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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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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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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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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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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DUMMY

신의 아이. 악마를 멸절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빛줄기와 함께 세상에 강림한 그들은 창조주의 명령을 성실히 이행했다. 펠아람, 루프리모, 아반케즈, 베릴, 에스터페른. 다섯 신의 아이의 무력 앞에 악마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로드(Lord) 없이 소수의 레비저만이 지휘하는 악마군은 빠르게 와해했고 극소수의 생존자만 남아 뿔뿔이 흩어졌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재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생존만을 바라며 오지로 도망친 자들도 생텀가드들은 끝까지 추적해 토벌했다. 깊은 산 속, 늪지대, 사막...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척박한 은신처에서 악마들은 행여 추적대가 오지는 않을까 공포에 떨며 살았다.

그렇게 500년이 흘렀다. 간혹 욕망을 참지 못해, 혹은 자포자기식으로 인간에 대항하는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악마는 인간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한 채 조용히 살아왔다. 때문에 두 번째 신의 아이가 강림했을 때 그들은 또 다시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신의 아이들이 취한 행동은 악마들이 최초에 겪었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토벌해야 할 악마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였다. 그 와중에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토지는 황폐화됐고, 심지어 실버드래곤 케리아돌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악마들은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신의 아이끼리 살육을 벌이게 된 배경에는 그들을 이용하려 한 인간들의 의도가 있었음을 파악했다. 최후의 신의 아이, 예토 클로람마저 실종되자 그들은 하나 둘 현세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직 500년이나 남았으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인간들끼리의 문제다. 우리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지금까지처럼만 살면 돼.”

누군가는 말한다. “인간세상은 혼란에 빠져있군. 이틈에 세력을 규합해 봉기하는 게 어떨까?”

그리고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라고 신의 아이를 이용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모두가 묻는다.


어떻게?


아루가 내린 성언으로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는 모두 닫혔다. 신의 아이와 드래곤이 존재하는 한 이 땅에 새로운 깃발을 꽂을 가능성도 없었다. 그들은 고립됐다. 아니, 배제됐다. 유일한 길은 정체를 숨긴 채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영원히, 이계의 불청객이라는 딱지를 안은 채.

현사의 세실은 이런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인 몇 안 돼는 레비저였다. 애초에 분쟁을 싫어했던 그녀는 깊은 오지에 숨어 기나긴 세월을 견뎌냈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갔다. 의미 없는 나날이 지나갔다. 1년, 10년, 어느새 원래 있었던 세계보다 인간계에서 숨어 지낸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그곳은 도피처이지 안식처가 아니었다. 인간과 드래곤과 생텀가드가 존재하는 한, 악마는 결코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천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는 체념했다. 이런 것은 삶이 아니야. 어디에도 안식처가 없다면 죽음으로서 안식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에게도 한 가지 바람은 남아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매일 밤 하루도 잊지 못해 밤잠을 설쳤던,


고향 - 헬라이아.


그곳의 풍경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자줏빛 저녁노을과 여명을 받아 반짝이던 세계수의 잎사귀들...그곳을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먼지가 되어 사라져도 좋으리.


그러나 아루의 성언은 그 어떤 차원 간의 연결도 금지했다. 그것은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의 법칙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그 법칙마저 파괴할 수 있는 존재 - 신의 아이 뿐.

이제 신의 아이는 증오의 대상이자 경외의 대상이며, 희망임과 동시에 절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는 드라칸처럼 간계를 꾸밀 만큼 독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제는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기에, 홀린 듯이 신의 아이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구원이 아니라면 달콤한 죽음이라도 내려주길 바랐다.

마치 화톳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닿을 수 없는 저 별을 잡기 위해.


전날 밤 부슬비가 내려서인지 아침공기에서 상쾌한 물기가 느껴졌다. 세실은 젖은 풀밭을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보폭이지만 악마 특유의 빠른 템포 덕에 속도는 웬만한 성인 못지않았다. 오히려 동행한 늙은 레인저가 연방 땀을 훔치고 있었다.


“후우, 나이는 못 속이겠군.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니 원.”


“쉬었다 갈까요? 거의 다 오긴 했습니다만.”


그는 세실의 제안에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안 될 말이지. 벌써 베릴의 아이가 강림한지 이틀이 지났지 않나. 서두르지 않으면 상트룸 수도회나 오르텔 부대에게 선수를 빼앗길 걸세.”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어조에서 다급함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의 면적을 생각하면, 신의 아이가 강림한 장소에서 고작 이틀거리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는 점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경쟁자’들이 아무리 발을 굴러도 먼저 도착할 자신이 그에겐 있었다.

세실은 콧바람을 뿜으며 걸어가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고 지낸지도 어느덧 50년 남짓이다. 인간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그녀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교우관계다. 이는 그만큼 그녀가 그를 신뢰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보다 세르딕. 같이 오겠다던 남자는 어떻게 되었죠? 이름이 람카디스 클로람...이라고 했던가요.”


세르딕 로샤단. 늙은 레인저의 이름이었다. 그는 하얗게 샌 턱수염을 머쓱하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나 혼자 왔네. 뭐 나도 베릴의 아이가 정말 아스트리카 근처에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 말일세. 그 녀석도 빛기둥을 봤을 테니 지금쯤 꽤나 놀랐겠구먼.”


세르딕은 일평생을 신의 아이를 조사하는데 바쳐온 인물이었다. 또한 발이 넓어 왕실이며 각종 종교계와도 교류하고 있고, 젊은 시절 레인저로 활약한 경력으로 무인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세실이 유독 그를 신뢰하는 이유는, 물론 악마를 차별하지 않는 그의 융통성도 있지만, 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신의 아이는 인간이다. 그러니 각성하지 않은 채 인간으로 살다 죽으면 된다. 그러면 펠아람의 저주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든 신의 아이를 도구화해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려는 자들과 달리 그의 신념은 순수하고 확고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실 본인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정말 괜찮은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니.”


세르딕이 그녀를 염려하며 말했다. 세실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네. 저도 당신의 이상에 공감합니다. 그게 인간세계에도 필요한 조치고요.”


“하지만 자네는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악마이지만 저 또한 이 세상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답니다.”


신의 아이를 숨기려는 세르딕이나 찾아내 소유하려는 각종 무력집단과 달리 세실에게는 표면화된 목적이 없었다. 굳이 있다면 그저 한 번 만나 대화해보고 싶을 따름이랄까.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이 평화적인 그녀가 도출해낸 유일한 결론이었다.

멀리 마을 어귀가 보였다. 많이 잡아도 20가구쯤 될까? 시골길을 걷다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마을이었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희생자는 적었을 테니까.


“...이건...”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엄청난 열기가 엄습해왔다. 세르딕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통을 들이켰는데, 턱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는 곧 지금까지 지나왔던 젖은 풀밭길이 어느 선을 기점으로 황무지로 변해있는 것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마을 건물도 하나같이 새카맣게 타 뼈대만 남아 있었다. 세실이 말했다.


“베릴의 법칙파괴 「묵시의 빛(The Ray of Revelation)」이군요. 아직 여파가 남아있는 모양이니 조심하시길.”


“으음, 더 전진해도 괜찮은 건가?”


“아직 살아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실은 말을 꺼낸 것과 달리 몇 발자국 못 가 멈춰 섰다. 세르딕은 그녀가 예고도 없이 멈출 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을 때라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우리보다 일찍 온 자들이 있군요. 전부 슬러터. 인간은 없습니다.”


그녀는 땋아놓았던 머리를 풀어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했다. 금빛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팽팽하게 펼쳐졌다.


“인간이 없을 리가. 베릴의 아이가 있잖은가.”


제법 뼈있는 농담을 던지고서 세르딕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악마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딱히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마을 한 귀퉁이 너머로 고함과 비명이 번갈아 들려왔다. 그리고 아련하게 와 닿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퍼어엉. 조심스럽게 골목가로 접근하던 두 사람은 돌연 뿜어져 나온 노란 빛줄기에 놀라 몸을 피했다. 뒤이어 전신에 불이 붙은 악마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끄아아아, 으아아아!”


악마는 끔찍한 절규와 함께 바닥을 지르다 곧 잠잠해졌다.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악마를 보며 세르딕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이 이상 접근하는 건 위험합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죠.”


빛줄기는 계속 뿜어져 나왔다. 어떤 것은 땅바닥을 뚫고, 어떤 것은 대각선에서, 또 어떤 것은 곡선 형태로. 빛은 절대로 빗나가는 법이 없었고, 여기에 닿은 악마들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죽어나갔다. 곧 골목에서 빛줄기를 피해 악마 셋이 도망쳐 나왔다. 그중 하나는 세르딕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세실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머리카락으로 그를 낚아챘다.


“히익, 살려줘 제발, 목숨만은!”


악마는 겁에 질려 몸부림쳤다. 세실은 그를 바위에 가볍게 패대기쳐 이성을 되찾도록 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죠? 당신들이 신의 아이에게 무슨 볼일입니까?”


“어, 어, 세실 평의원?”


“넋 놓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어서 대답하세요.”


다시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던 악마가 잿더미로 변했다. 빛기둥이 지나간 자리로 아지랑이가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이미 주변의 공기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악마는 그 커다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키가 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구의 괴물이 침을 질질 흘리며 두려움에 떠는 광경은 실로 기이했다.


“드라칸이 신의 아이를 데려오라고 해서 그, 그래서..”


결박한 세실의 머리카락에 힘이 갔다.


“위해를 가한 겁니까? 신의 아이에게?”


“컥...아냐. 그냥 다가가기만 했을 뿐인데, 느닷없이...”


일방적으로 선공을 가했다? 세르딕은 베릴의 아이의 행동을 분석하려 했다. 단순히 어린아이의 장난일 수도 있고,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닌 악마와 대면했다는 특수성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하나의 가능성도 있었다.

무차별적인 파괴욕구의 발현 - 펠아람의 저주.


“저 꼬마는 미쳤어...애초에 우리가 감당할 만한 힘이 아니야. 마치 벌레를 지져 죽이는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허공에서 수직으로 강타한 광선이 그를 한순간에 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르딕과 세실은 빛기둥이 땅에 꽂히며 일으킨 풍압에 밀려 날아갔다. 한참을 구른 뒤에야 세르딕은 건물잔해에 걸려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머리카락이 반쯤 타버린 세실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아...”


세실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대됐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한 소녀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오오라가 팽창해감에 따라 이리저리 물결쳤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황금빛 오오라의 향연에 세르딕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세실의 무릎이 약속한 듯이 땅바닥에 닿았다.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초연했다. 애초에 악마를 멸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이러한 형태의 만남이 되리라는 것도 예상한 바이지 않은가. 설령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그녀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종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다가오는 은발의 소녀를 향해 겸허하게 예를 갖췄다.


킥킥킥.


소녀는 익살맞게 웃었다. 악마가 말했듯이, 그녀는 자신이 행한 파괴에 아무런 감정이 없어보였다. 소녀가 말했다.


“왜 너희는 도망 안 가?”


세실은 정중한 자세로 답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긴 세월을 기다렸는데, 어째서 도망가겠습니까.”


“그래? 내가 너를 태워버릴 건데도? 도망가도 태울 거지만.”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이미 결말을 맞이할 준비가 됐나이다.”


“흐음, 이상한 애네. 아까 걔네랑은 달라.”


소녀는 무릎 꿇은 세실을 재미나다는 듯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강아지를 다루듯 그녀는 세실의 타고 남은 머리칼이며 눈썹, 귀와 입술 등을 매만졌다.


“넌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소녀의 입꼬리가 헤벌쭉 위로 올라갔다. 일순 시야가 환해지는 걸 느끼며 세실은 각오를 다졌다. 예의 빛기둥일까. 만약 이것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고통 없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세실의 태도에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를 만나러 온 거야? 죽여 달라고?”


세실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쥐며 답했다.


“그저 생의 마지막에 덧없는 꿈을 꾸어봤을 따름입니다.”


“무슨 소리야?”


“제 소원은 당신만이 이루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 소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궁금증이 동했는지 소녀의 고개가 갸우뚱 돌아갔다.


“왜?”


“...왜냐하면 저는 악마이기에,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줄리 없기 때문입니다.”


소녀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세실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소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상처럼 오오라가 남았다.


“말해봐. 들어줄게.”


순간 세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리자 소녀가 해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는 눈동자가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말씀이신지...”


“말해보라고. 소원.”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뭔가 이상하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사지가 구속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세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탓할 수 있겠는가. 천년 동안, 오직 하나만을 갈망해온 그녀를.


“...저는...고향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소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방출하는 오오라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단순한 문장이었다. 세실의 고향이 이 세계가 아니며, 돌아가기 위해선 아루의 법칙에 간섭해야 한다는 사실을 소녀가 알 리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모든 것을 이해한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거 재미있겠네. 응, 좋아. 네 소원을 들어줄게.”


...재미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제야 무언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잠깐만, 대체 무엇을...”


그러나 소녀는 이미 세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흘러나올 대로 나온 오오라는 주인의 의지를 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노란 오오라의 폭풍이 소녀를 휘감았다. 빛 속에서 소녀는 마치 짓궂은 장난이라도 친 아이마냥 까르르 웃었다.



“내가 정한다. 「너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아하하하하하!”




화악- 사위를 가득 채우던 오오라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바람이 잦아들어감에 따라 물결치던 머리칼도 서서히 가라앉아갔다. 그러나 세실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들의 땅위에 서 있었고, 하늘은 언제나처럼 파란색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언령(言令)의 권능. 펠아람의 저주와 똑같다. 그래,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저주였다. 소녀의 상반신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쓰러지는 소녀를 부축하자 어깨너머로 세르딕이 칼집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기절시킨 걸까. 하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세실은 의식을 잃은 소녀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세르딕...내가 무슨 짓을 한 거죠? 난 그저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비관하지 말게.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당신도 봤잖아요...이 아이의 광기...그것은 분명 펠아람의 저주...”


“아니, 억측하지 말게. 그 어느 것도 확정해서는 아니 되네.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네.”


세르딕이 처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결과가 나왔음에도 여전히 소녀를 소중히 안고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그녀가 그저 측은할 따름이었다.


“이 아이가 각성하는 날, 자네는, 아니 자네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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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드뷔사는 이칼롯의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로 시간이 멈춘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팔짱을 천천히 풀며 말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드, 드라칸도 이걸 알고 있나? 아니, 또 누가 알지?”


“세르딕을 제외하곤 당신들뿐입니다. 드라칸이나 제3자가 어디까지 엘레노어를 조사했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드뷔사가 손을 번쩍 올렸다. 그녀는 이칼롯이 채 말을 잇지 못하는 틈을 타 폭포수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저기요, 두 분이 지금 심각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제가 이상한 건가요? 세실은 고향에 가고 싶어하고, 신의 아이는 그걸 들어준다고 했다면서요. 뭐가 문제죠?”


세실이 말했다.


“분명 베릴의 아이는 저희를 고향에 보내주겠다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내주겠다고는 말해주지 않았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시체가 되어 가는 것도, 눈알만 남아 박제된 채 가는 것도 귀향이라고 볼 수 있겠죠. 설령 그러한 형태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문제는 엘레노어가 제가 아닌 ‘너희’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했다는 것과, 그녀가 펠아람의 저주라는 사실입니다.”


이칼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개송곳니 문제도 버거운데, 드라칸에 이어 펠아람의 저주까지 튀어나오다니. 하나를 수습하니 다른 두세 개의 문제가 연달아 터지는 격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가? 엘레노어 샤에르가 펠아람의 저주라는 게.”


“저는 에스터페른을 제외한 모든 신의 아이를 만나보았습니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엘레노어만큼의 폭력성과 광기를 보여준 자는 없었습니다.”


이칼롯은 길게 탄식했다. 세실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다량의 에센스를 사용해가면서까지 언령을 내렸다. 그게 어떠한 형태로 발현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말 단순히 세실을 고향으로 전송만 시켜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가 말한 대로 시체만 보내주거나 신체의 일부만 보내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고향에 돌아간다’는 명제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는 법칙을 파괴해 차원 간 연결고리를 다시 잇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얄궂게도 이칼롯은 성언전의 세상이 어떠했는지를, 그리고 성언이라는 법칙이 어떤 취지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정말로 펠아람의 저주라면, 그래서 오직 인류의 멸망만을 갈구하는 존재라면...그것이 세실에게 내린 언령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설마...게이트...인가.”


케리아돌이 보여주었던 과거를 떠올리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세실은 그 단어를 접한 것만으로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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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3 15.06.02 990 25 19쪽
33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7 15.06.01 913 33 18쪽
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9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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