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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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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7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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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DUMMY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일행을 넓게 포위하고 있던 자연의 군대가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나타났을 때처럼 수풀 사이로, 절벽 너머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큰 몸집을 자랑하던 만티코어도 루도를 한 번 쓱 훑어보고는 숲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썰물처럼 떠나가는 맹수들을 일행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란돌이 말했다.


“거, 겁먹은 건가? 후우...”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미르네는 맹수들이 단순히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무언가의 지령을 받고 조직적으로 후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유미르네는 루도에게 다가가려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곤 흠칫 놀랐다. 부릅뜬 눈이 그가 얼마나 충격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루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펠아람의 힘을 방출한 시간은 채 수 초가 되지 않았으나, 그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파괴욕은 그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방금 그건....뭐였냐.”


『단순한 위협용이었어. 신의 아이의 오오라는 상대를 겁먹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내가 묻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네 행동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바야. 아니, 애초에 ‘너’는 그 힘을 다룰 수도 없어. 워낙 상황이 위급해 앞뒤 안 보고 쓴 거지만...잘 모르겠네. 성공이라 해야 할지, 실패라 해야 할지.』


펠아람의 에센스를 받아들인 순간, 고양감과 함께 힘을 분출하고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만약 제오프가 오오라를 없애지 않았다면 그대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도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절제할 수 없는 파괴욕 - 그것은 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운명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우리는 펠아람의 저주가 아닌 거...아니었냐?”


그러자 제오프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앞서가지마. 누구나 힘을 얻으면 사용하고픈 충동에 휩싸이는 거야. 그건 저주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본능이지.』


그는 자괴감에 빠진 루도를 위로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루도와 달리 그는 힘의 방출과 제어에 익숙했다. 오히려 그는 루도가 일시적이나마 펠아람의 힘을 제어했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사실 현재 우리의 관계는 기이할 정도로 얽히고 틀어져 있어. 소울링크로 강제각성이 이루어 졌는데도 육체의 소유권은 네 쪽이 가지고 있는 거지. 그렇다면 힘의 사용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시도해본 게 지금 결과고.』


그가 한숨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만만히 볼 문제는 절대 아니었다. 힘을 개방한 건 단 몇 초에 불과했지만 루도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받은 타격은 실로 엄청났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이마에 돋은 핏줄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도가 날숨을 푸욱 내뱉으며 말했다.


“만약...그때 내가 의식을 잃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제오프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답했다.


『네가 에센스를 버티지 못하는 지점이 되면 육체의 소유권이 나에게 넘어가겠지.』


“다시 돌아올 확률은?”


『시도는 해볼 테지만 아마 낮을 거야. 이전번 훼창기사단과 싸웠을 때에도 돌아오는데 엄청난 노력을 들였어. 어쩌면 다음...은 없을지도.』


“그러냐...”


과연 하루살이와도 같은 목숨인가. 루도는 제오프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땀을 흠뻑 흘려서인지 조금은 기분전환이 된 것 같았다. 파괴충동은 파괴충동이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자연의 군대가 물러간 지금이야말로 전력으로 달려 정전협정서를 전달해야 했다.

그런데 상황이 정리되자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됐다. 타고 갈 말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 전부 달아나버린 것이다.


“음...안 돌아오려나? 그래도 제대로 훈련받은 말인데.”


그러자 유미르네가 머쓱해하는 그에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퍽이나 오겠네. 네 힘 보고 놀라 도망갔는데요 루도 클로람씨. 그나마 하나 남은 것도 네 바로 옆에 있어서 직빵으로 그 보랏빛을 쬐어 기절해서 그런 거야.”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루도를 타박하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그 힘이 아니었다면 모두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도보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란돌이 차선책을 내놓았다. 일행 중에 대표를 하나 정해, 그가 정전협정서를 운반하도록 하는 것. 시간 내에 마르네터스에 도착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운반자는 누구로 정하지?”


“그야...”


사실상 대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현상황에서 그 어떤 위협에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인물. 모두의 시선이 루도에게 쏠렸다.


『...뭐 예상은 했지만 말이지...』


루도는 기사들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말 위로 올라탔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여유부릴 시간은 1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해서 가. 펠아람의 아이님. 개한테 물려서 광견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걱정 말라고. 여차하면 아까 그 힘으로 어떻게든 할 테니까.”


그는 유미르네의 비아냥섞인 배웅을 웃어넘기며 말했다. 그러나 호언장담하는 모양새와 달리 루도는 그 문제에 대해 제오프와 의논을 끝낸 상태였다.


『말해두지만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난 절대로 힘을 쓰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제오프는 에센스의 잔량 문제와 루도와의 약속 때문에 힘의 사용을 꺼려했다. 한편 루도 역시 펠아람의 힘이 두려웠다. 통제하기가 워낙 힘들기도 하지만, 애써 통제에 성공해도 휘몰아치는 파괴욕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결국 펠아람의 힘은 두 사람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어쩌면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생명을 쓴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루도는 알룬도에게 정전협정서를 건네받자마자 마르테너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나흘은 걸리는 거리다. 과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이제 모든 열쇠는 그에게 달려 있었다.




-------------------------------------




그날 밤 루도를 떠나보내고서 란돌 일행은 숲길의 공터에 자리를 폈다. 자연의 군대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야영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본진까지 휴식 없이, 그것도 도보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란돌의 판단이었다.

기사들은 모닥불을 최소한으로 피우고, 음식냄새도 풍기지 않기 위해 마른 과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불가에 앉아 몸을 뉘이고 있으니 제법 하루의 피로가 씻기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기사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크로이체르 경, 아까 루도 클로람의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모두가 눈치만 보던 주제였다. 이번 작전에 참가한 기사들은 란돌을 제외하고는 루도가 신의 아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레인스터 방어전에서 공을 세웠고, 국왕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는 것으로 미루어 뭔가 숨기는 힘이 있구나 짐작할 따름이었다.

기사들의 시선이 쏠리자 란돌은 멋쩍게 장작을 모닥불 안에 던져 넣었다. 그 역시 루도가 보여준 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른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마법입니까? 듣자하니 로샤단의 대장도 마법검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그냥...뭐 비슷한 거겠지.”


란돌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질문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휴식이나 취하라며 기사들의 궁금증을 일축했다. 그러자 기사들은 오히려 란돌은 빼버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작은 어느 왕실기사단원이었다. 그는 루도가 힘을 방출한 순간 놀라 달아나던 말에게 채여 손목이 부러진 상태였다.

그는 입을 비죽이 내밀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힘이 있으면 진작 쓸 것이지. 누군 죽다 살아났구만.”


그러자 다른 기사가 거들고 나섰다.


“그러게. 그 마법인가 뭔가는 돈 받고 팔려고 그리 꼭꼭 숨겨놓은 건지 원. 좀 일찍 쓰면 좀 좋아? 그럼 우리가 위험해질 일도 없었고.”


“내 말이. 하여간 로샤단과 함께 다니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고. 지난번에는 악마에, 이번에는 맹수에.”


이칼롯과도 함께 한 경험이 있는 기사가 신세한탄을 했다. 슬러터와도 싸워 본 그는 물론 로샤단의 업적에 의심을 갖고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왜 로샤단이 가는 곳마다 그런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거지?”


“사실은 그 작자들이 불러들이는 거 아냐? 낮에 그 보라색 마법도 그렇고, 솔직히 여간 수상한 게 아니야.”


그것이 결정타였다. 란돌이 미처 중재하기도 전에 유미르네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놀고들 있네. 늑대 하나 못 잡고 벌벌 떨던 쓰레기들이.”


그녀는 모닥불에서 10m 정도 떨어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특유의 검은색 복식 덕분에 그녀는 완전히 어둠에 녹아들어 제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실루엣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한껏 흥이 올라 떠들던 기사들은 그녀의 싸늘한 도발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평소 살가운 인상을 주던 - 직업상 만들어낸 이미지이긴 하지만 - 그녀인지라 정색하고 폭언을 던지니 오싹하기까지 했다.

기사 하나가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 그러고 보니 발렌스양도 로샤단이었구려. 지금 건 못 들은 거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로샤단 때문에 위험이 계속되는 거라고, 뭔가 불길한 존재라고, 당신들 전부?”


기사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러나 개중 꽤 오랜 시간 로샤단과 작전을 수행해온 기사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들이 넌지시 표한 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유미르네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런 군상들이었지.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안위만 좇는 존재다. 명예니 정의니 하는 건 입에 담기에나 좋은 그럴듯한 허상에 불과하다.


“아아-. 불쌍한 루도 클로람. 죽을 고생을 하며 카잘산맥에 오르고, 운명을 극복하고, 그래도 나고 자란 땅이라고 해준 것도 없는 국가를 위해 충성하러 왔건만, 왜 주변에는 이런 쓸모없는 구더기밖에 없을까. 그렇게 고생하다 뒈진다고 누가 무덤에 삽질 한 번 해줄 것도 아닌데.”


기사들이 화를 내건 말건 유미르네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의 조롱은 그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불현듯 감정이 복받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멸감과 자괴감, 그리고 분노.

제대로 짚고 넘어가면 이 자리에서 그녀만큼 로샤단에 이반되는 인물도 없었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디리터를 죽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엇이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복수만 이룰 수 있다면 신의 아이가 어찌 되든, 리크나이츠든 아스트리카든, 심지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그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인생 아니던가. 그녀에게는 남을 위해 흘리는 땀 한 방울만큼 무가치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루도는 그녀와는 가치관부터가 달랐다. 유미르네는 그가 펠아람의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알면서도 그는 다시금 힘을 썼고, 그 결과 일행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똑같이 목숨을 걸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건만, 루도에게선 후광이 비쳤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시리게 눈이 부셨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친구마저 속여가면서 복수를 좇는 자신은? 불현듯 피에 절은 검 끝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못해먹겠네. 정말.”


그러다 문득 한 소년이 떠올랐다. 루도와 똑같은 신의 아이면서, 언제나 보호받기만 하고 아군의 발목만 잡는 그 소년이 눈에 밟혔다. 어느덧 그녀는 루도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숨기려고 일부러 비난의 화살을 카이안에게 돌리고 있었다. 루도는 지금까지 충분히 희생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 와서도 목숨을 불태워가며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같은 신의 아이면서 카이안 루시올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흐음.”


아무것도 모른다면 알려주면 되지 않는가. 그 잡초도 이제는 짐을 짊어질 때가 왔다. 펠아람의 저주라고 했던가?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알아서 자결이라도 하겠지. 그 다음은 디리터 아쟉스다. 솔직히 루도와 마리네 때문에 지금까지 너무 많은 시일을 미루어왔다. 두 사람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수단은 이미 수십 가지나 생각해 두었다. 한방에, 깔끔하게.

자괴감을 떨쳐내니 분노와 자기합리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래, 그걸로 좋다. 나는 루도처럼은 살 수 없어. 사막의 모래구덩이에서 허리가 빠지도록 뒹굴다 온 창녀니까. 복수를 좇지 않으면 잠자리조차 들 수 없는 정신병자니까.

그걸로 좋다.

어느새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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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하루가 끝을 맺고 있었다. 태양은 산허리에 걸려 마지막으로 붉은빛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디리터는 부상병이 떨어뜨리고 간 투구를 집어 들었다. 모래가 잔뜩 묻은 면갑 속에서는 퀴퀴한 땀 냄새가 났다. 본영 곳곳에서 사망자를 운반하는 마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날 리크나이츠 연합군은 훼창기사단을 상대로 첫 전초전을 치렀다. 피차 탐색의 목적이 강해 투입된 병력의 규모는 단출했으나, 두 군대가 마침내 맞붙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다. 이제 이튿날 아침부터 두 진영은 한쪽이 궤멸할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개전(開戰)의 나팔이 울린 이상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요원해져버렸다.

그런데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레미나가 숙소로 돌아가던 디리터를 허겁지겁 쫓아왔다. 그녀는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헐떡이며 말했다.


“왔어요! 보라색 봉화에요. 틀림없어요!”


디리터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석양을 등진 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확실한 거지? 시간은?”


“크렘벨 부근의 야산에서 올라왔으니까 빠르면 사흘 정도 되지 않을까...싶은데.”


“그렇군. 아델하트 장군은 뭐라시는데?”


“반색하고 계시긴 한데...솔직히 조금 곤란한 상황이긴 해요. 오늘 이미 첫 전투를 치렀는데 사절을 보냈다간 목이 잘려 올 거고...그렇다고 마르테너스 관문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디리터는 씨익 웃었다. 가이잘모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그가 있는 직위와 위치가 제약하는 점도 분명히 있었다. 이는 란도스 국왕도 지스카르 재상도 레미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쉽게 말해 책임질 게 많은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그는 저녁바람에 대비해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레미나가 그 모습을 보곤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숙소로 돌아가시는 중 아니었나요?”


그러자 그는 밝은 얼굴로 레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뜩이나 큰 손인데 두툼한 가죽장갑까지 껴 레미나의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산책. 아, 잠시 이것 좀 맡아주겠어 공주? 잃어버리면 곤란한 거라.”


그가 품속에서 밀봉된 가죽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레미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요?”


“루프리모의 수정.”


“예?! 이걸 왜 제게...”


그녀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디리터는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말했잖아. 산책 다녀온다고. 아, 나 돌아올 때까지 카이안도 좀 부탁할게.”


어스름이 깔려 딱 알맞을 정도로 시야를 가려주었다. 곳곳에 화톳불이 지펴지고 오가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으나 디리터는 어째서인지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 장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레더아머와 로샤단 휘장망토, 장갑, 부츠. 검...검을 쓸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이제 와서는 신체의 일부 같은 존재라 놓고 가기도 어색했다. 그는 천천히 말에 올라탔다.

이칼롯은 성공했다. 또한 루도도 성공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전쟁이 끝난다. 그 짧은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성공했듯이, 자신도 성공할 것이다. 그 어떠한 확증도 없었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날 밤 한 명의 남자가 리크나이츠 본영을 빠져나왔다. 외곽을 담당하는 경비대가 물론 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이는 훼창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신으로 접근하는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볼 뿐, 화살을 쏘거나 하는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디리터는 총 6만의 병력이 대치한 전장을 표표히 가로질렀다.

훼창기사단의 출입문까지 다가가 그는 소리쳤다. 스스로 필요에 의해 찾아왔기에 그의 태도는 당당했고,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로샤단의 디리터 아쟉스다! 리크나이츠의 사절로서 훼창기사단장 레오문드 스벤하임을 만나길 청한다!”


출입문을 열었던 병사는 훗날 지휘관의 승인도 없이 개폐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기 전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자기 집 정원 문을 열라는 듯이 당연하게 요구했다. 그때 바로 문을 열지 않으면 내가 상황파악 못하는 몹쓸 놈이 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뭔가에 씌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남자가 씌었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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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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