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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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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03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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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0)

DUMMY

쇄도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 버거울 정도로 빨랐다. 실제로 제랄드를 포함한 대다수는 그녀가 낚아 채이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빠른데도 드라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움켜쥐었다. 마치 벼이삭이라도 훔치듯이 유려하게, 소매 속에서 나온 맹수의 입이 루치페리아의 허리를 물고 늘어졌다.


-방해된다.


곧 그녀는 근처에 있던 건물로 집어던져졌다. 콰아앙! 던지는 위력이 어찌나 센지 목조가옥이 부스러기처럼 무너져 내렸다.


“주, 죽었나?”


그러나 게네스의 질문이 무색하게 루치페리아가 건물 잔해를 뚫고 재차 돌격해왔다. 광창이 빛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녀의 섬광은 드라칸에게 닿기 전 그의 입중 하나에 가로막혔다. 입은 그 즉시 불타 재가 되었다. 드라칸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는 양팔을 개방했다. 그러자 수백 개의 이빨이 양면에서 루치페리아를 덮쳤다. 그녀는 창으로 몇 개를 걷어냈으나, 이내 송곳니의 폭풍에 휩싸였다. 석고파편이 사정없이 튀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간헐적으로 광창이 번쩍였다.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드라칸의 압도적인 힘에 그녀는 접근조차 못하고 재차 패대기쳐졌다. 날개가 부러지고 왼쪽 팔은 형체도 남지 않았다. 짓뭉개진 옆구리에서 석고가루가 연방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차 나아갔고, 예정처럼 튕겨져 나왔다. 그런 상황이 수차례 반복됐다.


“저, 저거...”


“대체 뭐야 저건...!”


아케니온과 슬러터는 기가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들이 겁을 집어먹은 대상은 드라칸이 아니었다.

생텀가드 루치페리아. 그녀는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세차게 드라칸을 밀어붙였다. 공포, 분노, 좌절 - 생명체라면 응당 느껴야 할 격정이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적을 멸하기 위해, 설령 그것이 레비저라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간다. 육신의 안위 따위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악마의 말살에 영혼을 바친 자들. 슬러터들이 생텀가드라면 치를 떠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드라칸의 미간에도 점차 짜증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루치페리아는 아주 훌륭하게 그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거 귀찮게 됐군.


처음부터 드라칸은 속전속결을 강조했다. 그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레비저의 힘은 그 위력만큼이나 이질적이라 쉽게 감지된다. 이는 루도가 멀리서 그의 존재를 느끼고 회군할 정도였다. 물론 이 시점에서 펠아람의 아이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귀찮은 자가 있었다. 수백 년에 걸쳐 그를 추적해온 존재. 어쩌면 현세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생명체가.


-라엘크라드가 오고 있다. 작전을 변경할 때로군.


라엘크라드가 온다. 그것만으로도 슬러터 중 하나는 오줌을 지렸다. 그 존재감은 생텀가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드래곤을 본 적이 없는 제랄드는 악마들이 어째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루치페리아를 상대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드라칸마저도 불편한 듯 이를 가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도 달려드는 루치페리아를 쳐내고서 드라칸이 말했다.


-제랄드, 루프리모의 아이를 내 은신처로 데려가라. 나는 지금부터 라엘크라드를 유인하겠다.


“네? 우, 우리가 말이오?”


제랄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너무 엄청난 것들을 봐버려서인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전력으로 그게 가능할지...”


로샤단, 왕실기사단, 천정기사단, 안개송곳니와 생텀가드까지. 루프리모의 아이를 주시하는 조직은 이제 하나둘이 아니었다. 행여 그 소문이 무성한 가이잘모 아델하트라도 만나는 날에는 무슨 사단이 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그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1초의 주저함은 곧 드라칸의 분노로 바뀌었다.


-난 네 의사를 묻지 않았다 제랄드.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감히 반문할 수도 없었다. 제랄드는 식은땀을 훑고는 카이안을 포박해 말 위에 태웠다. 카이안은 변변한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이어 게네스를 위시한 아케니온 단원들이 진형을 이루었다.

제랄드는 말채찍을 휘두르기 전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그런데 만약 레이시가...?”


하지만 대답 대신 귀에 들어온 것은 격렬한 파열음이었다. 측면에서 강타한 섬광에 드라칸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눈을 돌리자 루치페리아가 창을 들고 다시금 걸어오는 게 보였다. 놀랍게도, 부서졌던 신체가 빠르게 복원되고 있었다.


-우리는 채찍이자 작살이요, 또한 달구어진 방패일지니. 백아의 드라칸, 그대는 오늘 파멸을 맞을지어다.


흩어졌던 석고파편이 일제히 떠올라 루치페리아의 망가진 부분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석고가 붙을 때마다 반동으로 그녀의 관절이 기이하게 꺾였다. 그녀의 창이 재차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라칸도 두 번 당하지만은 않았다.


“...만개(滿開).”


그가 손을 뻗자 수천 개의 송곳니가 일제히 방사됐다. 콰과과과...! 부채꼴 형태로 발사된 쐐기의 파도에 일대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간신히 복원되어가던 루치페리아의 신체는 여지없이 부서졌다. 하반신은 아예 가루가 되었고, 명치가 뚫리며 목이 떨어져나갔다.

진저리가 쳐지는 건, 그 지경이 되고서도 다시금 복원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드라칸도 다소 흥분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인간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찢어진 두건 사이로 수많은 이빨이 뒤엉켜있는 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출발하라. 스트라이더는 무리를 이끌고 아케니온을 따라가라. 이곳은 나 혼자로 충분하다.”


“예...옙!”


제랄드는 쫓기듯 말을 몰기 시작했다. 아직 리크나이츠 쪽에서 후발부대가 접근하는 듯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드라칸이 보고를 할 정찰병조차도 완벽히 처리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아케니온 일행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채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등 뒤에서 간헐적으로 생텀가드와 레비저가 맞붙는 듯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제랄드는 애써 그 소리를 무시했다. 십여 분을 달려도 추격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안정되어가자 자신이 손아귀에 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앞에는 루프리모의 아이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공포가 물러가자 희열이 차츰 그 자리를 대신했다.

드디어 성공했다. 드디어 신의 아이를 손에 넣었다. 이제 그를 안전히 목적지로 데려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로샤단과 안개송곳니 - 자신을 나락으로 몰고 간 두 집단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띠어졌다.



***



몇 안 되는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거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경험 없는 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토악질을 했다. 어떤 형태의 전투가 이루어졌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건물은 대다수가 투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병사들은 건물 잔해 사이에 광범위하게 흩뿌려진 시체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와 살점, 뜯겨진 장기들.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민간인과 군인 가리지 않고 거리에 있던 모두가 악마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엇? 생존자가 있다. 이보시오!”


그들은 디리터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그는 투핸디드소드를 지팡이삼아 힘겹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병사들이 달려오면서 느껴지는 진동에 그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빨리도 오는군. 빌어먹을.”


“아쟉스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피는 대체...”


전황을 보고할 정찰병마저 희생당한 상황인지라 전후사정을 아는 이는 디리터가 유일했다. 그는 가슴팍의 통증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말했다.


“당장...아델하트 경에게 보고하세요. 카이안이 잡혀갔다고...그리고 정오에 떠난 수색대에게도...빨리 루도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루시올라님이요?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부상을 입으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자 디리터는 짜증이 나 버럭 소리쳤다.


“그딴 건 어찌되든 상관없으니 빨리 가라고! 당장 추격하지 않으면 카이안은 죽어!”


“예...옙!”


병사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디리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격통이 밀려왔다. 최소한 갈비뼈가 두 대는 나갔다. 이 상황에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카이안...미안하다...”


레비저의 힘 앞에 그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토벌은커녕 짧은 시간벌이조차도 무리였다. 애초에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만약 루치페리아가 절묘하게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다른 기사들처럼 두개골이 깨진 채로 거리에 널브러져있었을 것이다.

드라칸과 루치페리아는 제랄드가 떠난 뒤로도 한동안 경합을 벌였다. 물론 이는 달려드는 루치페리아를 드라칸이 억지로 쳐내는 모양새였다. 루치페리아는 신체가 부서져도 몇 번이고 몸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그때마다 힘이 빠져나가는지 힘과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드라칸은 그녀를 끝장내지 못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루치페리아는 힘을 소진한 상태임에도 드라칸을 쫓아갔고, 디리터는 시체만 남은 거리에 홀로 남겨졌다.


‘따라잡으려면 역시 이것밖에 없어.’


아케니온이 카이안을 데리고 사라진 후로 20여분가량이 흘렀다. 솔직히 이제 와서 추격대를 보낸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다. 말보다 훨씬 빠른, 순식간에 그들을 앞지를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녀가 아직 마르테너스에 남아있는 게 행운이었다.

그는 세차게 문을 열었다.


“아르유!”


아르유는 디리터를 발견하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디리터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세상에, 피 좀 봐.”


그녀는 서둘러 수건을 가져와 디리터의 상처를 지혈했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으나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위축된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저...정령들을 통해 느꼈어요. 방금 그 소동, 악마였죠? 그 정도의 존재가 아직까지 대륙에 남아있었다니...”


디리터는 입속에 차오르는 피를 탁 뱉고는 아르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카이안이 잡혀갔어. 지금 당장 구하러 가야 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아르유.”


피로와 통증이 합쳐져 잔뜩 쉰 목소리였다. 상황이 정리됐다고 생각한 아르유는 난데없는 디리터의 요청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 도움이라면...어떤?”


“가루루를 빌려야겠다. 녀석을 타고 날아간다면 아직 따라잡을 수 있어.”


“가루루요? ....잠깐만요 오빠. 설마 직접 간다는 말은 아니겠죠? 그 몸으로요?”


그녀가 정색하며 손을 뿌리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신으로 카이안을 구출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현재 디리터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환부는 지혈도 끝나지 않았다. 전투를 떠나서 그리폰에 탑승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디리터는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아니면 안 돼. 부탁한다 아르유.”


아르유는 그의 의지에 감복하면서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요. 그랬다간 오빤 죽어요. 나를 평생 원망해도 좋아요. 이건 절대 양보 못해요.”


“아르유...!”


디리터만큼이나 그녀도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살이라고 해도 좋을 디리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낙관론을 펼쳐 봐도 그가 카이안을 구할 확률은 희박하다. 어찌 1%, 아니 0.1%도 안 되는 도박에 스스럼없이 목숨을 던진단 말인가. 그녀는 거절의 의사를 명백히 하고는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디리터는 디리터대로 애가 탔다. 아르유의 동의가 없으면 가루루에 탑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간 낭비하는 사이에도 카이안은 시시각각 멀어져가고 있었다.

반쯤 닫혀있던 문이 스르륵 젖혀진 것은 그때였다.


“여전히 혈기왕성하시네. 사람 목숨은 하나인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곳에는 유미르네가 언제나와 같은 교태어린 시선을 한 채 서 있었다. 챙 넓은 모자와 검은색 블라우스, 타이트하게 붙는 가죽바지와 허리부터 두르는 망토. 늘상 -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가 애용하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인데도 디리터는 왠지 모를 아련함을 느꼈다. 고작 몇 m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그녀는 닿을 수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유미르네! 여길 어떻게 알고...아니, 마침 잘 와주었다.”


“어떻게 알긴요. 그렇게 피 줄줄 흘리면서 다니는데 찾는 거야 뻔하지. 그래서, 상황은요?”


“카이안이 납치됐어. 아케니온 녀석들이 데리고 갔다.”


“....!”


유미르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녀는 곧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병력이랑 시간은?”


“어...일부러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동남쪽 에닌샤 쪽이었어. 숫자는 서른 명쯤 되는데 슬러터가 섞여 있고.”


그녀는 디리터의 설명을 듣는 와중에도 그의 상체 곳곳에 난 상처를 주시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가벼운 상처가 아니다. 그리고 왜 그런 상처를 입었는지 알기에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애틋함을 담뿍 머금고 있었다. 그만큼 카이안을 이해하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인데 어째서 자신은.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밖의 그리폰을 타고 추격하겠다? 그 몸으로?”


“이정도 상처 별 거 아니야. 너도 갈 거지? 자, 먼저 타.”


유미르네는 디리터가 건넨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고 투박한 손. 통증을 참고 있어서인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처음으로 디리터의 손을 맞잡았다.


“내게 그보다 더 좋은 수가 있는데, 들어볼래요?”


뜻밖의 제안에 디리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뭔데?”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미르네는 검집으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디리터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상자는 빠지는 거지. 방해만 되니까.”


그녀는 쓰러지는 디리터를 재빨리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갑작스런 분란에 당황해하던 아르유도 곧 그녀의 의중을 눈치 채곤 거들었다. 낑낑대며 다리를 들어 올리는 그녀를 보며 유미르네가 생긋 미소 지었다.


“착한 아가씨네. 기왕 착한 일 하는 거 나 좀 더 도와줄 수 있죠?”


아르유는 그녀의 비장하기까지 한 패기에 눌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미르네는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디리터의 앞에 섰다.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닦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못할 짓을 했어요...사실 당신은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괜히 내 복수심 때문에...당신이 제 말을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약간 거리를 벌리고는 있는 힘껏 무릎 꿇었다. 뒤이어 땅바닥에 이마를 찧을 때는 곁에서 보던 아르유가 말려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녀는 온몸으로, 비통하게 사죄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디리터 아쟉스님. 에레이시아가 죽은 것은 저 때문이에요. 정말,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그녀만 아는 이야기. 만약 입 밖에 내지 않았다면 무덤까지도 가져갈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제스터와 처음으로 맞붙었던 날, 그녀는 충분히 상대할 여력이 있음에도 일부러 전투에서 이탈했다. 그 결과 제스터는 아무런 제지 없이 일행에게 접근했고, 에레이시아는 희생됐다. 당시의 유미르네는 이를 복수의 일환이라고 여겨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몇 번이고 이마를 찧어도 사죄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린 채로 말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년입니다. 만약 저와 니암이 살아 돌아온다면...그땐 기꺼이 제 목숨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부디...그때까지만 징벌을 유예해 주시길...”


그가 그녀의 고해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미르네는 그것으로 필사의 결의를 다지고는 다부지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에스터크는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가루루가 묶인 마구간으로 갔다. 놀랍게도 가루루는 아르유의 어떠한 명령도 없었음에도 순순히 유미르네의 탑승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장비를 점검하며 말했다.


“부탁해요 꼬마아가씨. 나를 루프리모의 아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요.”


아르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모하기는 매한가지이건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왠지 그녀라면 반드시 루프리모의 아이를 구해낼 것만 같은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명령에 가루루가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하늘은 쾌청했다. 가시거리도 넓어 조금만 고도를 높이면 아케니온의 위치가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막 도시를 지나쳤을 때 아르유가 말했다.


“아르유 아망초라고 해요. 당신은 유미르네 발렌스죠? 마리네 오빠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그렇군요.”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루프리모의 아이는 카이안 루시올라죠? 그런데 당신은 조금 전에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어요. 니암...니암이 누구죠?”


유미르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동생의 이름이 혀 위에서 한참이나 제자리를 굴렀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루프리모의 아이는 카이안 루시올라가 맞아요. 그리고 니암은...”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시린지 아르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담백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런 꼬마가 있어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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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69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8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8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2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09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79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3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2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0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6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5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0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3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1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999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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