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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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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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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4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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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DUMMY

마을의 분위기는 한 달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연말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던 정취는 온데간데없이 장정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구를 챙기는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런 산간 마을까지 징병령이 떨어질 정도면 대도시는 이미 군대로 가득 찼을 것이다. 레미나는 지나가던 청년을 붙잡고 물었다. 마을 전체가 전화에 물들어서인지 회담 장소에 관한 정보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레인스터로 모이는 것 같더이다. 사흘 뒤라고 했지 아마.”


“사흘이요? 내가 미쳐 정말!”


익숙한 지명이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마을에서 레인스터까지 사흘 안에 주파하려면 말 그대로 ‘밥도 먹고 잠도 자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문명세계에 돌아온 기념으로 즐길 따뜻한 목욕과 침대는 물 건너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태의 중요성을 인지한 루도는 최대한 음식을 뱃속에 우겨넣고는 ‘특무별동대’의 권한으로 말 2필을 마련했다. 마을에 도착하고, 재차 출발 준비를 끝내기까지는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라니와 드뷔사는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물론 그녀들은 일행의 일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저 산중에서 만난 하나의 인연일 따름이다. 레미나도 그들이 어색해하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는 서둘러 작별을 준비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무 바빠서 두 분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네요.”


“아니에요. 많이 바쁘신 모양인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드뷔사가 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면 천하의 오지랖쟁이 레미나가 아니다. 그녀는 종이에 자신의 친필 사인과 몇 가지 당부 문구를 쓱쓱 적어 드뷔사에게 건넸다.


“리그니체로 돌아간다고 하셨죠? 여기서 수도 방면으로 내려가시다 시간 나면 아칸다스 요새에 한 번 들러보세요. 제가 드린 편지를 보여주면 리그니체까지 호위해줄 병사를 붙여줄 거예요. 여자 둘이서 그 먼 거리를 돌아가기엔 너무 위험하잖아요?”


“용설란을 주신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어찌 그런 수고를...”


“수고는 무슨. 그냥 좋은 인연이 지속되길 바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 혹시 병사들이 편지 내용을 이해 못 하면 제 이름을 대면서 ‘로샤단’이나 음...아! 케이달 위릭 단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시면 돼요.”


그러자 그 순간 미동도 않던 드뷔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것은 루도나 레미나는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의 작은 변화였으나, 엘라니만은 그녀의 동요를 감지하고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달 위릭. 잘 알았습니다.”


잊지 않으려는 듯 레미나의 전언을 곱씹고서 드뷔사는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두 어린 연금술사와의 만남은 이로서 마지막이었다. 여관에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 그녀들을 뒤로하고서 루도와 레미나는 또다시 시간에 쫓기는 여정에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도 없이, 한 달 내내 걸치고 다녔던 누더기와 같은 여행복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그렇게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말을 달린 끝에 그들은 무사히 회담 시간에 맞춰 레인스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거리에 들어섰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


AOC의 출정식을 기념 삼아 소집된 귀족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래 줄곧 수세로 일관했던 지라 귀족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이번 AOC연합군의 출범에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다. 북부 지방의 정규군이란 정규군은 모두 끌어모은 이 연합군은 총병력만 2만에 달할 정도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점령당한 북부 일대의 영지 수복은 물론이요, 기세를 타고 국경선까지 진출하는 일도 가능했다.

이제 막 작위를 계승한 가드너 바스카 백작 역시 장밋빛 기대에 부풀어 있는 젊은 귀족 중의 하나였다. 지금까지 리크나이츠가 밀린 것은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러한 악재는 물론 지금을 기점으로 반전될 것이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전쟁영웅!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레인스터 시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는 갖가지 환상에 빠져 연방 음흉한 실소를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는 마주앉은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백작님.”


“음? 아니야 아니야. 제대로 된 항전 하나 못해보고 맨발로 도망쳐왔다는 얼간이들이 누군가 궁금해져서 말이지.”


바스카 가문의 영지는 위치상으로 서쪽에 치우쳐 있던 탓에 이번 전쟁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반면 아스트리카의 진군 루트에 존재했던 영지의 귀족들은 현재 전부 도망쳐 타향살이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AOC의 출진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도 이들 귀족이었다.

물론, 실권은 바스카 백작처럼 가장 많은 병력을 차출한 귀족들에게 돌아가겠지만 말이다.


“이번 회담에 참가하는 귀족이 누구누구 있지? 아, 떨거지는 생략해줘.”


백작의 심드렁한 질문에 집사가 부지런히 책자를 넘기기 시작했다. 곧 그는 커다란 안경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우선 할라이데 여백작이 장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 외 에닌샤 자작과 아르카디아 백작, 루비크와 델키아에서도 병력을 파견했고요. 북부 출신은 아니지만 로드웰 후작과 메르디오스 공작도 참가하실 예정입니다.”


“로드웰과 메르디오스? 쓸데없는 거물들까지 납셨군.”


로드웰 후작과 메르디오스 공작은 중부지방에 연고를 둔 권세가로, 지금은 와해한 백천기사단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이었다. 뭐, 단순히 군사행동을 독려하기 위함이라면 모를까, 북부 귀족들의 자리에 백천기사단 쪽 사람들이 온다는 건 확실히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다.

백작은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누구와 친분을 쌓아야 할지, 또 누구와 개인적인 만남을 성사시켜야 할지.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의 최상위에 위치하려면 남보다 앞서 정치적인 야합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막 레인스터 성문을 지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마부석 쪽 창문이 열리더니 마부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부분 말입니다만 백작님, 방금 문지기에게 들은 건데 이번 AOC 회담에 뜻밖의 인물이 오신다고 합니다.”


“말해봐.”


“레미나 리크나이츠 공주님이십니다.”


가드너의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레미나 공주가? 얼마 전에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그, 그거야 소인이 어찌 알겠습니까요. 경비대 쪽에서도 오늘 아침에야 연락을 받았다고 분주한 모양입니다.”


레미나 공주가 온다. 그것만으로도 가드너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온 셈이었다.

그는 수많은 풍문을 뿌리고 다니는 이 젊은 공주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왕 즉위식 당일 반란으로 실종되고, 5년 만에 돌아와 동분서주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백이면 백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이라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황홀한 백금발 머리카락에 이목구비는 조각이라도 한 듯 완벽하다지?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나이가 전혀 들지 않았다 하니, 동화 속 공주님이란 바로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군. 레미나 리크나이츠라...아직 처녀라지?”


물론 원래의 신분을 생각하면 백작인 가드너와 일국의 공주인 레미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존재했다. 그러나 복귀한 직후 그녀는 추후에도 왕위를 계승할 생각이 없으며, 가능한 한 정치계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충격선언을 했다.

정치가의 맹세가 그렇듯 그 말이 어디까지 지켜질는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어찌 군침이 돌지 않겠는가? 젊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기로도 정평이 난 공주님이다. 남자 귀족이라면 누구든 손에 넣고 싶다는 달콤한 상상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혹시 아는가. 기나긴 밤을 독수공방하던 그녀가 떠오르는 신흥 귀족과 사랑에 빠질지.


“이럴 게 아니라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웰링턴, 귀금속 가져온 거 있나?”


주인의 망상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집사가 난처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성용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군사회담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러면 곤란한데. 휴튼! 마차 돌리게. 시간도 넉넉하니 보석상이나 한번 돌아봐야겠군. 상업도시니 품질 좋은 귀금속이 잔뜩 있겠지?”


가드너의 명령에 마차가 크게 방향을 틀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대로에는 마차가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사람들이 양옆으로 길을 터주고 있었는데, 마부의 명령에 말이 급선회하며 길가에 있던 행인을 덮친 모양이었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말이 놀라 멈추어 섰다. 다행히 사람을 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놀란 소녀는 그만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부가 사과 한마디 없이 재차 말을 출발시키려 하자 넘어졌던 소녀가 발딱 일어나 이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에 흙이 잔뜩 묻어있는 것도 잊은 채 화가 나서 따졌다.


“잠깐만요! 당신 때문에 마차에 치일 뻔했는데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적어도 사과는 하셔야죠.”


마부는 고압적인 태도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제법 자기주장이 강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류와 말을 섞어봤자 시간만 버릴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대충 손을 흔들고는 재차 말고삐를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성의 없는 행동이 소녀를 더욱 화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소녀는 더욱 격앙되어 마부를 다그쳤다.


“이보세요, 무시하기에요?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셔야죠. 제가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때 마차 창문이 열리며 가드너가 얼굴을 내밀었다. 움직이지 않는 마차와 밖에서 빽빽대는 여자의 소음 탓에 그는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지?”


“앗, 백작님.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웬 계집이 길을 막고 버텨서...”


가드너는 소동의 주범(엄밀히 따지면 그가 주범이지만)을 흘깃 훑어보았다. 예정된 수순으로 그의 얼굴이 경멸로 가득 찼다. 언제 감았는지 잔뜩 떡진 머리와 씻지 못해 누렇게 뜬 이마, 얼마나 코를 훔쳐댄 것인지 벌겋게 달아오른 인중과 춥고 건조한 날씨에 쩍쩍 갈라진 입술. 몸을 가린다고 걸친 건 옷인지 생가죽인지 넝마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씻겨놓으면 제법 모양새가 나올 듯도 하지만, 그 전에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풍겨오는 구릿한 냄새가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 또 그럼에도 또 기묘하게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였다.

소녀도 가드너의 노골적인 불쾌감을 느꼈는지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저기요, 그쪽 사람 실수로 사람이 다칠 뻔했는데 나 몰라라 넘어가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가드너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마차의 규모나 가드너의 옷차림만 보아도 자신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귀족이라는 걸 알 텐데, 꿋꿋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때아닌 소란에 주위의 사람들도 하나 둘 시선을 건네기 시작했다.

가드너가 입술을 찌푸리자 집사가 그를 대신해 후다닥 뛰어나왔다.


“이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게냐. 설령 부딪쳤다 해도 네년이 말에게 사과해야 마땅한 상황인 것을.”


“...뭐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시끄럽다. 괜히 우리 백작님 시간 잡아먹지 말고 썩 꺼지거라. 요망한 계집년 같으니. 하여간 천한 것들은.”


소녀의 낯빛이 차츰 시커멓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윤리나 양심의 문제가 아닌, 신분을 악용해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는 추태의 현장임을 인지한 것이다. 물론 가드너는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의 고향인 바스카 영지에서는 평민이 허락 없이 그에게 말을 거는 건 꿈도 못 꾸기 때문이다. 타지니까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거지, 고향에서 이런 ‘하극상’이 일어났다면 당장 채찍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 고압적이고 거리낌 없는 작태가 소녀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녀는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말했다.


“세상에나. 잘잘못을 따지는데 평민 귀족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백작? 문장을 보니까 어디더라...맞아. 바스카 가문 사람 같은데, 거긴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배우지 않는 모양이죠?”


“이, 이년이?!”


집사는 화들짝 놀라 가드너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발언이다. 사실 소녀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행여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세라 집사는 자진해서 짐가방을 뒤졌다. 곧 큼지막한 채찍이 그의 손에 얹어졌다. 소녀는 그 광경을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나 어머나. 가지가지 하네 정말. 그거 휘두르면 저 정말 책임 못 져요.”


그때 잠자코 있던 가드너가 입을 열었다.


“휘두르면 어쩔 거지?”


소녀가 표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소녀의 노기는 집사나 마부가 아닌 가드너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권위주의에 찌든 그를 향해 말했다.


“바스카 백작님, 제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나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사과라는 아주 값싼 보상을 바라는 게 상식에 어긋난 것인가요?”


집사가 더는 참지 못하고 채찍을 휘두를 요량으로 팔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가드너는 직전에 그를 멈춰 세웠다.


“그만하게 웰링턴. 오늘은 중요한 날인데 이런 자리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군. 내 피앙세를 찾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네? 하지만 백작님...”


“됐다. 그리고 거기 계집, 난 너 같은 부류를 잘 알고 있지. 건수 하나 잡았다 싶으면 아주 죽자 살자 달려드는 똥파리들이.”


“뭐, 뭐라고요?”


소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가드너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몇 개 집어 던졌다. 귀찮다는 듯 날려진 금화는 소녀의 뺨을 때리고 떨어졌다. 갑작스런 투척에 소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꺄앗, 지금 뭐 하는....”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지 않느냐? 어때, 이 정도면 하루 일당으로는 짭짤하지?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것보다도 더 쳐주었다.”


소녀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응시했다. 곧 자신의 행동이 돈을 뜯어내기 위한 거지의 수작으로 치부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 기가 막혀. 이봐요 백작님! 내가 웬만해서는 이름 잘 안 밝히고 다니는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그러나 소녀의 항의는 굴러가기 시작한 마차 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금화 세 개로 일방적인 보상을 끝낸 가드너가 마부에게 움직이라고 지시한 것이다. 소녀는 멀어져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발치에 떨어진 금화를 밟고는 씩씩대며 외쳤다.


“아악! 성질나. 뭐 저딴 인간이 다 있어? 백작 나부랭이 주제에 권위주의에 찌들어가지고는, 뭐 똥파리? 바스카 백작이었지? 두고 봐, 이따 아주 영혼까지 탈탈 털어줄 테니깐!!”


사실 백작이라는 작위가 ‘나부랭이’로 치부될 만한 위치는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폄하해도 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그녀는 금화를 주워 주먹에 꽉꽉 눌러 쥐고는 마차가 떠난 방향을 향해 집어 던졌다. 뒤늦게 나타난 일행이 그녀의 기행을 목격하고는 말했다.


“뭐해? 왜 돈은 던지고 그래.”


루도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노점에 들러 꼬치구이와 말린 과일을 잔뜩 사가지고 오는 길이었다. 레미나는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발을 팡팡 굴렀다.


“밥은 됐어! 당장 성으로 가서 목욕하고 옷부터 갈아입자.”


“...성까지 가려면 30분은 걸어야 되는데. 우리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그러나 루도의 이의제기는 레미나의 살벌한 눈초리에 묵살되고 말았다. 레미나는 레인스터 내성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다가 갑자기 홱 루도를 돌아보았다.


“왜, 왜?”


정말로 거지나 정신병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 추레한 몰골을 보고 있자니 바스카 백작이 자신을 천민으로 오해한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은 갔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래도 나름 유명인인데, 저렇게 주위의 시선도 잊고 냄새 풍기면서 음식을 우겨넣고 있는 것이다.


“좀 쩝쩝대며 먹지 좀 마. 사람들 눈 흘기는 거 안 보여? 다들 우리를 거지로 보잖아!”


루도는 그녀가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그럼 느긋하게 식당이라도 들어가면 되잖아. 시간도 남는데 왜 굳이 지금 성에 가는 건데.”


“아! 쫌!”


여기까지 오면 일단 이유를 막론하고 꼬리를 내리는 게 맞다. 루도는 그녀의 지시대로 최대한 조용히 꼬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레미나는 10보 정도를 걸어가다 다시 패악스럽게 말했다.


“그냥 걸어가는 와중에는 아무것도 먹지 마! 귀족예법은 어디다 갖다 처박은 거야!”


물론 루도는 귀족이 아니고, 예법은 알지도 못하고, 또 그런 걸 사용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예 기가 질려서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표표히 발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흡사 아지랑이같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쟤 성격 좀 변한 거 같지 않냐.』


루도는 제오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주위의 행인들도 레미나의 노기를 감지하고 거리를 벌리는 게 보였다.


“병약한 벙어리 공주님은 이제 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지.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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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7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1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9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30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7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40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3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8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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