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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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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31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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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DUMMY

세실이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오르텔은 순간 그녀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튀어 오른 흙과 자갈만이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큿, 이건 대체...”


세실은 나무 사이를 누비며 엄청난 속도로 오르텔에게 다가왔다. 성장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5m에 달했다. 오르텔은 그녀를 향해 이리저리 마법을 조준하려 했다. 그러나 나무와 덤불을 장애물삼아 움직이는 세실의 속도는 눈으로 좇기 버거울 정도였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둘 사이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오르텔은 요격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재빨리 다음 수를 전개했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지면의 돌과 흙이 일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세실의 신체 역시 역전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을 허우적댔다. 오르텔이 그 모습을 보고 쾌재를 질렀다.


“크하하하! 제대로 먹혔군. 레비저도 별 거 아니군그래.”


그는 멈추지 않고 지면의 물체를 상승시켰다. 그의 능력이라면 40m 정도는 가뿐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최고도에 다다를 때까지 상승시킨 후에 마법을 해제하면, 속절없이 지면에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세실은 순간 멈칫했으나 당황하지 않고 대응했다. 싸늘하게 뜬 시선이 오르텔의 심장을 향했다.

퍼걱. 그녀의 머리카락 몇 줄기가 지면에 박혔다. 땅에 닿은 머리칼의 길이는 자그마치 10m에 달했다. 오르텔의 입가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늘어나리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세실은 또 다른 머리카락을 지면에 박으며 천천히 오르텔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금사로 이루어진 기다란 다리처럼 보였다.

그 기이한 자태에 오르텔은 순간 넋이 나갔다. 세상에 10m도 넘는 머리카락을 수족처럼 부리는 악마라니, 그 누가 경험해 보았겠는가. 중력역전으로 허공에 뜬 그녀는 햇빛을 등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싸늘하게, 마치 해충을 보듯이.


“블래스트 파이어볼(Blast Fireball)"


리버스 그래비티의 효과가 없자 그는 마지막으로 원소마법으로 세실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에 꽂은 머리칼을 활처럼 휘게 한 뒤 그 반동으로 순식간에 튀어나갔다. 눈으로 좇고 손으로 조준하는 기술로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 대응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일제히 오르텔의 몸에 꽂혔다.


“커어헉....!”


그의 사지가 대(大)자로 펼쳐졌다. 세실의 머리카락은 오르텔의 손바닥부터 어깨, 허벅지, 무릎과 발목에 이르기까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전신을 휘감는 격통에 오르텔은 입만 뻐끔거릴 뿐 제대로 된 신음도 뱉지 못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많은 머리카락 중 어느 하나도 치명상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머리칼의 폭포 사이로 세실이 천천히 내려왔다. 완전히 성인의 모습이 된 그녀가 앞에 서자 오르텔의 신체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해를 등져 어스름이 드리워진 사이로 금빛 동공이 시리게 빛났다. 오르텔은 그 모습에 압도되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죽이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신을 용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이 일제히 그의 몸에서 뽑혀 나왔다. 동시에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으나 오래가지 않아 멈추었다. 그녀가 일부러 동맥을 피해 공격한 까닭이었다. 오르텔은 격통 속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그는 안중에도 없이 르웨노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한 다발의 머리칼은 뱀처럼 그의 주위를 위협적으로 배회했다.

오르텔은 고통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 섞인 기침이 함께 했지만 그는 폭소를 멈추지 않았다.


“크...크크...크하하하! 관용론자 레비저라니, 촌극이 따로 없군. 쿨럭,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지 그러나!”


세실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정녕 그러길 바랍니까?”


“흐흐...승리했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이제 엘레노어의 존재는 만천하에 알려졌어. 크, 우리가 아니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그녀를 얻으러 올 것이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크흐흐.”


그러자 세실의 머리카락이 오르텔을 휘감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이미 사지가 봉해진 그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에 결박당해 세실 앞으로 끌려왔다. 그녀는 오르텔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


“끝까지 오만하고 무지하시군요. 어리석은 분.”


“....뭐?”


세실은 오르텔을 멀리 밀쳐냈다. 팔을 쓸 수 없는 그는 데굴데굴 굴러가 그대로 풀숲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사라져 버렸다. ‘날개’를 형성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반대입니다. 당신들이 그녀의 운명을 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당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뭉쳐 날개의 형상을 만들더니 이내 힘차게 펄럭였다. 그에 맞추어 세실의 신체가 서서히 상승했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금빛 잔영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내 방향을 설정한 그녀는 르웨노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이...이런 말도 안 되는...”


남자는 자신의 패인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왕국 최고의 암약부대인 오르텔 수색대의 일원으로, 전원이 A급의 아티팩트로 무장했다. 게다가 2대 1의 상황, 수적으로도 완벽한 우위에 있었다. 상대는 그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숱하게 쓰러뜨려온 기사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 그의 가슴에는 검이 꽂혀 있었다. 먼저 당한 동료는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지....독한 놈...처음부터...헉...”


짧은 단말마와 함께 남자는 고꾸라졌다. 그리고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


르웨노는 천천히 검을 떨어뜨렸다. 들이마시는 숨이 텁텁했다. 설마 오르텔 수색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내리라고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는 성공했다.

비록 승리하진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복부에 뚫린 구멍을 보며 피식 웃었다.


“쿨럭...컥...”


그는 처음부터 몸을 아끼지 않고 공격에 모든 힘을 퍼부었다. 배가 뚫리고 손가락이 날아가도 개의치 않고 적을 공격했다. 그의 동귀어진에 상대는 당황했고, 르웨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쾌청한 날씨였다. 달아난 드뷔사와 엘레노어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신의 아이니 악마니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끼어든 것부터가 문제였다. 애초에 세상의 구원 따위 관심에도 없던 그였다. 하지만 억울하거나 후회가 들진 않았다. 어차피 그날 전우들과 함께 죽었을 운명이니까.

다만 어째서인지 한 소녀가 눈에 밟혔다.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그때 하늘에서 어떤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르웨노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금색 날개를 머리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천사라면, 뭔가 날개의 위치가 어정쩡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르웨노!”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무릎밖에 오지 않는 작은 소녀였을 텐데, 어느새 훌쩍 자라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갸름한 턱선과 콧날, 굴곡 있는 몸매와 늘씬하게 뻗은 다리. 이제는 자신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다. 땅바닥까지 내려오는 금빛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거룩하기까지 했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르웨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악마라면 흉측하기라도 하든가. 쿨럭...!”


“르웨노!”


그가 피를 토하자 세실은 허겁지겁 그를 부축하러 달려왔다.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르웨노의 부상상태를 보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어째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싸운 건가요. 어째서 달아나지 않았나요!”


세실이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르웨노는 공허하게 웃었다. 이미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명령하지 않았습니까...그녀들을 지키라고...”


“네? 그런...”


세실은 그가 자신을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스트리카 황실을 기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오히려 르웨노는 세실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녀가 황제를 연기하는 동안 보여주었던 친절과 관용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각인되었다. 머리로는 부인하면서도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최후가 오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저는..틀렸습니다. 어서 가십시오...엘레노어가 있는 곳으로...”


그러나 세실은 르웨노에게 못 박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표현은 없었으나 단지 눈빛만으로도 르웨노의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된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눈물이 주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악마의 눈물은 사람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어째서인가요. 저는 가짜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나라를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낸들 알겠습니까. 어쩌면 날 때부터....반역자였는지도 모르죠. 쿨럭, 하여튼....”


르웨노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녀의 발치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 기사가 주인에게 남기는 최후의 경의였다. 그는 절도 있게, 그러나 잔뜩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나이다....폐하.”


어쩌면 다른 형태로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군과 기사, 악마와 인간이 아닌 보다 순수한 형태로. 바람이 들판을 타고 불어왔다. 세실의 머리칼이 물결쳐 르웨노의 뺨을 간질였다. 그 기분 좋은 감촉에 르웨노는 마지막으로 피식 덧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디, 꿈을 이루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풀썩 풀밭에 쓰러졌다. 세실은 그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상심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재차 날개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눈물은 멈추었으나 말라붙은 자국은 한동안 그녀의 뺨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엘레노어...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제 꿈은 가치 있습니까?”



****



한 번 위치를 포착하자 이칼롯은 앞뒤 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갔다. 제스터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오르텔 수색대의 눈을 피해 엘레노어를 찾고 있었다. 이칼롯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스터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웨노쯤은 일격에 죽일 수 있다. 세실이 어디까지 커버해줄 지는 몰라도 르웨노 단독으로 엘레노어와 드뷔사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제스터가 엘레노어를 납치해 마법으로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울타리를 넘고 호밀밭을 가로지르자 거름을 쌓는 창고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이칼롯은 제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예의 촉수를 전개한 채 드뷔사를 위협하고 있었 다.


“자, 얌전히 그 소녀를 내놓으시지요 아가씨. 나도 쓸데없는 살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뷔사는 기절한 엘레노어를 업은 채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그녀는 안 되는 체력으로 엘레노어를 들쳐 업고 달리느라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혼자였더라도 달아날 수 없을 지인데 이런 상태로 난관을 타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서 어쩔 생각이시죠?”


“죽어도 좋다면 알려드리죠. 자아, 더는 시간낭비하기 싫습니다. 어서.”


땀에 젖은 흑발이 뺨에 붙어 거치적거렸다. 드뷔사는 힘겹게 이를 걷어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제스터죠? 얼마 전까지 세실과 함께 했던 거로 아는데요. 세실은 지금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대치할 필요가 있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물음이었으나 의외로 제스터는 여기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그의 모호한 입장을 정곡으로 찌르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드라칸의 편도 세실의 편도 아니었다. 로샤단과는 더더욱 인연이 없었으며 현재 속한 안개송곳니에도 그리 큰 충성심은 없었다. 그는 악마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다. 과격파(드라칸)와 온건파(세실)의 중간단계에 위치했지만 그렇다고 은둔해 사태를 관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를 즐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말했다.


“글쎄요. 왜일까요. 세실 평의원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레이시 단장도, 드라칸도 나름의 장단점이 있죠. 하지만 누구를 선택하든, 중요한 것은 칼은 제가 쥐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베릴의 아이처럼.”


그는 천천히 드뷔사에게 다가갔다. 등 뒤로 뻗은 촉수는 그녀가 달아날 곳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촉수가 엘레노어를 휘감기 전, 드뷔사는 제스터의 등 뒤로 이칼롯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녀는 엘레노어를 멀리 뿌리치며 외쳤다.


“제르비안씨!”


이칼롯은 보조용 숏소드를 투척함과 동시에 전력으로 튀어나갔다. 엘레노어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제스터는 그의 기습에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등에 숏소드가 꽂힌 뒤였다.


“키이익!”


위기의 순간 드뷔사는 엘레노어를 최대한 멀리 밀어 던졌다. 그래봐야 2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제스터의 시선을 분산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다급하게 촉수의 방향을 돌리려 했으나 이번에는 최대로 전개된 텔슈피드의 전광이 그와 엘레노어 사이에 내리꽂혔다.


“이...러언!”


그 순간 제스터는 선택을 해야 했다.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재차 엘레노어에게 접근하느냐. 어느 것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의 시야에 드뷔사가 들어왔다. 그는 지체 없이 촉수로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는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를 방패삼아 몸을 가리자 예상대로 이칼롯은 우뚝 멈춰 섰다.


“크윽...네 이놈!”


이칼롯은 그녀가 인질로 잡히자 일순 사고가 마비되었다. 위협적으로 치켜뜬 눈은 그러나 파리하기 질린 드뷔사의 얼굴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르비안씨....”


“하하하, 이거 정말 지독한 악연이군요, 이칼롯 제르비안. 이제 좀 그만 봤으면 싶은데요.”


제스터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역시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텔슈피드를 이용한 공격은 제아무리 슬러터라도 버텨낼 여지가 없었다.

이칼롯이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확대된 동공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여자는...놔줘라. 일대일로 끝을 내자.”


스스로 말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 그만큼 이칼롯은 평정을 잃은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제스터는 그의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신지. 그보다 더 괜찮은 방법이 있군요. 당신이 검을 버리고 패배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


“오우, 로샤단의 대장님. 난 정말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난 그저 베릴의 아이만 데려가면 됩니다. 그럼 당신과 이 아가씨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어떻습니까?”


그때와 놀랍도록 흡사한 상황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붙잡히고 자신은 패배를 강요당한다. 당연하지만 제스터가 약속을 지킬 확률은 어디에도 없었다. 과거에 요수아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이칼롯은 아무리 애를 써도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머리채를 붙잡힌 채 떨고 있는 드뷔사의 모습이, 그가 지키지 못했던 여동생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었다.


“네가....약속을 지킨다고 어떻게 보장하지?”


“그렇군요. 하지만 피차 계약서나 쓰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 어서 선택하시죠.”


제스터는 차츰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칼롯이 무기를 버리든 아니면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든 그에게는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는 텔슈피드의 지속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찮은 마법검만 사라지면 구태여 인질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드뷔사...!”


그녀가 대체 뭐라고 이리도 현기증이 난단 말인가. 엘레노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사실 갈등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머리와는 별개로 그의 손은 천천히 검을 내려놓고 있었다. 마치 온몸에 주박이 걸린 것만 같았다.


“약속...은 반드시...”


똑같다. 이칼롯은 이미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장을 해제하고, 적은 그런 그를 비웃는다. 그리고 인질은 정해진 수순처럼...


“...제르비안씨. 고개 좀 들어봐요.”


막혀있던 시야가 일순 환해졌다. 그녀의 담담한 한 마디에 사지를 옭아매던 결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드뷔사를 바라보았다. 질리게도 변화가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는 철저히 양분되었다.


‘나는...’


과거의 그는 무력했다. 자만에 빠져 통찰하는 힘을 잃었고 그 결과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여동생 유디. 그녀는 주저하는 그를 향해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노라고.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강렬한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검을 들어요」


드뷔사는 울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목을 옥죄는 촉수가 답답한 듯 긴 날숨을 토해내고는, 이내 초연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유디가 아니었고 이칼롯 역시 과거와는 달라져 있었다. 잦아들던 텔슈피드의 전광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굽이치던 번개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기다란 검의 형태로 갖춰졌다. 제스터가 그 모습을 보곤 당황하여 말했다.


“잠깐,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습...”


푸른 전광 속에서 이칼롯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마주선 드뷔사가 그를 보곤 꿀꺽 침을 삼켰다. 검을 휘두르기 전 그가 짧게 말했다.


“용서하시오.”


콰가각! 번개의 검이 제스터와 드뷔사 둘 모두를 관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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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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