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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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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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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7
글자수 :
2,844,987

작성
15.05.24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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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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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DUMMY

텔아단 연맹이 리크나이츠나 아스트리카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나 문화가 뒤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임을 고려하면, 도시 리그니체가 내뿜는 번화의 열기는 실로 이질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날이 밝아오는 시간인데도 종탑에서는 하루를 알리는 고성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고딕양식의 종탑을 따라 내려가면 거리에는 소, 말, 나귀, 심지어는 염소나 개까지 가축이란 가축은 전부 동원하여 수레를 끄는 상인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인 상인 길드다. 오죽하면 길바닥에 떨어진 가축의 배설물을 치우는 직업이 상설되어 있을 정도로 리그니체의 유동인구는 엄청났다. 그나마 소지품을 가볍게 하고 왔기 망정이지, 마차라도 끌고 왔다간 한나절이 지나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리크나이츠와 아스트리카의 전쟁이 오히려 이 도시의 중개무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전히 시끌벅적한 동네로군. 이칼롯, 여기 와본 적 있나?”


이칼롯은 짧게 답했다.


“예전, 기사 시절에.”


결국 초행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가볍게 도시 소개라도 하려던 알룬도는 머쓱해져서 말고삐만 만지작거렸다. 오히려 그들보다는 토박이인 엘라니가 더 들뜬 모습이었다.


“으아아...돌아왔어요! 드뷔사랑 함께 도시를 나설 땐 정말 비명횡사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작열 용설란을 손에 넣고서! 이제 졸업은 따 놓은 당상이야 드뷔사!”


엘라니는 용설란이 든 가방을 인형처럼 쓰다듬었다. 들떠서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는 옆에서 봐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상큼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드뷔사는...늘 그렇듯, 그러했다.


“아직이야. 직접 시약을 제조해 학회장님께 제출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


연금술을 공부한다고 했던가. 워낙 생소한 분야이기에 이칼롯과 알룬도는 굳이 두 소녀의 대화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괜히 아는 척을 해봤자 드뷔사의 현란한 입놀림이 돌아올 뿐이니까. 그저 케이달의 영애를 무사히 호위했다는 사실에 작은 성취감을 느끼며 이칼롯은 조용히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 짧은 고요의 시간을 드뷔사는 마지막에 와서도 무참히 깨뜨렸다.


“제르비안씨는 연금술이 뭔지 알고 계시나요?”


이젠 일례행사처럼 되어버린 그녀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고난도 오늘로 끝이기에, 이칼롯은 순순히 대답했다.


“글자 그대로. 금을 연성하는 학문으로 압니다만.”


“기원이야 그렇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금을 연성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에요. 현재는 화학연구를 통한 실용 가능한 물질 창조과정을 통칭하여 연금술이라 부르죠.”


“그렇군요.”


“아, 그렇다고 꼭 실험실에 박혀서 고리타분한 개론서만 뒤적이는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성과가 있어야 연구비도 나오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금본위적인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렇군요.”


이제 아카데미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칼롯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가장 수요가 많고 돈이 되는 건 역시 의료용 시약이에요. 가볍게는 감기약부터 시작해서 급속지혈제, 통증완화제, 각성제 등 다양하죠. 사실 저희도 처음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초급속외상치료제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트롤의 눈이라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재료가 필요하대서 포기했죠. 제르비안씨는 트롤이 뭔지 아시나요?”


“모릅니다.”


이제는 거짓말도 척척 나왔다.


“어찌 됐든 작열 용설란을 택한 게 결과론적으로 옳은 선택이 되었네요. 이것도 입수하기 아주 힘든 S급 재료니까요. 아, 혹시 수족냉증 같은 질환 앓고 계신가요?”


“...다 왔습니다.”


그는 서둘러 대화를 종결지었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하자 드뷔사와 엘라니도 금의환향의 환희에 취했는지 잠시 말을 잃었다. 확실히 건물의 규모나 미적 디자인에 있어서는 리크나이츠 왕립 아카데미를 능가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야 꼭대기를 볼 수 있는 고층 본관은 층간 사이사이마다 정교하게 조각된 부조가 장식되어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본관을 중심으로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실험실과 기숙사, 행정총관은 동선의 효율성을 고려한 설계사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수업에 늦지 않으려 분주히 발을 구르고 있는 어린 학생들. 가방을 놔두고서 굳이 커다란 개론서를 옆구리에 끼고 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전쟁이나 암살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평화로운 남방의 한 도시라는 실감이 났다. 드뷔사와 엘라니 같은 순진한 소녀들에게 어울리는, 그래서 더욱 이칼롯과는 맞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럼. 부디 졸업심사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어...”


드뷔사가 뭔가 말하는 듯했으나 그녀의 읊조림은 이내 인파에 묻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칼롯은 서둘러 도시 외곽을 향해 이동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녘에 성문을 통과해 아스트리카로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아직도 베스티언까지의 여정은 한참 남아 있었다. 어린 연금술사와의 만남을 회고하기엔 그가 닥친 현실이 너무 빡빡했다.


“예정보다 이틀 빨리 도착했군. 이 속도가 계속 유지되면 좋을 텐데.”


알룬도가 말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봄이 오기 전에 정전협정서를 들고 돌아가는 게 그들의 임무다. 할 수 있는 한 시간은 단축시키는 것이 좋았다.

두 사람은 변두리의 여관에 짐을 풀고 간만에 ‘조용한’ 휴식을 청했다. 말들도 편자를 갈고 영양가 높은 곡물을 먹자 피로가 풀리는지 저물어가는 석양을 향해 이따금 투레질을 해댔다. 한나절 내내 불타오르던 리그니체의 활기도 해가 저묾과 동시에 사그라져 거리는 고요 속에 잠들었다.

내일이면 아스트리카 땅으로 들어간다. 루도는 무사히 돌아왔을지, 또 카이안은 정신을 차렸을지 이런저런 고민을 안은 채 이칼롯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의 일정이 처참하게 어긋나리라는 것을, 그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날이 밝자 둘은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는 성문으로 나섰다. 늦장을 부리지는 않았으나 유동인구가 워낙 많아서인지 검문소에 줄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대다수가 상인집단이어서, 그들이 운반하는 화물을 검사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심이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일행은 검문소 앞에 설 수 있었다.


“뭐 하는 분들이오? 행선지와 목적을 밝히시오.”


험상궂게 생긴 병사 둘이 일행을 맞았다.


“베스티언으로 가는 여행객입니다. 그곳 유지에게 받아야 할 어음이 있어서 말이죠.”


알룬도가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 몇 장을 꺼내 보였다. 물론 위조한 어음과 신분증이다. 그러나 검문소의 뜨내기 병사들이 위조여부를 알아차릴 리는 만무했다. 예상대로 병사들은 어음의 내용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됐소. 확인했으니 특임신분증이나 보여주시오.”


.


.


.



“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알룬도가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말로, 그게 뭔지 몰라서 반문한 것이었다. 이칼롯은 순간 아차 싶었다.


“케러웨이 공작의 날인이 새겨진 특임신분증 말이오. 아스트리카로 가려는 거 아니었소?”


금시초문이다. 알룬도는 너무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란도스와 지스카르가 일을 서툴게 처리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통행증의 위조는 완벽했고, 통상적으로 그 한 장의 통행증만 있으면 출국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절차가 추가된 것이다. 지스카르도 전혀 몰랐을 정도니, 특임신분증이라는 제도는 아마 요 일주일 사이에 신설된 것임이 분명했다. 불과 며칠 전에 공표된, 그것도 아스트리카로 가려는 여행객들만 통제하는, 리그니체 대공의 날인이 새겨져야 할 정도로 까다로운 신분증이라니?

알룬도는 쉬이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더욱 문제는 위병들이 일행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특임신분증 안 가지고 오셨소?”


“아, 아, 아뇨. 가져왔습니다. 가져왔는데...그러니까...”


그는 있지도 않은 종이를 찾으려고 눈물겨운 연기를 선보였다. 그가 눈짓으로 이칼롯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칼롯은 조심스럽게 위병의 눈치를 살폈다. 위병은 이제 노골적으로 일행의 차림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잊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면 그들이 믿어줄까? 회의적이었다. 그렇다면 뇌물을 주는 건 어떨까? 대공의 날인까지 새겨진 문서라면 그리 호락호락하게 처리될 거 같진 않았다. 그냥 제압하고 달아나는 것은? 가능이야 하겠지만, 검문소에는 일행뿐 아니라 수백 명의 상단이 줄을 서 있었다. 소동을 일으킬수록 일행에게 독이 될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이칼롯, 어떻게 하지.’


‘...없다고 하면 당연히 의심을 살 거요. 여기서는 어떻게든 통과를 해야 하는데...’


속주머니를 훑는 알룬도의 행동은 이제는 절박하기까지 했다. 위병들은 아예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호각을 불 요량으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칼롯은 눈을 질끈 감고는 망토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이없이 트러블이 발생했지만, 이곳까지 와서 호락호락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 여기 계셨군요. 제가 늦진 않았지요?”


관계없는 행인들마저 고개를 돌릴 정도로 간들간들한 목소리. 그러나 그 어여쁜 음성과는 대비되게 무표정한 얼굴. 여자치곤 훤칠한 키와 가슴을 가린 연금술사 특유의 카디건은 멀리서도 그녀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였다.

때 아닌 구원자의 등장에 알룬도의 낯빛이 환해졌다. 반면 이칼롯은 전투를 각오했을 때보다 좀 더 이마를 찡그렸다.


“드뷔사!”


“학장님 사인을 받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마침 출국심사를 받고 계시네요.”


알룬도는 학장이니 사인에 대해 되물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는 드뷔사가 무언가 준비해 왔음을 눈치채고는 그녀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서신을 꺼내 위병에게 건넸다. 위병들도 그녀와 아는 사이인지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게 누구야. 여행 갔다고 들었는데. 별일 없고?”


“덕분에요. 다만 이번에 학장님 부탁으로 아스트리카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요. 이건 특임신분증. 아, 이분들은 아카데미에서 고용한 협력인이에요. 특임신분증 발급이 오래 걸려서 미리 줄을 서두라고 했는데, 괜찮지요?”


일부러 일행이 들으라는 듯 드뷔사는 평소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이칼롯은 그녀가 무엇을 준비해 왔는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위병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음...그건 좀 곤란한데. 이 행렬을 보니 알겠지만 모두 2~3시간씩 기다리면서 심사를 받고 있거든. 그런데 이런 식으로 꼼수를 부리면 통과시키는 우리 입장도 난처해져서...”


그러자 드뷔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자그마한 시약병을 꺼냈다. 병 속에는 녹색을 띠는 걸쭉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마치 가래라도 모아놓은 것 같은 그 액체를 내밀며 말했다.


“사뮤엘씨 전에 손발이 차고 발기가 잘 안 된다고 하셨죠? 제가 막 끝내주는 비약을 제조해 왔는데, 원한다면 한 병 드릴게요.”


“어...뭐? 진짜?!”


공짜란 소리에 위병이 신이 나서 약병을 받아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행을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던 병사는 어느새 드뷔사의 약의 효능에 관한 강의에 심취해 본분마저 잊은 천진한 환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쾌하게 이칼롯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 아직 계셨소? 와하하! 어서어서 지나가시오. 드뷔사의 지인이라는데 이거 내가 괜히 시간을 잡아먹은 게 아닌가 모르겠군.”


병사는 심지어 빨리 떠나라고 말의 엉덩이를 때리기까지 했다. 한참 가시방석에 앉아있던 알룬도는 성문을 통과하자 그제야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그는 뒤따라 나온 드뷔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큰 은혜를 입었군. 그런데 우리가 곤경에 처한 줄은 어떻게 알았지?”


“저도 아침에 알았어요. 특임신분증이라는 제도가 신설되었다는 걸요. 이건 검증받은 리그니체 시민에게만 발급되는 거라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서둘러 신분증 발급을 신청했고, 그 결과 여러분이 철창에 갇히는 신세는 면하게 된 거죠.”


“멋진 추리력에 멋진 행동력이야. 경의를 표하지.”


이 순간만큼은 이칼롯도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칼부림이 일어났을 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드뷔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이칼롯의 말에 올라 탄 것이다.


“자, 가죠.”


이칼롯은 잔뜩 이마에 힘을 줘 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음을 표현했다. 어처구니가 없기는 알룬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또 자연스러웠기에 그들이 운을 떼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로서는 드물게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드뷔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말했잖아요. 아스트리카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고.”


“그거...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거짓말 아니었소? 대체 목적지가 어딘데 그러시오?”


“흠, 그렇네요. 아마도 여러분이 가는 곳이겠죠?”


재회한 다음에야 이칼롯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무지 맞출 수가 없는 여자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도,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의중을 모를 질문세례도, 이제 와서 갑자기 따라오겠다는 꿍꿍이가 무엇인지도!


“그건 안 될 말이오.”


“왜죠?”


표정이 없다 보니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는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알룬도는 흔히 볼 수 없는 상황 -이칼롯이 평정을 잃은- 에 아예 한발 물러선 채 그들의 대화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이칼롯의 스트레스를 조금 덜어줄 생각으로 말했다.


“위험하니까. 우리가 리크나이츠 대사 자격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을 했던가?”


“국가 대사가 왜 단둘이, 호위도 없이 움직이나요? 그것도 직선로가 아닌 리그니체를 우회해가면서까지.”


“음...전에도 말했듯이 그건 비밀이라.”


이칼롯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대화를 지속하고픈 맘이 없었다.


“더 들을 것도 없소. 드뷔사 위릭, 도시로 돌아가시오. 이건 우리 일이오. 당신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그러자 드뷔사의 눈동자가 짓궂게 좌우로 굴러갔다.


“그럼 곤란해질 텐데요.”


“무슨 소리요?”


“특임신분증. 이건 꼭 리그니체 성문을 통과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아스트리카에서 더 필요하죠. 다리를 건널 때, 세관을 통과할 때, 혹은 배를 탈 때에도. 안타깝지만 이건 저밖에 사용할 수가 없어요. 제 이름과 소속, 성별과 신장 사이즈 모두가 위조할 수 없는 잉크로 작성되어 있거든요.”


알룬도가 입을 딱 벌렸다. 역시 특임신분증 제도는 허투루 생긴 게 아니었다. 리그니체가 아닌, 아스트리카에 들어온 불순분자를 확실히 색출해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혹시 흑연기사단의 시야를 피해 올지도 모르는 리크나이츠의 사절을 막기 위해. 이를테면 지금의 이칼롯과 알룬도처럼 말이다.

물론 굳이 특임신분증이 없어도 베스티언으로 갈 방법은 있다. 도시나 관문에 진입하지 않고, 길을 우회해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봄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일행으로서는 채택할 수 없는 수단이었다.


“그....”


결국 일행으로선 싫어도 특임신분증을 발급받은 드뷔사와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드뷔사의 어조는 다소 의기양양했다.


“이거면 「싸울 줄 모르고 말도 못 타는 어린 계집」이라는 단점을 상쇄할 만하지 않나요?”


이칼롯이 거칠게 손사래를 쳤다. 백번 양보해서 특임신분증이 필요하다 쳐도 이 여정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케이달의 딸이지 않은가. 그가 말했다.


“이건 애들 소풍이 절대 아니오.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일에 발 담그고 있는지 알고 있소?”


“음...아마도요. 이 세상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일이라 하더군요.”


이칼롯은 즉시 케이달을 향한 존경심을 철회했다. 멍청한 팔불출 같으니. 대체 딸내미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떠벌린 거야!

드뷔사는 이칼롯이 분을 삭이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목덜미를 치고 지나갔다. 해가 떴다고는 해도 몸이 움츠러드는 아찔한 추위였다. 그녀는 입고 온 카디건을 더욱 단단히 여몄다. 등에 메고 온 가방 안에는 여벌의 옷가지를 포함해 각종 여행도구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다시 그 틈바구니로 빛줄기가 새어나오게 될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실험실에 틀어박혀 원심분리기를 돌리든 약초를 빻든 그건 이 세계랑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함께 온 두 명의 군인들은 역사를 바꾸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니, 조금 심통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나요?”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까요 제르비안 씨. 나는 단순한 변덕으로 여러분을 따라온 거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차피 제 특임신분증이 필요하고, 그 소유자가 절대 불평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 아닌가요?”


이칼롯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미리 멘트를 암기해 와서 외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드뷔사의 말은 조리가 있었다. 현재 일행의 형편을 고려하면 드뷔사의 동행은 환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이칼롯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칼롯이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알룬도가 대신 결정을 내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더 다른 수도 없었다.


“그럼 같이 가지 뭐. 하지만 드뷔사, 말마따나 우리 일은 장난이 아니야. 우리를 따라 무엇을 보든, 무엇을 겪든 불평해서는 안 돼.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말이지. 그럴 수 있어?”


“...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알룬도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먼저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이칼롯은 고개를 돌린 채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재차 그녀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다. 등 뒤로 다소곳이 앉은 그녀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래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드뷔사는 숨을 내쉬는 것도 조심스럽게 하며 그가 마음을 다잡길 기다렸다.

이윽고 이칼롯이 말 옆구리를 차자 길었던 정적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말고삐를 쥔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칼롯은 가만히 말을 몰았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기까진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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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8 퉁실퉁실
    작성일
    15.05.24 08:43
    No. 1

    잘보고갑니다 ㅎㅎ
    그나저나 시점 전환이 잦아서 몰입이 힘드네요... 굳이 모든 인물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이미 글은 쓰여 있을테니...
    무튼 로샤단이 빨리 하나로 모이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레인Rain
    작성일
    15.07.13 17:19
    No. 2

    건필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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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8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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