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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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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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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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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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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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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DUMMY

레이시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으로선 맡은 바에 충실하면 되는 일이었다. 제랄드는 경비병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지 시선을 끌기만 할 뿐이라면, 굳이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한밤중이라면,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수단은 단연 화재였다.


“자,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간다. 빨리 끝내고 어서 이 기분 나쁜 요새를 떠나는 거다.”


그의 수하들은 모두 옆구리에 기름 먹인 짚단을 한 아름씩 들고 있었다. 이걸 보병대기소에 차곡차곡 쌓아 불을 붙이면 한껏 건조해진 외벽은 활활 타오를 테고, 아무리 안개송곳니의 습격이 있다 하더라도 상당수의 인원을 진화에 차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아케니온의 임무는 끝,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유유히 성문을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 뒤에 루프리모의 아이 암살은 미리 합의한 대로 안개송곳니가 전부 알아서 할 일이다.

제랄드 일행은 보병대기소 뒷문을 중심으로 볏짚을 하나 둘 내려놓았다. 게네스는 불이 빨리 번지게 벽 곳곳에 기름을 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임무는 단지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뭐, 소동을 극대화하려면 안에 있는 사람 대여섯쯤 불타 죽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준비가 끝나자 제랄드는 즉석에서 불을 피워 짚단에 던지려고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막 화재를 일으키려는 찰나,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찾았다! 아케니온 일당. 이쪽이다!”


‘뭐?’


제랄드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방화를 들켜서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리 친 병사는 분명히 자신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신분은 철저히 감추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병사의 목을 그었다. 병사는 그대로 절명하여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부하들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랄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이 녀석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대장....!”


“게다가 우리가 여기로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는 듯한....”


그때였다. 병장기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매복해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제랄드 일행을 에워쌌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았으나 이미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냉철한 게네스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여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제보가 맞았군. 아케니온, 네놈들의 악행도 오늘로 끝이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러나 제랄드는 병사들의 외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왜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졌는지를 좇아 재빠르게 돌아갔다. 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미간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레이...시!”


안개송곳니는 아케니온에게 시선을 끌어줄 것을 요구했다. 경비대의 시선을 가장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처음 안개송곳니 단원 하나가 디리터를 끌어낸 뒤, 기다렸다는 듯이 아케니온이 모습을 드러낸다. 호위대는 당연히 안개송곳니와 아케니온이 연동한다고 생각할 테니, 그들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병력을 투입할 것이다. 카이안의 경호를 맡은 기사들까지도. 방화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호위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작전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아케니온이 미끼로 희생된다는 결과가 전제되어야 했다.


“대, 대장, 어떻게 하죠?”


안개송곳니는 이를 위해 이미 아케니온이 요새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흘려놨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레이시가 제랄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쓰레기 버리듯 내던져야 할 정도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당분간 레이시의 명령을 군말 없이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짐작건대 레이시는, 아케니온이라는 패를 버리는 대가로 무언가 확실한 이득을 취한 것이 분명했다.


“좋아...빌어먹을. 일처리 하난 제대로 하는군, 안개송곳니.”


“대장!!”


제랄드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언젠가 안개송곳니와 관계가 틀어질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렬했다.


“돌파한다, 모두 공격!!”


그의 구호에 맞춰 아케니온 전원이 땅을 박차고 나갔다. 앞뒤로 포위당한 데다 숫자는 두 배 이상 열세였지만, 이대로 손 놓고 붙잡힐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레이시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만 했다. 제랄드는 눈앞의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며 길을 열었다.

그의 괴물 같은 실력에 리크나이츠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당연히 항복하리라 생각했기에, 갑작스럽게 돌격해온 아케니온의 공격은 도리어 병사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제랄드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목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이에 고양되었는지 뒤따르던 부하들도 주눅 들지 않고 포위망을 향해 쇄도했다.


“제랄드 대장! 4시 방향에 마구간이 있습니다. 군마를 탈취해 이대로 성문을 빠져나가죠.”


게네스가 그의 곁에서 쇼텔을 휘두르며 말했다. 안개송곳니에게 배신당한 지금, 임무고 뭐고 일단 목숨부터 보전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제랄드 역시 처음에는 게네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런데 탈출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사위를 훑어보던 중, 그의 눈동자에 한 소년이 비추어졌다. 건물 유리창을 통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루프리모의 아이! 안개송곳니의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랄드는 그에게서 또 다른 희망을 엿보았다. 레이시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활로를.


“루프리모의 아이, 루프리모의 아이를 붙잡는다. 놈을 인질삼아 이곳을 빠져나가겠다. 절대, 절대 저 꼬마를 죽게 해서는 안 돼!”




****




잠결에 깨어난 카이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섬뜩하게 어둠을 짓찢고 있는 횃불의 물결과 건물을 에워싼 기사들의 대열이었다. 워낙 깊이 잠이 들었었기에 디리터가 뛰쳐나간 그 순간에도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처 옷을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기사 넷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어, 지,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요?”


“적어도 이곳은 아닙니다! 더 병력이 많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애초에 카이안의 경호에 투입된 병력은 마흔 정도였다. 그중에 서른은 조금 전 아케니온이 나타났다는 이방인의 제보를 받고 보병대기소로 달려간 참이었다. 무장한 기사 열 명이면 호랑이가 달려들어도 기죽지 않을 정도지만, 그들 역시 안개송곳니의 위용을 익히 들어왔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겁에 질리긴 카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상황 -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는 - 에 익숙했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던 사람들이 종종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이안은 안절부절못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노리는지도, 지체 높은 기사들이 왜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지도, 디리터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생쥐처럼 어둠에 몸을 숨기고만 싶은데, 하필 기사들이 든 횃불이 그의 소재를 만천하에 퍼뜨리고 있었다.


“야간훈련을 노렸어! 지금 요새 안은 텅텅 비어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우는소리 하지 마! 동쪽 노포탑에 리발도 남작이 이끄는 창병대가 있어. 일단 거기로 움직인다.”


잔뜩 위축된 기사들의 대화는 카이안의 귀에도 여과 없이 흘러들었다.


“...차라리 대기조와 합류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쪽이 숫자도 더 많고.”


“멍청하긴! 적이 있는 곳에 제 발로 찾아가자는 거야?”


기사들은 처음 디리터를 끌어냈던 여자가 미끼고, 조금 전 전투에 들어간 아케니온이 양동작전의 주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카이안의 시야가 가려질 정도로 전후좌우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그것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한된 시야와 공포를 자극하는 기사들의 말투,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부림 소리. 평정을 유도하게끔 만드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기사들에게 이끌려 건물 밖으로 나올 즈음이었다. 앞서 가던 기사의 상체가 덜컥 흔들리는가 싶더니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쓰러진 기사의 얼굴 주위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어?”


기사들은 갑작스런 암습에 대응하지 못했다. 설마 아케니온도 미끼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카이안이 어둠 속의 반사광을 가리키며 소리 지를 때까지도 그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재차 날아온 화살에 기사 하나가 더 쓰러지고 나서야 방패를 치켜들었다.


“저격수다! 루시올라님을 보호해!”


그러나 친절하게 횃불까지 들고 있는 기사들의 밀집대형은 암살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적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세례에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카이안은 자신을 밀어붙이던 기사들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져 가는 것을 느끼곤 공포에 질렸다. 열 명이나 됐던 기사들이 어느새 절반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건물로 돌아가요! 여기 있다간 벌집이 되고 만다고요!”


견디다 못해 그가 소리쳤다. 나머지 기사들도 이 상태로 달아나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곧장 방패를 앞세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선 카이안도 더는 기사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다. 그는 재주껏 몸을 엄폐한 채 숙소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이제 다른 수는 없었다. 건물에 틀어박혀 농성하며 증원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 숙소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카이안의 눈에 길쭉한 사람의 형체가 들어왔다. 키가 2m 가까이 되는 그 남자는, 그러나 놀랄 정도로 홀쭉해 사람이 아니라 갈대가 서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양손에는 벌목할 때나 쓸 법한 투박한 손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찾았다, 카이안 루시올라.”


앞서의 저격수들이 몰이꾼이라면, 도끼를 든 남자는 확실히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일종의 처형인이었다. 그는 카이안을 향해 그 커다란 다리를 성큼성큼 내딛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카이안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고 그 남자를 피해 엎어져라 달음박질쳤다. 만약 뒤따라오던 기사가 그를 대신해 도끼를 맞아주지 않았다면, 거기서 목이 잘려버렸을 것이다. 기사들이 온몸을 던져 남자를 막아내는 사이 그는 헐레벌떡 건물로 들어가 현관문을 잠갔다.


“훅, 하악, 하악!”


하지만 그는 곧 자기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굳이 문이 아니라도 침입할 경로 따위 널려있지 않은가! 창문을 닫으려던 그는 어둠 속에서 날아든 화살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멀리 들려오는 기사들의 비명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또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다. 6년 전 그때처럼.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갔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자력으로 탈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다른 사람들이 구해주러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3층에 다다랐을 즈음 입구 쪽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아까 그 남자다.

카이안은 급한 대로 복도에 놓인 촛대를 쥐어들었다. 제대로 된 무기여도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고작 녹슨 촛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처량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는 발소리를 피해 반대편 계단으로 달렸다. 암살자가 3층에 도달했을 때 카이안은 막 복도의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표적과 재회하자 남자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귀하신 분이라 그런가 달리기 속도는 그저 그렇군.”


남자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보폭을 크게 걷고 있는 것뿐이었는데도, 전력 질주하는 카이안과의 거리를 우습게 좁혀왔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남자의 발소리에 카이안의 심장이 요동쳤다.

죽는다, 진짜로 살해당한다. 이건 과거 광휘의 결사 때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들은 단지 카이안을 납치하려는 것뿐이었지만, 등 뒤의 남자는 순수하게 목숨을 빼앗을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엄습해오는 공포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였다. 반대편 계단(카이안이 향하던)에서 시끄러운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 무리의 남자들이 새롭게 3층 복도에 들어섰다. 막 전투를 벌이고 온 참인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들은, 카이안을 - 혹은 안개송곳니를 - 발견하곤 성난 황소처럼 입김을 후욱 내뿜었다. 카이안을 쫓던 암살자도 그들을 발견하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좋아. 늦지 않았군. 나쁘지 않아.”


제랄드가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긴 하나 그 역시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리크나이츠 군사들을 쓰러뜨리고 오느라 팔과 어깨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11명으로 시작했던 인원은 어느새 7명으로 줄어 있었다. 물론 골목에 뒹굴고 있는 30구의 시체를 생각하면 경이적인 결과라 할 수 있겠으나, 아직 제랄드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암살은 우리가 완료한다고 말했을 텐데, 아케니온.”


“하? 뭐야. 착한 어린이 놀이하기엔 시기가 한참 지났다고.”


제랄드는 몸을 숙인 채 복도를 질주했다. 게네스를 위시한 다른 수하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카이안은 자신을 죽이러 온 또 다른 무리인가 싶어 재빨리 촛대를 내찔렀다. 그러나 조악하기 그지없는 그의 공격은 제랄드의 갑옷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이제 끝이란 생각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제랄드는 그를 휙 지나쳐갔다. 게네스도, 군터와 블라키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안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들을 돌아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제랄드가 ‘레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카이안을 살려둔 것임을 알 리 없었다.

제랄드의 검이 암살자의 도끼와 맞부딪혔다. 두세 번의 공격을 교환한 뒤 암살자는 재빨리 뒤로 거리를 벌렸다. 제랄드 하나라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뒤따라오는 무리까지 상대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암살자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우릴 방해하다니...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아아, 나만 나쁜 사람으로 몰지 말라고. 먼저 뒤통수를 친 건 그쪽이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제랄드의 눈썹이 비틀어졌다. 같잖은 대화가 오히려 참고 있던 분노를 건드렸는지, 그는 방어태세도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상대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내가! 지금! 네놈 말장난이나 듣자고 여기 온 것 같아?!!”


암살자의 어깨 살점이 서걱 잘려나갔다. 아무리 안개송곳니 소속의 암살자라 할지라도 이런 정면대결에서, 게다가 수많은 전투로 잔뼈가 굵은 제랄드를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붉은 피가 램프 유리를 적셨다.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암살자는 곧장 휘파람을 불어 다른 동료를 호출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 명의 저격수들. 그들이 합류한다면 제아무리 아케니온이라도 전멸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윽고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암살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군의 지원만 있다면 아케니온 따위 우스운 상대다. 아니, 그냥 간단하게 화살로 그들을 무시한 채 루프리모의 아이만 죽이고 떠나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리의 주인공이 도착했을 때, 암살자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이 빗나간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살기를 내뿜는 그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저건...대체?



도착한 것은 그의 동료가 아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암살자는 제랄드와 겨루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쪽에 있던 게네스도 그녀를 발견하곤 숨을 들이마셨다.


“저 여자는...”


유미르네 발렌스. 암살자는 이미 그녀와 합작이 오고 갔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그 살벌한 살기에 눌려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마치 새끼를 잃은 호랑이처럼 노골적인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한편 제랄드는 그녀의 등장에 한 템포 공격을 멈추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와는 초면이었기에(엄밀히 말하자면 초면이 아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단 끝에 선 여자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보호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카이안의 안위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미르네는 곧장 숙소에서 뛰쳐나와 카이안에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케니온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기에, 그녀는 혹시 레이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시는 그녀와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했다. 무대 위에는 상처입은 아케니온이 있었고, 이번 막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였다.

그들을 발견한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할아버지의 원수, 죄 없는 소녀를 인신매매단에 넘긴 쓰레기들,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놈들, 심장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버러지들!

그들은 유미르네를 알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악몽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증오를 키워왔는지,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제랄드, 게네스, 군터, 블라키!”


유미르네라는 ‘원념’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를 나부끼며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검은 해일을 연상케 했다.


“대장! 어떻게...”


그런데 그녀가 쇄도해옴과 동시에 창가의 유리창이 부서지더니 복면을 쓴 남자가 날아 들어왔다. 아군의 신호를 받고 온 또 한 명의 안개송곳니였다.


“게네스, 막아!”


남자의 손에는 장전된 석궁이 들려 있었다. 그의 표적은 물론 카이안이었다.

제랄드는 후방인원을 전부 카이안을 지키는 데 투입했다. 앞쪽의 여자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로샤단이라면 복도를 막아선 안개송곳니와 맞붙지 않을 수 없을 테니 그걸로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제랄드으!!”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유미르네는 암살자를 밀치듯 지나치고는 곧장 도약하여 제랄드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다급히 무기를 들어 막긴 했으나, 엄청난 위력에 그의 무릎이 휘정거렸다.


“잠깐...!”


위험에 빠진 제랄드를 게네스가 재빨리 구원에 나섰다. 그러자 유미르네는 그의 쇼텔을 가볍게 피하고는 그대로 뛰어 벽을 달려(!) 뒤로 넘어갔다. 그 신기에 가까운 기동에 아케니온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커헉?”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의 심장을 뚫어버리고서, 그녀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표적은 아케니온 전부였다. 새로 난입한 안개송곳니를 견제하던 제랄드의 부하들은 그녀의 맹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미르네...당신...”


한편 카이안은 이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안개송곳니는 그를 죽이려 했고, 아케니온은 그를 살리려 했으며, 유미르네는 그런 아케니온을 맹렬히 공격했다. 특히 그녀가 안개송곳니를 가볍게 지나칠 때의 광경은 카이안의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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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9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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