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조회수 :
358,999
추천수 :
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6.01 03:57
조회
913
추천
33
글자
18쪽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DUMMY

*************************************

“데루루피아, 이걸 보거라! 루프리모의 아이다.”

“이 아이...인가요. 세상에나, 하지만 세르딕 선생님, 어떻게...”

“아직 살아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람카디스, 당신도 와봐. 루프리모의 아이야. 그렇게나 찾던 신의 아이라고. 람카디스, 지금 뭐하고 있.....람카디스?”

*************************************




카이안의 자각은 곧 란도스와 지스카르, 가이잘모의 귀에도 들어갔다. 로샤단이 묻어두기에는 너무나도 큰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침통해하긴 했으나 굳이 일행을 탓하진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 레밀리오가 카이안의 정체를 발설한 이상 자각은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그것이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계획할 때였다. 루도의 경우와 달리 카이안의 각성은 훨씬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했다. 펠아람의 저주 문제도 있지만, 루도와 달리 카이안에겐 뚜렷하게 설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루도는 오랜만에 레미나와 단둘이 식사를 가졌다. 마리네는 유미르네를 설득하러 갔고, 디리터는 란도스를 알현하러 간 참이었다. 그러나 오전에 벌어진 사건 덕에 두 사람의 저녁에 오붓함이란 단어는 실종되고 말았다.

루도는 결국 힘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억지로 우겨넣으려 해도 도무지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레미나는 아예 턱을 괸 채 그의 얼굴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녀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몰랐어. 유미르네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을 줄은. 왜 말해주지 않은 거야?”


루도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우울한 밤이다. 뭘 해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뭐 듣기 좋은 얘기라고.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평생 말할 일 없었을 거야.”


“하지만...그런 과거사가 있었다니 몰랐어. 게다가 마드리고의 생존자라니...”


그녀는 힘없이 탁자 위에 엎드렸다. 정치를 배운 사람이라면 마드리고는 모를 수가 없는 명칭이었다.

전쟁 중에 발생한 지독한 전염병. 유례도 없고 치료법도 없었다. 전염성과 치사율 어느 것도 기존의 역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도시를 탈환하자 리크나이츠 군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병에 걸린 자들, 아니 걸렸다고 의심되는 자들까지 모조리 죽여 불태우는 것. 사실상 마드리고의 시민 전원이었다.

그 전무후무한 대학살에 리크나이츠는 물론 적국 아스트리카도 경악할 정도였다. 마드리고 사건은 이후 정치가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갔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가?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합리’에서 기인한다면,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루도는 가만히 천장의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유미르네에게 감정이 이입되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마드리고 사건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전부 다는 심하잖아. 거기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건 아니지.”


인륜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발언이었다. 때문에 루도는 레미나가 당연히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어. 실제로 역병은 주민 전원에게 퍼져 있었으니까. 지휘관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야.”


“뭐? 너 무슨....”


“그리고 가만히 놔두었더라도 어차피 모두 죽었을 거야. 그 역병은 일단 발병하고 나면 치사율은...”


레미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도는 흠칫 놀라 상체를 뒤로 뺐다. 이전에도 종종 본 적 있는, ‘정치가’ 레미나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굳게 다문 아랫입술은 음영이 드리워졌기 때문인지 다소 쓸쓸해 보였다.


“치사율은 95%였어.”


루도의 눈썹이 괴상하게 꺾였다.


“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전대미문인 거야. 애초에 전염병은 감염으로 넓게 퍼져나가니까 위험한 거야. 그런데 마드리고의 그것은 달랐어. 잠복기도 짧은데다 치사율도 어마어마하게 높아. 이런 건 전염병이라고 부르지도 못해. 널리 퍼지기도 전에 보균자를 모조리 죽여버리는 걸.”


“그러면...”


루도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그 병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타났단 말인가. 아무 징조도 없이, 도시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처음 보는 병인데도 치료연구도 하지 않고 단번에 살처분 명령을 내렸다고? 윗선치곤 판단이 너무 빠르네. 너무 빨라.”


레미나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맞아. 다행이라고...해야 할까. 최고의 전문가가 있었거든.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


“전문가? 뭐하는 의사였는데?”


“의사가 아니야. 신의 아이 전문가지. 너도 아는 사람이야 루도. 바로 세르딕 카르지카.”


하마터면 의자 뒤로 넘어갈 뻔했다. 루도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았다. 레미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이런 분위기에서 농담을 던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말은...그 전염병은..”


“펠아람의 아이가 소환될 때 절대소거가 행해진 것과 같은 맥락이야. 마드리고 한복판에 루프리모의 아이가 강림했고, 그 즉시 법칙파괴 급의 권능이 발동했어. 세르딕은 그것을 대재앙(Catastrophe)이라고 불렀어.”


절대소거와 맞먹는 권능이라면 그 파급력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세르딕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전염병은 그 이상 퍼지지 못하고 빠르게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 결과 마드리고에는 곳곳에 시체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주민들의 유해로 구덩이는 아무리 깊게 파도 금세 가득 찼다. 시체 태우는 불길이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리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 남은 극소수의 생존자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카이안은 세르딕에게 구조되어 류이너스 교단에 맡겨졌다. 유미르네는 후커 발렌스에게 거두어져 델키아로 갔다.


“그 전염병을 만들어낸 게 루프리모의 아이라...카이안도 아직 여기까진 알지 못하겠지. 그나마 다행이야.”


“응. 신의 아이가 소환될 때엔 언제나 강력한 권능이 동반됐어. 제오프도 듣고 있겠지만 루프리모의 대재앙에 비하면 절대소거로 인한 피해는 정말 미미한 수준이었어.”


“그나저나 유미르네도 그 생지옥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단 말이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나쁘다고 해야 할까...”


그러자 레미나의 눈이 미묘하게 빛났다.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내뱉은 루도와 달리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루도 말대로야. 운이 너무 좋지. 왜냐하면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주민 중에 어린아이는 한 명도 없었거든.”


“...음?”


댕, 댕, 댕 -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기점으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대학살의 현장, 신의 아이, 아무것도 모른 채 벌벌 떨던 어린 소년과 소녀. 운명은 가혹하게도 그들을 결코 떼어놓지 않았다.


“대재앙(Catastrophe)은 신체접촉으로 전염되는 병이야. 설상가상으로 주민들은 신전 안에 가축처럼 감금된 상태였어. 싫어도 몸을 부대낄 수밖에 없었지. 어린아이들은 더 심했어. 부모가 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고아라도 타인과의 접촉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그래서 어린아이들은...가장 위험했고, 가장 먼저 발병했고, 가장 먼저 죽어갔어. 그리고 가장 먼저 살해되었고.”


루도는 그녀의 이야기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녀가 던지는 의혹은 그자체로 채찍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뒤죽박죽이 된 사고는 쉬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하고 싶은 거야?”


레미나가 말했다.


“아무것도 단정할 수는 없어. 오히려 내가 궁금하다고. 그 아비규환의 구덩이에서 어떻게 유미르네는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전염병도 걸리지 않고, 학살도 피해가고. 열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어떻게?”


창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루도는 섬뜩한 기분에 그만 쥐고 있던 포크를 놓치고 말았다. 포크는 접시와 탁자 모서리, 의자를 차례대로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요란한 음향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것은 고요뿐이었다. 루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오프도, 레미나도 마찬가지였다.



**************



“학, 하악...”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붙잡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지옥은 어린 그들에게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누나, 누나아~!”


아버지는 멍청한 얼굴로 최후를 맞이했다. 어머니는 다가오는 군인들을 향해 악에 받쳐 고래고래 저주를 퍼부었다. 물론 그게 그녀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심장에 창이 꽂히는 것을 본 순간 소녀는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울부짖거나 벌벌 떠는 다른 또래와 달리 그녀는 민첩하게 시체 사이를 가로질렀다. 군인 몇몇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따라붙었다. 하지만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꼬마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아앙! 누나아!”


하지만 소녀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아직 엄마에게 안겨 다니는 게 더 어울릴 법한 너무나도 작은 남동생이. 동생의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소녀의 속도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동생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재빨리 돌아가 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들이마시는 공기는 피와 쇠냄새로 비릿하기 짝이 없었다. 소녀는 엉엉 우는 동생의 얼굴을 팔소매로 쓱쓱 닦아주었다. 그 야무진 손놀림에 흙투성이였던 동생의 얼굴이 금세 깨끗해졌다. 소녀는 울먹이는 동생을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 뚝. 사내자식이 우는 거 아니야.”


“누나...무서워...”


“무섭기는. 이렇게 누나가 곁에 있잖니. 자, 일어설 수 있지? 영차!”


소녀는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장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미 도시 안은 시체로 가득했다. 일부러 한 구역에 몰아넣고 작전을 결행한 것인데, 워낙 주민의 수가 많은 탓에 완벽한 통제란 불가능했다. 소녀처럼 틈을 봐 달아난 사람이 제법 많았고, 곧 그들을 처리하기 위한 추적조가 편성됐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는 잿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소녀는 멀리 보이는 성곽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성 밖으로 나가면 쫓아오지 않을 거야 - 그러나 도시의 성문이란 성문은 모조리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어린아이가 알 리 없었다.

소녀는 동생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부모님이 살해되는 장면을 목도하고도 이성을 잃지 않은 것은 바로 동생의 존재 때문이었다. 동생만은, 동생만은 지켜야 한다. 그런 집념이 소녀의 발을 움직였다. 동생 역시 소녀에게 밀착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누나란 하나 남은 가족이자 스승이었으며, 동시에 구원자였다.

소녀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니암.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가 지켜줄게.”


그렇게 시체밭이 된 광장을 지나 거주지구로 들어설 즈음이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모양새를 보아 도망자를 처단하기 위해 미리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어린아이가 나타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니암은 병사들의 손에 들린 거대한 검과 도끼를 보곤 겁에 질렸다.


“누, 누나...”


“니암! 내 뒤로 와.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한편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유미르네의 귀에도 와 닿았다.


“너무 어리잖아...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상적인 평가는 집어치워. 모두 보균자다.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확실해.”


“난 못해! 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이란 말이냐. 지켜야 할 백성을, 내 손으로 죽이라니?”


“멍청한 놈. 저걸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 군 전체에 병이 퍼진단 말이다!”


“하! 그렇게 대단한 병이라면 이미 우리에게도 전염됐겠군. 그럼 우리도 처분되는 건가?”


두 병사는 곧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유미르네는 그 틈을 봐 슬금슬금 골목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주구역의 골목은 좁고 샛길이 많아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니암...누나가 하나 둘 셋 하면 저기로 뛰는 거야. 알았지?”


“...누나아...”


“셋! 뛰어!”


둘은 뒤도 안 보고 냅다 내달렸다. 싸우던 병사들도 뒤늦게 두 사람의 도주를 알아채곤 따라붙기 시작했다. 골목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오르는 호흡 속에서도 유미르네는 희망을 찾았다. 한 남자가 그녀를 막아선 것은 그때였다.


“아...!”


거대한 투핸디드 소드를 든 중년남자였다. 그는 유미르네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체구가 큰지 남자의 그림자가 두 남매를 집어삼킨 것처럼 보였다. 유미르네는 바들바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검은 무기라고 하기에는, 특히 어린아이를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남자를 보곤 자세를 가다듬었다. 남자는 병사들의 지휘관인 모양이었다.


“아쟉스 대장님...”


전염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남자는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유미르네를 확인하기 위해 쓰고 있던 투구의 눈가리개를 올렸는데, 그 퀭한 눈동자는 소녀의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되었다.

병사들은 쭈뼛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명령이 가혹하다고 상관이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처분’을 주저하던 병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어린아이도...입니까?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이런 건...”


남자는 침묵했다. 그의 오른손은 대검의 손잡이를 쥔 채 요지부동이었다. 유미르네는 그 몇 초가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남자를 뚫고 달아나야 했다. 그녀는 돌파할 생각으로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동생을 이끄는 작은 손목에 다시금 핏줄이 돋았다.

명치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쿨럭...”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가볍게 기침을 했을 뿐인데, 목구멍을 타고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을 보자 자신이 뱉어낸 피로 가득했다. 무릎이 덜컥 꺾였다. 시야가 흐렸다. 도달해야 할 골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어라? 이건...”


유미르네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래, 이웃사람들이 걸린 그 병이로구나. 이제 곧 파리가 몰려들겠지.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니암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도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한결같았다.

내가 죽으면 내 동생은 누가 지키지?

갑자기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장! 저건...”


“그거 봐. 내가 말했잖아! 전원감염이다. 의심할 거리도 없다고!”


그녀의 발병에 병사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명령을 거부하던 병사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로막아선 남자의 어깨가 움직였다. 그는 투핸디드소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유미르네는 그 거대한 쇳덩이를 공허하게 응시했다. 크다. 저걸로 내려치는 거구나.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된 토혈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내가 처리하겠다. 기름과 불을 가져와라.”


“아쟉스 대장...!”


“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사사로운 정은 버려라. 우리는 지금 한 마리 짐승일 뿐이야.”


남자는 자기암시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미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수한 전장을 거쳐 왔지만 오늘처럼 고통스러운 날이 없었다.


“용서해다오. 우리를...우리를....!”


남자는 힘겹게 검을 내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니암이 갑자기 박차고나와 유미르네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이를 지키기 위해, 핏덩이 같은 꼬마가 움직인 것이다. 그 숭고한 행동에 남자의 어깨가 흠칫 비틀렸다. 하지만 이는 검의 궤도를 완벽히 물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써컹,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유미르네는 동생의 몸에서 나온 살점이 허공에 흩날리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


“아....”


비명은 없었다. 니암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축 늘어졌다. 동생의 손가락에서 시시각각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절개된 등 사이로 뼈인지 희멀건 게 보였다.


“니...암...”


눈물이 흘렀다. 동생이 죽는다는 사실이,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우리에게는 아무 죄도 없는데, 그저 살려고만 했을 뿐인데.

니암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미르네는 더 이상 그를 보듬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토혈이 터졌고, 그녀는 포개듯 동생 곁으로 무너져 내렸다. 의식이 멀어져갔다. 남매가 보여준 사랑에 병사들은 끝장을 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니암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는 유미르네는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누나...죽지 마...”


빛이 느껴졌다. 너무도 아늑하고 따스한 빛이었다. 고통은 사라지고 이내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그들은 마주잡은 남매의 손을 떼어놓았다.

소녀의 눈물이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가여운 내 동생...내가 지켰어야 했는데. 가여운 내 동생....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 작성자
    Lv.27 두개골
    작성일
    15.06.01 04:43
    No. 1

    이렇게된거구나... 유미르네 불쌍 ㅠ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9 위너스파이
    작성일
    15.06.01 08:47
    No. 2

    그 가여운 동생이 지금 살아서 눈앞에 있단걸 알아야 할텐데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퉁실퉁실
    작성일
    15.06.01 10:46
    No. 3

    혹시 했는데 이렇게 ㅎㅎ; 마리네 떡밥과 루도 꿈속에서 제오프(로 보이는)의 힘 관련 떡밥 등.., 회수될 것이 어마어마 하네요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아즈가로
    작성일
    15.06.01 22:56
    No. 4

    이제 거의 왔군요. 그간 비축분이 많이 쌓이셨기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el*****
    작성일
    15.06.04 16:47
    No. 5

    좋은 애기라고->얘기라고
    레미나의 미묘하게 빛났다->레미나의 눈이~
    마드리고 전염병의 진상이 참 후덜덜하죠ㅠ
    다른 사람도 그렇지만 유미르네의 불행은 진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레인Rain
    작성일
    15.07.14 13:26
    No. 6

    건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소울K
    작성일
    16.04.18 10:00
    No. 7

    유미르네의 친동생이.. 니암이라니ㅠ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저주하고 증오하는 중이고ㅠㅠ
    아쟉스는 그들의 원수가 아니네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람의 계승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일러스트를 받았습니다! +7 15.07.26 1,297 0 -
공지 세계관 - 데루루피아의 편지 +7 15.03.22 3,315 0 -
345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4) +104 15.09.01 2,318 49 24쪽
344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3) +15 15.08.20 1,059 26 20쪽
343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2) +11 15.08.09 1,066 35 23쪽
342 람의 계승자 - ep.7 - 바이올렛(1) +11 15.07.26 1,181 39 22쪽
34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4) +23 15.07.20 1,215 40 11쪽
34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3) +26 15.07.13 1,132 53 16쪽
33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2) +35 15.06.12 1,401 51 11쪽
33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1) +11 15.06.10 1,014 42 11쪽
337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0) +12 15.06.03 1,014 36 19쪽
336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9) +6 15.06.02 1,093 32 17쪽
335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8) +6 15.06.02 953 31 15쪽
334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7) +2 15.06.02 970 27 16쪽
333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6) +3 15.06.02 973 28 20쪽
332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5) +2 15.06.02 925 25 15쪽
33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3 15.06.02 990 25 19쪽
»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7 15.06.01 914 33 18쪽
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9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