클로람은 신의 아이인가?”


순간 디리터의 동공이 확대됐다. 마치 밥은 먹었냐는 듯한 자연스러운 어조였으나 그의 질문이 그렇게 머릿속을 들쑤실 수가 없었다. 루도는 신의 아이인가. 지금껏 그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아왔던가. 그리고 질문의 결과가 이루어낸 참상을 몇 번이나 봐왔던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루도는 그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스스로 신의 아이, 펠아람의 저주라는 굴레를 벗어난 그는 로샤단의 자랑이었다. 디리터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네. 펠아람의 아이죠. 그리고 ‘우리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금 발에 땀나게 달려오는 중이고.”


당연히 광대의 필기는 진실로 통일되어 있었다. 레오문드와 디리터 사이에 잠시 텁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실 레오문드는 나젠크루거로부터 얻은 정보로 루도가 신의 아이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자체로도 뛰어난 병사라는 사실도 주지하고 있었다.

로샤단과 루도 클로람, 신의 아이, 펠아람의 저주. 그는 짧게나마 루도와 만났던 순간을 기억했다. 부상 입은 동료를 위해 거리낌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던 소년. 적이지만 경의를 표할만한 용기였다. 하지만 그는 명백하게 적국의 군인이었다. 그의 명예로운 칼끝이 기꺼이 아스트리카를 향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확신할 수 있겠는가. 레오문드는 안개송곳니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나, 그들의 사상에는 뼈저릴 정도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밝혀진 정보대로라면 리크나이츠와 브리토리스는 신의 아이를 보유하고 있지. 우리 아스트리카는 아무것도 없고. 신의 아이가 정말 군대마저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를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우리의 입장에서는 리크나이츠도 브리토리스도 위태로운 적일뿐일세. 나는 오히려 묻고 싶군. 란도스 국왕이 왜 그 신의 아이라는 지극히 유용한 존재를 병기화 시키지 않는지.”


이 역시 많이 접해온 물음이었다. 사실 이전의 디리터는 그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왔다. 정치적인 문제는 늘 제리온이나 이칼롯에게 맡기고, 그들이 내린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따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사실 디리터는 어느 누구보다도 신의 아이와 가까이에 있었다. 루도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사이고, 카이안에게는 어느 샌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웃음이 나왔다. 병기? 군대?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그 녀석들은 그런 스케일 큰 놀이에 어울릴 성격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람카디스의 사상을, ‘독수리는 없다’라는 어구의 의미를 디리터는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신의 아이 몇 놈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지. 어렸을 때부터 봐 왔고. 솔직히 신의 아이라는 표현도 잘 안 와 닿아. 나는 루도가 이불에 오줌을 지려 알몸으로 쫓겨나던 걸 기억하고 있어. 몇 년에 한 번 온다는 유랑극단을 기다리며 함께 달력을 세던 것도, 동네 똥개한테 물려서 울며 돌아왔던 것도, 낭만을 찾아 함께 겁도 없이 레인스터로 여행했던 것도. 병기? 국가의 존망? 웃기는 소리야. 당신들이 대체 그들에 대해 뭘 안다고?”


시종일관 태평함을 유지하던 디리터가 갑자기 폭풍처럼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 서 있었음에도 레오문드는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덮쳐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규네포의 광대들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흘렀다. 모두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생각을 말해볼까. 루도의 꿈은 언젠가 델키아에 작은 학교를 지어 자신 같은 고아들을 데려다 가르치며 사는 거야. 람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 그렇게 살게 냅둬. 꿈을 응원해 달라고. 루프리모의 아이도 아반케즈의 아이도 베릴의 아이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인간이야. 아침에 먹는 우유 한잔에, 사랑하는 사람의 인사 한 마디에 행복해 하는, 당신들과 다름없는 인간! 병기? 후, 듣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들도 자유의지라는 게 있거든. 격발하면 나가는 석궁이나 투석기 따위가 아니라고. 높으신 기사나리들. 행복하게 살고 있던 녀석들을 잡아다 놓고 강제로 끄집어낸 그 힘을, 정말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무조건적인 감싸기가 아니다.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기에,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가치 있는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루도는 스스로 운명을 극복하고 돌아왔다. 카이안은 혼란스러운 상태이긴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 10년 가까이 함께 울고 웃어왔다. 그 어리고 멍청한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이 전쟁은 끝나야만 했다.


“제발 부탁하는데, 그 녀석들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당신들도 같은 인간이라면. 모자란 동네 형의 평가는 여기까지. 이상.”


그 말에 맞추어 기사들이 일제히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디리터의 이야기에 논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디리터의 열변에 일순 감정을 이입했고, 그가 말을 마치자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레오문드가 디리터와 눈을 맞추기 위해 정면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광대들의 감평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럼 이 전쟁이 끝나면 루도 클로람은 힘을 봉한 채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갈 거란 말인가?”


디리터가 말했다.


“루도만이 아니죠. 모든 신의 아이가 그렇게 될 겁니다.”


“리크나이츠 왕실의 입장은 어떻지? 그건 자네 혼자만의 이상은 아닌가? 란도스 국왕과 테오도르 지스카르, 그 외 유력귀족들도 이에 동의했나?”


“문제없습니다. 국왕폐하만큼 로샤단을 믿고 지원해주시는 분도 없으니까.”


“신중하게 답하게. 왕이야말로 국가의 이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일세. 그나 지스카르 재상이 변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가?”



디리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바깥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램프에 기름이 떨어져가자 기사 하나가 짧은 정적을 살려 재빨리 연료를 채워 넣었다. 모두가 디리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맹위의 추종자 중에 그에게 시선을 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규네포의 광대들도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하며 연방 땀을 훔쳤다.

이윽고 디리터가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채 말을 맺지도 않았건만 광대들이 지체 없이 진위여부를 표했다.


-위조할 수 없는 진실.

-두 말할 것 없는 진실.

-완전무결한 진실.


규네포의 의식이 시작된 이래 디리터는 단 한 차례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기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의 결연한 자세였다. 그는 마치 이런 자리가 마련되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스스럼없이 목숨을 저울추에 올려놓았으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의식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진 것인지 광대들의 호흡이 가빠지는 게 보였다. 레오문드는 잠시 생각에 골몰하다가 디리터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채 1m가 되지 않았다. 그는 순간 디리터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공격의사가 있다기보다는, 숙련된 병사가 자신의 간격에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경계표시였다.

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그럼에도 내가 신의 아이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어쩔 거지?”


그러자 디리터의 표정이 싹 굳었다. 램프의 불빛이 그의 미간에 짙은 음영을 새기고 사라졌다. 이어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굳게 다문 입술이,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마주 선 레오문드만이 알아챌 수 있도록 치켜 올라갔다. 싸늘한 눈웃음과 함께 그러쥔 힐트에 힘이 갔다. 그의 팔뚝에 힘줄이 돋는 것을 보자 레오문드도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어린 광대 하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차...창백한 진실...”


그의 한 마디로 짧고도 긴 정적이 막을 내렸다. 감정을 추스르고 보니 주변의 기사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무기에 손을 올린 채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보였다. 디리터는 씨익 미소 짓고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말했다.


“순 엉터리잖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진실?”


그러자 레오문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대소에는 조금의 가식도 담겨있지 않아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물론 디리터까지도 긴장이 풀릴 정도였다.


“으하하하! 자네 말대로일세. 엄밀히 말하면 저들은 진실과 거짓을 판명해내는 게 아닐세. 만약 거짓된 정보를 진실이라 믿고 있으면 그 또한 진실이라 답해버리지.”


“...그런 맹점이 있으면서 왜 굳이 의식인지 뭔지를 한 겁니까?”


“신념은 결코 위조할 수 없지.”


의식은 끝이 났다. 규네포의 광대들은 진이 빠졌는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맹위의 추종자들도 연방 손부채질을 해댔다. 밤공기가 쌀쌀했지만 껴입은 갑옷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기나긴 심문이 끝이 나자 디리터가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레오문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건 정말 파격적인 사건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투를, 한 남자의 이야기만을 믿고 선택해야 하다니. 만약 그가 틀렸다면 레오문드는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기사직 박탈이라는 징계를 피하기 어려웠다. 전쟁에서도 진다면 그 다음은 상상하고도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청년의 말대로 이번 사흘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리스크였다. 천국과 지옥은 양극단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레오문드가 말했다.


“전 병력에게 전하라. 이곳에서 사흘간 대기한다. 천정기사단에게도 지금 즉시 전갈을 보내도록 하라.”


멀리서 아련하게 북소리가 들려왔다. 야간을 기점으로 경비대가 교대하고 있는 것이다. 목이 말랐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리운 시간이지만, 아직 술잔을 들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만큼 돌아가지 않고 디리터는 훼창기사단 진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무장이 해제됐다는 점만 빼면 포로가 아니라 여느 사절과 다름없이 귀한 대접을 받았다. 식사와 숙소는 물론이요, 엄선된 최고의 병사들이 호위대로 따라붙었다. 이는 행여 스벤달이 허튼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한 레오문드의 안배였다.

천정기사단은 그날 밤이 채 가기도 전에 사흘간의 유예를 적극 수용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양 군대는 서로 대치한 채 시간을 보냈다. 약속한 사흘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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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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