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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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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3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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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DUMMY

루도는 고통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펠아람의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밀히 짚어보면 지금까지 로샤단이 겪어 온 모든 사건도 그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는 숨을 죽이며 말했다.


“...펠아람의 아이냐?”


『어...』


예상보다는 훨씬 평범한 목소리였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목소리 자체는 루도와 똑같지만, 말하는 분위기나 어조가 그에 비하면 훨씬 풀이 죽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사람을 대하길 어려워했다. 특히 루도에게 있어서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음...”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만남이건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도가 기대했던 것은, 물론 상상이지만, ‘신의 아이’라는 네임밸류에 걸맞은 화려하고 웅장한 등장이었다. 이를테면 연극의 클라이맥스 때 등장하는 주연의 모습이랄까?

하지만 실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은 너무나도 단출했다. 펠아람의 아이는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루도에게 말을 건넸고, 그 시작을 끊은 단어도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루도는 그가 한 말을 절대 레미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해온 고생 때문에라도 욕을 한 바가지 털어 넣을 생각이었는데,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그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숫기없는 사춘기 소녀 마냥 한참을 머뭇거렸다.


“일단 음, 너 펠아람의 저주 아닌 거 맞지?”


『...아마도. 누굴 죽이고 싶다느니,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그럼 그건 넘어가고. 왜 아직도 내가 내 몸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마법의 효과대로라면 네가 각성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네 몸에 들어올 때 너와 한 약속 때문일 거야.』


루도는 소울링크가 발동되었을 때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펠아람의 아이의 기억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기억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이제 기억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펠아람의 아이가 활동할 때 루도는 마치 긴 잠을 잔 것 같은 기억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완벽하게 메워진 것이었다.

펠아람의 아이는 가린워드 마을의 기억을 언급하며 말했다.


『내가 네 몸을 조종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급박했던 경우고, 일단 위기가 벗어나고 나면 네게 소유권을 돌려줘야 할 것 같은 강한 강박감을 느낀다. 너에게 한 약속이 그 자체로 나를 구속하고 있는 거겠지.』


“몇 번이고 각성해도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 건 그것 때문이었나...그럼 너는 내 몸을 갖고 싶은 욕망은 없는 거냐?”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게 짜릿한 건 맞지만, 딱히 지금 상태에 불만은 없어. 오감은 너를 통해서 느낄 수 있으니까. 나는 단지 죽음이 두려울 뿐이야.』


일전에 루도가 한 번 이용해 먹은 것이기도 하지만, 펠아람의 아이는 생존 자체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한 번 죽었을 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은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고, 루도가 위험할 때마다 그가 뛰쳐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루도는 이후로도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성향을 파악했다. 종합하자면 그는 생존문제만 아니라면 각성에 관심이 없었으며, 향후의 계획에 있어서도 루도에게 적극 협력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다만 마법으로 인한 사생활의 침해가 문제로 다가왔다. 그가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루도에게 전해지는지라 귀를 막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펠아람의 아이는 가급적 침묵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감탄사나 비명 같은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네가 느끼는 건 나도 똑같이 느끼니까. 아픈 건 아픈 거라고.』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지....어? 지금 뭐라고?”


루도의 얼굴이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각을 공유한다는 건...말하자면 그거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루도는 슬쩍 눈동자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레미나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차분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이 새끼 그럼...지난번에 레미나랑 그거...그것도 다 보고 있었다고? 아니 씨발 지금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느낌도 전부?”


자신도 부끄러운지 펠아람의 아이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미안...』


“야 이 개새끼야아!”


루도는 광분하여 자신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사생활을 침범하다 못해 연인까지 간접적으로 모욕한 녀석을 단죄할 수단이 자해밖에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보통 자기 자신을 때리는 건 그다지 안 아프다고 하지만, 반쯤 이성을 잃고 휘둘러대는 루도의 주먹은 보통이 아니었다. 쉬지 않고 날아오는 그의 연타에 펠아람의 아이는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퍼. 그만 좀 해!』


오래지 않아 루도는 씩씩대며 자해를 멈추었다. 그의 요청을 수용했다기보다는, 자신 쪽도 아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미나와 루이즈는 이 모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신의 아이라고 해야 할까, ‘신들린 사람’이란 표현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불가항력이었어.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어?』


“이 썩을 놈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네.”


연방 사과를 건네는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말하는 어조는 다소 들떠 있었다. 그로서는 루도와의 대화가 처음으로 진득이 나누는 의사소통이었다. 루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에게는 천금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때문에 그는 루도가 역정을 낼 때에는 잔뜩 움츠러들었고, 가볍게 농담이라도 건넬 때에는 뛸 듯이 기뻐 화답했다. 그는, 말하자면, 막 친구를 사귄 어린아이 같았다.


“루도오, 지금 어떻게 돼가는 거야?”


“으음...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지.”


루도는 레미나와 루이즈에게 지금껏 펠아람의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은 제외하고서. 레미나는 펠아람의 아이가 육체의 소유권을 전적으로 루도에게 맡기겠다고 한 부분을 듣자 감격하여 그를 끌어안았다. 반면 루이즈는 팔짱을 낀 채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의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이마에 짙은 주름이 졌다.


“신의 아이가 숙주에게 종속된다? 이건...대단히 희귀한 사례로군요. 물론 표본 자체가 얼마 없었던 만큼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만...흐음, 이것 참.”


하지만 명쾌한 추론이 나오지 않자 그도 곧 레미나처럼 관심을 끊어 버렸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됐으니, 나머지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포옹을 끝낸 레미나가 눈을 반짝이며 루도에게, 정확히는 펠아람의 아이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펠아람의 아이가 이름이진 않을 거 아냐.”


“그것도 그러네. 야, 너 이름이 뭐냐?”


펠아람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런 기본적인 사안조차 그에게는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간과하고 있었다. 루도가 재차 다그치자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름이 없어.』


“뭐? 이름이 없다니, 부모님이...”


루도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에게 부모가 있을 리 없다. 그는 항상 펠아람의 아이로 일컬어져 왔을 뿐, 제대로 된 이름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루도, 혹은 이전번의 숙주가 가졌던 이름도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자신이 누군지 조차 모른 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생각보다 훨씬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이었다. 루도는 곧장 그의 작명을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어.”


『어, 정말?』


펠아람의 아이는 반색하여 답했다.


“이름 짓는 게 뭐 별거 있냐? 삼태기 어떠냐.”


『....』


하지만 역시 루도가 그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재고가 필요했다. 일단 그의 작명 솜씨가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지만, 제삼자가 지어준 게 아니고서야 진중함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레미나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제오프...라는 이름은 어때?”


펠아람의 아이의 귀가 솔깃 움직였다.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남자답기도 하고, 부르는 어감도 괜찮았다. 또한 레미나가 손수 지어준 이름이니 가볍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그는 혼잣말로 이름을 중얼거렸다.


『제오프...제오프 클로람이라.』


감격에 겨웠는지 되뇌는 그의 목소리는 담뿍 젖어 있었다. 조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 눈물겨운 혼잣말을 듣고 있자니 피식 미소가 흘러나왔다. 루도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정수리를 쿡 쥐어박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그럼 넌 이제부터 제오프다.”


『응. 레미나에게 이름 지어줘서 고맙다고 전해줘.』


펠아람의 아이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니, 이제는 다음 예정을 잡아야 할 때였다. 물론 지금으로선 리크나이츠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벼울 대로 가벼워진 가방은 당장 내일부터 끼니문제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일행을 위협하고 있었다. 혹시 먹을 것 없냐는 루도의 질문에 루이즈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500년이나 방치되어 있었는데 뭘 바라십니까. 아, 들어오는 입구에 잘 찾아보면 물이끼나 버섯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출구까지 일행을 배웅해 주었다. 들어올 때와는 확연히 줄어든 그의 말수가 걸렸는지 레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그럼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야 여기 남아서 다른 신의 아이가 오길 기다리겠죠. 거듭 말하지만 그게 저의 존재 이유니까요.”


아무도 없이 불만 켜진 방안에 우두커니 선 채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낸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벌써 500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 아득한 시간관념에 레미나는 혼자 우울해져서 말했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외롭다라...사전적인 정의는 이해하지만, 다행히도 제게 그러한 감정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고통의 일종이라면, 그 점에 있어서는 제 창조주에게 감사해야겠지요.”


앞서 가던 그는 출구 앞에 멈춰 서더니 일행이 지나가도록 문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밖으로는 들어올 때 그랬듯 우중충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루도는 루이즈의 어깨 위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더 서글프게 느껴졌다. 루이즈는 단지 웃고 있었다. 그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루도, 제오프, 그리고 아름다운 레미나 양. 루도 당신이 펠아람의 저주가 아니라 저 역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는 루도와 예의 바르게 악수를 나누는가 싶더니, 레미나의 차례가 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와락 그녀의 품에 달려들었다. 루도가 놀라 떼어놓으려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흑흑,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성과 헤어져야 한다니요.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새끼가, 조금 전엔 외로움이 뭔지 모른다며!!”


『저 능청스러움은 좀 배우고 싶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그가 더 난리였다. 한편 루이즈의 어리광을 받아주던 레미나는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가슴 만지게 해주시면요.”


“대답하는 거 봐서요. 아까 이곳을 찾아온 게 우리가 두 번째라고 했죠? 그럼 첫 번째는 누구였어요?”


그러자 루이즈는 갑자기 정색하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돌변한 그의 태도에 루도와 레미나도 놀라 숨을 죽였다. 그는 딱히 대답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답의 출처가 워낙 오래전의 기억인 까닭에 떠올리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자세로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검색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그 정보는 이 연구소가 막 완공되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어디 보자, 분명히 179664일 전이었던 것 같은데...”


둘은 그가 답을 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루이즈는 기억이 났는지 경쾌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나왔습니다. 첫 번째로 이곳을 방문한 인물. 에스터페른의 아이입니다.”


심드렁하던 루도의 표정이 일순 경직됐다. 제오프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안갯속을 헤집던 그의 단서가 우연히 나타니엘의 연구소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존재가 언급됨과 동시에 루도의 머릿속에 그가 거쳐 온 마지막 동선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펠아람의 아이를 죽이고, 지인들과 모든 연락을 끊은 뒤, 그는 홀로 이곳 카잘산맥을 등정했다.

그가 이 연구소를 들른 이유는 자명했다. 루도가 그러하듯, 그 역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에스터페른의 아이는 이미 각성한 상태에서 이곳을 찾았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펠아람의 저주를 막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진실이라는 종착지가 이제는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예토 클로람...』





*******



훼창기사단과의 암묵적인 휴전이 성사된 이후 왕실기사단은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요새에 자리를 틀었다. 그러나 아무리 군대라고 해도 계절이 혹한기로 접어들었고, 또 소규모의 정탐활동 외에는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거리는 군인이 좀 많다 뿐, 평소와 다름없이 한가하기만 했다.

레오문드가 라키시아에 틀어박히고 스벤달 역시 크렘벨 바깥까지 후퇴한 지금, 왕실기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봄이 오길 기다리며 체력을 비축해놓는 것뿐이었다. 이에 따라 군대는 패잔병을 규합해 새롭게 재편됐고, 각지에서 징발된 보급품은 속속들이 창고에 쌓여가는 중이었다. 한차례의 태풍이 지나가자 병사들의 표정에도 조금씩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적한 한 때의 오후에도 유미르네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리네와 이칼롯이 본진을 떠났을 때부터 쭉 그녀의 동공에는 불쾌함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디리터를 죽일 생각이었다. 이칼롯이 그녀와 디리터를 한데 묶어 본진에 남긴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에도, 그녀는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겐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기회를 노려 목을 따버린 뒤, 그럴듯하게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이칼롯 일행이 떠난 지 2주가 넘어가는데도 그녀의 계획은 제자리를 달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설령 정면으로 맞붙는다 해도 그녀는 디리터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약해진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방해물은 확실히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또다. 그녀가 숙소에 접근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카이안이 발목을 붙잡았다.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그의 어투에 유미르네 역시 짜증이 솟구쳤다.


“별로. 그런데 오늘도 경계근무 서느라 고생이 많네, 온실 도련님.”


그녀가 카이안을 향해 이죽거렸다. 디리터와 유미르네가 이곳에 남은 이유는 물론 카이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그의 소재는 안개송곳니에 노출되어 있었고, 적의 암살자가 내부에 침투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감이 좋은 두 사람을 카이안에게 붙여놓은 이칼롯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가 개인 간의 커넥션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미르네가 이칼롯의 명령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였다. 그녀는 디리터를 죽여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임무 따위 언제든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카이안이 빈번히 그녀를 가로막았다. 보호받아야 할 그가, 오히려 디리터를 보호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카이안은, 그저 심증뿐이었지만, 유미르네가 디리터를 해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볼일 없으면 마저 가던 길 가시죠. 여긴 남성 전용 숙소예요. 당신이 올 이유가 없을 텐데요.”


유미르네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숙소 주위엔 국왕이 친히 배치한 경비병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유미르네는 손가락이 간질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지.”


그녀는 짜증스럽게 등을 돌렸다. 이런 형국이 벌써 2주가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도련님은 잠도 없는지, 심지어 야심한 밤에도 귀신같이 나타나 그녀를 방해하곤 했다. 그때마다 유미르네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지금은 로샤단의 임무가 먼저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그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카이안의 경멸을 받으며 되돌아올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주점을 찾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가득 찬 와인 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디리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와인을 한입에 들이킬 때면 그를 죽일 계획이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졌다. 그리고 빈 잔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면, 홈에 고인 술 한 방울 사이로 카이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젠장,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거슬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냥 철없는 꼬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방해를 받은 것인지 떠올리자 그녀의 눈동자에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제랄드, 게네스, 군터, 블라키....디리터 아쟉스.”


유미르네는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람들을 차례로 읊어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복수보다 중요한 게 자신에게 남아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글쎄,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복수를 완성할 수만 있다면, 로샤단이 목숨을 거는 신의 아이니 안개송곳니니 하는 문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카이안 루시올라...어떻게 한다..?”


그녀는 다시 잔을 채워 넣었다. 루프리모의 아이라고 했던가? 신의 아이니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던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자꾸만 자신에게 여물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낸다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날의 악몽에 시달릴 터였다. 악몽은 유미르네의 자제력을 급격히 갉아먹어가고 있었다. 어느샌가 아침을 맞이할 때면,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 카이안과 디리터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느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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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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