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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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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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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02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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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DUMMY

그날 밤 유미르네의 숙소로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아마 루도나 마리네가 보낸 것이리라. 그들에게는 솔직히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뒤였다. 소꿉친구의 우정 따위 복수에 비하면 대단할 것도 없는 가치였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두 사람을 더욱 실망시키게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철천지원수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심드렁하게 편지를 펼쳤다. 쪽지에는 투박한 글씨로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늦기 전에 와달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디리터였다.


“캬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랄까? 마침 이 작자를 죽이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시간과 장소까지 적어 보내주니 황송하여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나-아쁘지 않네. 불러주시니 기꺼이 한 곡 추러 가야겠지?”


그녀는 행여 훼손될까 편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디리터 아쟉스의 멍청함이 자신을 돕고 있었다. 이대로 그 남자의 방을 찾아가 명치에 검을 꽂아 넣는다. 그다음에는 적당히 물건을 흐트러뜨리고 자신의 옷을 대강 찢은 후에 비명을 지른다. 물론 증거는 필요하니 죽이기 전에 적당히 유혹해 그곳을 세워놓는 것도 필요하다. 그녀의 테크닉이면 10초도 안 걸리는 일이었다.

소리를 듣고 경비병이 도착하면 상황의 완성이다. 정욕을 참지 못해 동료를 강간하려 한 남자의 최후다. 당연하지만 루도와 마리네는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리터가 직접 쓴 편지와 발기된 성기가 존재하는 한 그들의 외침은 허공에 흩어질 게 뻔했다. 어떤 검시관이 와도 유미르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리터가 그녀의 원수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그것으로 복수가 끝이 난다. 이제는 죽고 없는, 천국으로 간 동생 니암에게 올리는 진혼곡이다. 그녀는 일부러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를 입고는 거리로 나섰다. 지나치던 남자 몇몇이 그 곡선에 홀려 말을 걸어올 정도로 그녀의 자태는 고혹적이었다.

에스터크의 손잡이가 오늘따라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컨디션도 최고였다. 마치 하늘이 자신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해준 것만 같았다.


디리터는 이전 안개송곳니가 습격했던 건물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그녀를 발견하곤 깍듯이 경례했다. 유미르네도 이례적으로 상큼한 미소를 지어 답했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명해줄 고마운 사람들이다.

노크따위 필요 없으니 곧장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디리터는 창가에 걸터앉아 루프리모의 수정이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왔구나.”


가식적인 인사도, 심지어 의례적인 묵례조차도 없었다. 디리터는 유미르네를 쓰윽 한 번 훑어보고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그 조용한 위압에 유미르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난 순간 바람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디리터가 말했다.


“단둘이 이야기하기는 처음이네. 뭐 이유야 네 쪽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분노가 들끓었다. 니암을 죽인 남자의 아들. 그 남자를 닮은 얼굴과 목소리, 체구, 무엇보다도 물려받은 게 틀림없는 니암을 벤 투핸디드소드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미르네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했다. 디리터는 감이 좋기로는 로샤단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방에 들어온 순간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절제된 어조로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볼일이죠? 밤일이라도 어울려 달라고?”


“아리따운 아가씨와 하룻밤인가...거절할 이유가 없지.”


좋은 반응이다. 물론 농담조로 대응한 것이겠지만 자연스레 접근할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이렇게 상황극에 어울려주는 척하며 사타구니를 몇 번 만져주고, 바로 심장에 칼을 꽂는 것이다. 그녀는 농염한 미소를 흘리며 디리터를 향해 걸어갔다.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발검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가슴이 격정으로 가득 찼다.

오늘이다. 드디어 오늘, 동생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


“...네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디리터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유미르네가 던지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레미나와 제리온, 심지어 이칼롯과도 살갑게 지냈으나 유독 디리터와는 말을 섞지 않았다. 물론 디리터는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도, 루도와 마리네가 없었다면 그것이 진즉에 이루어졌으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상성이 안 맞는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넉살좋게 넘겨왔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밤은 달랐다.


“싫어한다라...그런 귀여운 표현이 다라면 실망할지도 모르는데.”


“뭐든 상관없잖냐. 굳이 그 부분을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그럼 왜 불렀을까? 정말로, 밤일?”


희열이 들끓는다. 침착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아직 죽이지도 않았는데 이런 즐거움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결행했을 것을.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으면 어느 정도의 쾌감이 올지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

디리터는 그녀가 흥분하든 말든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유미르네를 향해 있었으나, 동시에 카이안에게도 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를 싫어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카이안에게는 너무 그러지 마라.”


뭐야, 또 그 이름인가 싶어 실소가 터졌다. 자기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것도 모르고 남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이제는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와의 거리는 이제 다섯 걸음이 채 되지 않았다. 일단 장단은 맞춰줘야 하기에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말했다.


“왜일까? 루프리모의 아이라서? 하지만 나는 이제 로샤단이 아닌데에. 종교 같은 거 애초에 믿지도 않았고.”


그런데 디리터는 전혀 뜻밖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얘기는 들었다. 너도 마드리고 출신이라면서? 전염병이 돌았다던.”


“....!”


그 순간 입가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점철되었던 가식이 벗겨지자 분노가 여과 없이 표정에 드러났다.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에스터크를 뽑아들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지금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나.”


디리터는 유미르네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카이안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과거사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화해의 열쇠가 되진 않을까 기대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그의 낙천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단순한 오지랖이었다. 하지만 그 상냥함이 두 사람을 연결했고, 그 순간 운명은 바뀌었다.


“별 거 아니야. 카이안도 마드리고 출신이거든. 너처럼.”


공기가 멈추었다. 시계바늘은 돌아가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그리고 세계가 일제히 고요 속에 파묻혔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에?”


“거 안 그래도 살기 빡빡한 세상인데 같은 고향 출신끼리 으르렁거릴 것까진 없잖냐. 그녀석도 거기서 누이를 잃었다더만.”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뭘까, 저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카이안 루시올라가 마드리고의 생존자? 루프리모의 아이가 마드리고 출신? 그녀는 잡념을 떨쳐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마드리고의 주민이 한두 명도 아니고, 어딘가 다른 생존자가 있었겠지, 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정된 각본처럼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느새 복수는 안중에도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카이안 루시올라...아니 루시올라 가문은 레인스터의 명망있는 기사 가문이라고...”


디리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루도가 얘기 안 했나? 그 이름은 가명이야. 신분을 숨기려고 본명을 버리고 루시올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거지. 벌써 5년도 더 된 얘기야.”


“그럼...본명은...”


디리터는 멋쩍게 콧잔등을 긁었다. 그 이름으로 불러본지가 워낙 오래 전이라 입에서 굴려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카이안 본인도 본명보다는 현재의 이름에 만족하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었으나 유미르네의 안달이 난,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뭐 상관없겠지. 이미 자각한 마당에 뭘 더 숨기겠냐. 그 녀석의 본명은...”


묻지 말았어야 했다. 듣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저주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복수귀로 살아갈 수 있었다. 더 상처받을 일도 없이, 더 행복해질 일도 없이 살아갈 수 있었는데 - 신은 어찌하여.

시계바늘은 무심하게 움직였고, 이윽고 디리터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니암이야.”


.


.


니암.


니암.


...니암?


그녀의 무대가 사라져간다. 장막이 드리워지고 조명이 꺼지고 텅 빈 무대에는 어둠만이 남는다. 그렇게 지독히 갈구하던 복수라는 명제가 장막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무대는 끔찍하게 고요하다. 주연도, 조연도 없다. 심지어 관객마저 없다. 아기의 환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밤마다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그 악몽은 대체 뭐였던 걸까.


“그러니까 내 말은, 적당히 양보하면서 친하게 지내자는 거다. 그래야 좀 앞으로도...어이, 듣고 있냐?”


눈앞이 캄캄했다. 디리터가 코앞에서 말하고 있는데도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현기증이 나 자신이 서 있는지, 천정에 매달려 있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뒤집힌 세상이 일렁이며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니암?


“유미르네! 너 괜찮냐?”


디리터의 외침에 꿈에서 깬 사람처럼 눈이 번쩍 떠졌다. 쨍그랑 - 손에 힘이 풀려 에스터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언제부터 뽑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디리터가 그 모습을 보곤 친절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이쿠, 칼 떨어졌다 야. 날 상하지 않게 조심해야지.”


그러나 유미르네는 검을 받지 않았다. 디리터가 에스터크를 주워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이. 유미르네?”


그녀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목적지는 명확했다. 멍한 눈동자와 달리 다리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디리터는 그녀를 쫓으려다 이내 손에 든 에스터크로 시선을 옮겼다. 검사가 검까지 내팽개치고 갈만한 일이 있던가? 그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러지 저 녀석...”




********



카이안은 침대에 누워 멀거니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이 신의 아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에리안델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긴 했으나 여전히 미래는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한참을 고민했다. 침대가 오늘따라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새로 꺼내 피운 촛불이 어느새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가 왈칵 문을 열어 재낀 것은 그때였다.


“우왓, 뭐, 무슨...”


유미르네는 가타부타 한 마디 없이 카이안의 멱살을 낚아챘다. 카이안은 저항하려 했으나 힘에 밀려 맥없이 끌려 나갔다. 그녀가 말했다.


“너...사실이야? 마드리고 출신이라는 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카이안은 영문을 몰라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댔다. 그에게는 그저 유미르네가 작심하고 자신을 해치려 왔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 무슨 망발을 하려고...이거 놔!”


“묻는 말에 대답해! 마드리고 출신이냐고!!”


유미르네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협박이라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웠다. 카이안도 눈치 챌 정도로 그녀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알 리가 없는 그는 더욱 날이 선 태도로 그녀에게 맞섰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언젠가 처단해야 할 악인에 불과했다. 만약 손에 칼만 쥐어져 있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마드리고 출신인데 뭐 어쩌라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순간 몸에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카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맥없이 늘어진 어깨너머로 촛불 하나가 픽 꺼지는 게 보였다.

유미르네는 이제 처음으로 카이안을 직시했다. 그리고 카이안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경멸을 담아 회피했다. 둘 사이에는 영겁과도 같은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럼...혹시 알고 있어? 마, 마드리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었는지...그러니까 내 말은...”


카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이 여자가 또 무슨 모함을 꾸미고 있나싶었다.


“뭐. 전염병이 돌아 주민이 다 죽은 얘기? 그래. 거기서 부모고 형제고 다 잃고 고아가 됐지. 그게 알고 싶었어? 이제 들었으니 내 방에서 꺼져, 이 미친년아!”


이미 방에 들어온 시점에서 유미르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답변을 듣자마자 그녀는 재차 카이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그를 침대에 강제로 엎드리게 하고서 셔츠를 들추었다.

등에 대각선으로 난 희미한 자국이 그녀의 동공에 아로새겨졌다. 흉터는 아니다. 그러나 얼룩처럼 일직선으로 난 백색의 선은 그날 보았던 검의 궤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말도 안...”


그럴 리가 없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날의 악몽 속에서 동생은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었다. 등판이 베여 척추가 훤히 보이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상식적으로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카이안은 신의 아이, 그중에서도 생명을 관장하는 루프리모의 아이었다. 급속회복은 루프리모의 대표적인 권능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날 루프리모의 아이가 권능을 행했다고 가정하면 후유증 하나 없이 회복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빛.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유미르네는 빛을 느꼈었다. 그 빛은 누가 만들어냈었지? 그 빛은...무슨 색이었지?


“당장 놓지 못해? 더러운 년!”


한편 카이안은 강간이라도 당하나싶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는 유미르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앞뒤 안 보고 팔을 휘둘렀는데, 마침 팔꿈치가 그녀의 입을 가격했다. 유미르네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가 뒷걸음질 친 이유는 얼굴을 얻어맞아서가 절대 아니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나옴에도 그녀의 시선은 카이안에게 못박혀 있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딱 저 정도의 나이가 됐을 것이다. 그가 팔을 휘저을 때마다 금빛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염색에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모근부터 새로 돋아난 머리는 그것의 원래 색이 갈색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기억 속 동생의 머리카락은....잔인하게도 갈색이었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카이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노기에 유미르네의 어깨가 일순 격동했다. 그녀가 어찌나 몸을 떠는지 주머니 속 동전이 부딪쳐 잘그락, 소리를 낼 정도였다. 가설이 확신으로 변해감에 따라 그녀의 동공도 경악스럽게 커졌다.


“...니...”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카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이내 그의 저항에 튕겨졌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즈음 소란을 듣고 호위기사 하나가 달려왔다. 그는 겁에 질린 유미르네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난 카이안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제야 차가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유미르네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가운데에도 간신히 몇 마디를 입에 올렸다.


“별, 별 거 아니야.....하하...마드, 마드리고의 생존자래서 아직도 그 병균을 옮기고 다니는지 궁금해져서...말이지.”


“당장 내 방에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유미르네는 비틀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 위태위태한 모양새에 기사 몇몇이 괜찮냐고 말을 걸어왔으나 이미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인적이라고는 없는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달빛조차도 가려진 숲의 전경은 오직 칠흑뿐이었다.

정처 없이 걷던 그녀는 곧 커다란 소나무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피해서 갈 생각도 않은 채 밑동을 잡고 주저앉았다.


“니...암...어째서...”


생각해보면 늘 위화감이 있었다. 발렌스 상회는 일찍부터 세르딕, 람카디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신의 아이와 연관이 있었다. 그런 비밀단체의 장인 후커 발렌스가 천애고아인 자신을 거두어준 까닭은 무엇일까. 그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자신만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일까.

카이안은 언제나 그녀 주변에 있었다. 자각을 막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명을 쓰리라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자명했다. 본명을 물어봤다면 누군가 대답해주었을 것이다. 루도와 마리네는 그만큼 그녀를 믿고 있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였다. 카이안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조금만 호의를 베풀었더라면. 한 번만 그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정신을 차리자 그녀가 버렸던 것들이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굽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구, 동료, 가족 - 그들은 언제나 그녀 주변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언제고, 어느 장소에나. 그러나 복수는 창백한 차양이 되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무너져버렸다.


“아아아아아악!!!”


그날 이후로 루도는 유미르네를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주하기가 거북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차츰 그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 궁금해졌다. 도시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위병이 득달같이 보고를 올릴 터였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여전히 유미르네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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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69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8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2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09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79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3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2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0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6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5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0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3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1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999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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