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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3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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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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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DUMMY

“당신 지금 뭘 하려는 거죠?”


카이안이 위험하다는 것도 잊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놓고 인상을 구기는 그를 유미르네는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 또한 마음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절시킬까 아니면 무시하고 갈까. 그것도 아니면, 신의 아이든 뭐든 죽여버릴까.

아무리 표정관리를 해도 눈빛에 깃든 살의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카이안을 응시한 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침 그는 그녀의 검이 딱 닿을 정도의 거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카이안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유미르네는 그가 자신을 추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사고가 느리게 흘러갔다. 전장의 소음도 그들에게는 아릿하게만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편한 대치상황은 갑자기 날아든 화살을 유미르네가 쳐내며 끝을 맺었다. 내뻗은 숏소드는 이미 디리터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평정을 되찾은 것일까,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지 도련님? 그게 밤을 새워가며 달려온 지원군에게 할 소리야?”


“지원...군? 하지만 당신 조금 전 분명히...”


유미르네는 검을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러 그의 추궁을 일축했다. 그녀가 일으킨 바람이 입안으로 들어갔는지 카이안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이미 주도권은 유미르네에게 있었다. 그녀는 카이안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방해는 여기까지 해주지? 피차 잡담이나 떨기엔 바쁜 시간 아닌가?”


그제야 카이안도 성문의 교전상황을 확인하곤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혹 섞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막 부상자를 부축해 사라지기 전, 그는 경고라도 하듯이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일단 이 일은 덮어두겠어요. 일단은...”


유미르네는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카이안이 보낸 적의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힘껏 방해해준 덕에 이제는 디리터를 죽일 수도 없게 됐다. 그의 주위로 병사들이 집결했을 뿐 아니라, 어디선가 나타난 제리온이 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분노를 억제하려 하자 자연스레 구겨진 미소가 띠어졌다. 누구라도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두 자루의 검을 펼치고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카이안 루시올라, 역시 거슬리는 존재다. 신의 아이든 뭐든 차후에도 자신의 복수를 방해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목을 날리리라 유미르네는 다짐했다.



****




-제리온, 도망쳐라.


-무슨...농담이죠?


-지금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여기사 개죽음 당하느니, 살아서 미래를 기약해라.


아버지는 무작정 살아남으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짧다면 짧았던 용병생활. 그 시절 제리온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라는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잃고서, 비참하게 호흡을 유지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르카엘시온 멜피드라는 인간은....졌다. 그리고 꼴사납게 달아났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나절도 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파상풍의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좌절감이나 절망 따위가 아니었다.

지독한 굴욕. 자신이 이토록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니,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좋은 옷과 따뜻한 음식, 향기 그윽한 봄날의 정원과 아담하지만 포근했던 집. 행복을 표현하는 단어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생사의 기로, 아니 운명의 기로에 섰을 때 그런 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그는 절실히 깨달았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밟는 대지, 내가 먹는 밥, 내가 영위하는 모든 것들. 그걸 지키는 것 또한 ‘나’여야만 했다. 오로지 흔들리지 않는 내가 있을 때만이 행복 또한 쟁취할 수 있었다.

강해지자.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그때는 결코 달아나지 말자.

그는 그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카토르 르휘베트. 그는 확실히 제리온과 닮은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리온에 비해 나이도 많았고 인생경험 역시 풍부했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포자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이 잔뜩 부유해있는 반 지하 연구실에서, 두 사람은 밤을 지새워가며 마법을 연구하곤 했다. 그 시절의 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도무지 마법사가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야.


-왜 또 시비요?


-전투를 원한다면 검을 쥐었어야지. 지식을 원한다면 학자가 되었어야지. 왜 문(文)을 도구로 무(武)의 세계에 기웃거리는 게냐?


-왜냐하면...나는 천재이기 때문이지!


-이놈 새끼가 진짜.


회고해보면 가끔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는 카토르의 눈은 늘 진지했다. 벽 한구석에 낸 자그마한 창으로 햇볕이 들어올 때면 뿌연 먼지가 한가득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그것들은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를 동경했었지. 손 위로 날아다니는 빛의 구슬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도(魔道)의 길이란 그런 게 아니었지.


-마도학은 학문이다. 마법이 곧 지식이고.


-킥킥...꼰대들은 그렇게 말하지. 내 생각은 좀 달라. 마법은 곧 힘이야.


-녀석, 지식이 힘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얼추 맞지. 실용되지 않는 지식은 망상에 불과하니까. 홀리메이지 훌리오? 웃기는 인간이야. ‘랜드 블레이즈’라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마법을 고작 화전 일구는 데에밖에 사용하지 못하다니.


제리온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를 듣는 카토르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왜 그렇게 힘에 집착하는 것이냐? 살인은 그다지 유용한 행위가 아니야.


-딱히 뭘 부수는 데 취미가 있진 않아. 다만...내가 강하면 모든 해결되지. 남에게 손을 빌려야 할 필요도 없어. 언젠가 실전과 마주하면, 지금 내가 익힌 마법들이 필시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너에게 실전이란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거냐?


카토르는 늘 관조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제리온이 뭐라고 말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답을 회피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리온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조합해 쥐어짜 내듯이 말했다.


-지금껏 쌓아올린 ‘나’라는 존재가 패배할지도 모르는 상황?


-지는 것이 두려우냐?


-그쯤 해두셔. 설교나 듣자고 당신 제자가 된 건 아니니까. 그보다 다음 촉매는 뭐로 해?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약재를 섞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카토르는 잊어버렸던 기억을 끄집어내듯 화제를 이어갔다. 제리온 역시 대화가 명료하게 끝난 게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패배 자체가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결과가 두려운 것이냐?


-...뭐든 상관없잖아.


-네 인생관은 비뚤어졌어. 아마 좋지 않은 과거가 너를 이리 만든 것이겠지.


-누가 들으면 인생 밑바닥 깡패라도 되는 줄 알겠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들어와 눅눅한 연구실을 환기시켰다. 막 아침밥을 먹은 이른 시간, 아마도 벼이삭이 익어갈 가을날의 언젠가.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이었다. 흘러가는 구름에 실어 보내듯, 카토르는 초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뭐...나쁘지 않겠지. 여긴 너처럼 상처 입은 꼬맹이들이 꽤 있으니까. 함께 부대끼며 살다 보면 깨닫는 것도 있을 게야.

.

.

.


“...개뿔.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늘만은 여전히 그 시절과 다름없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흑연기사단과 레인스터 병사들의 교전이 한창이었다. 제리온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에 힘을 준 순간 상처부위에 엄청난 통증이 와 이맛살을 찌푸렸다.


“크윽...기절했던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억지로 여장에 등을 지탱하여 일어나자 근처에 있던 장교가 놀라 다가왔다.


“멜피드 경! 몸은 괜찮으십니까?”


“됐고, 지금 전황이 어떻게 되는 거요?”


“델키아에서 지원군을 보내오긴 했는데 그 수가 너무 적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10분도....”


제리온은 대충 눈대중으로 수성상황을 확인했다. 흑연기사단의 물량공세에 성벽 곳곳이 점령당한 상태였고, 일주일간 활약했던 망고넬 투석기도 적의 화공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성문이 뚫려 적이 진입할 루트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쿨럭...또 언제 충차를 끌고 온 거야? 하여간, 내가 없으면...”


제리온은 천천히 수인을 맺었다. 뱃속에 든 걸 몽땅 게워낸 것처럼 허탈한 감각이 그를 지배했다. 움직이는 손가락엔 이미 감각이 없어, 마치 꼭두각시가 된 몸을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고 주문을 외웠다.


“파이어볼.”


성문의 천장이 무너지며 일시적으로 바리케이드가 형성되었다. 물론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 몇 분이 중요한 순간이었다. 적의 공세가 일순 정지하자 제리온은 대열을 추스르며 말했다.


“여긴 끝났어.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퇴각한다. 지금 당장 부상자부터 옮겨.”


“예? 아...예!”


비틀거리며 성벽 계단을 내려오고 있자니 디리터를 비롯한 아군 병사 몇몇이 기침을 해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일으킨 폭발이 아군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너 임마! 마법을 쓸 거면 미리 경고라도 해주던가.”


“내성으로....퇴각한다. 디리터, 유미르네. 너희에게 후위를 맡긴다.”


디리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 버텨봤자 개죽음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잠자코 있던 유미르네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후위대만으로 괜찮겠어요? 아까 성문이 뚫렸을 때 기마대 100기 정도가 도시로 진입했다고요. 그걸 남겨두면 후환이 좋지 않을 텐데.”


“...뭐?”


난데없는 비보에 제리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충격은 비단 전술상의 불리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성은 어떻게? 병력을 있는 대로 끌어나 쓴 덕에 지금 내성에는 아이와 부녀자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기병 100기만으로 성채가 함락될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성문이 열려 있다면? 아니면 아둔한 시민들이 아군인 줄 알고 문을 열었다면? 그것도 아니면 공포에 질려 항복했다면?

그의 머릿속으로 한 소년의 당돌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린,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도 싸우게 해달라고 떼를 쓰던 그 소년의 뒷모습이 제리온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어쨌든, 넌 지금 중상자니까 무리하지 말고 뒤로 빠져. 깃발병 뭐 해요? 내성으로 퇴각합니다!”


“.....”


분명 바로 옆에서 외치고 있는 것인데도 디리터의 목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땅을 밟고 있는 건지, 구름을 밟고 있는 건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오직 떠오르는 것은 오린, 그리고 울며 기도하고 있을 레인스터 시민들의 얼굴뿐이었다.

패배란 도시를 내어주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을 잃는다면, 그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주일간의 투쟁 자체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속된 통증으로 식은땀조차 나지 않는 상황인데도 그는 두 다리에 몸을 맡긴 채 비척이며 걸어갔다. 그러나 무너진 성문을 타고 돌격하는 적군에게 정신이 팔려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아득히 귓가에 맴도는 병장기 소리를 뒤로 한 채로 제리온은 아무도 없는 상점가를 가로질렀다. 인적이 끊긴 거리는 너무나도 황량해서, 바로 조금 전까지도 소음과 피 냄새에 절어 있던 자신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멀리 대피하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리온은 그들에게 적을 보았냐고 물어보려다가, 순간 쇄골을 싸고도는 아찔한 통증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은 움직이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육신이 삐걱거리자 사고도 점차 몽환적으로 흘러갔다. 침을 뱉자 걸쭉한 피가 잔뜩 섞여 나왔다.


“크, 하, 아직, 아직이야.”


그는 다시 억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내성은 고요하게만 보였다. 불길이 번진다든가 흑연기사단의 깃발이 나부낀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돌입한 흑연기사단의 기마병 역시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는 한 시민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제리온은 이를 악물고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사이 도시 외곽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신호 깃발이 미친 듯이 나부끼고, 청동으로 만든 경종이 바스러져라 울려댔다. 첨탑의 정찰병이 손나팔을 만들어 고래고래 외쳐대는 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왕실기사단이 왔다. 왕실기사단이 왔다.


“...뭐야...진짜로 온 거야?...머저리들만 모인 줄 알았더니...”


웃음이 나왔다. 배가 들썩일 때마다 죽을 만큼 아픈 데도, 자꾸자꾸 웃음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이긴 건가...”


성문에 다다랐을 때 그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앞으로 흑연기사단의 병사 10여 명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성벽 위로 여자들이 돌멩이를 실어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늙은 병사가 성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멜피드 경? 멜피드 경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적은 물러간 겁니까?”


“기마대가....이쪽으로 왔을 텐데....”


“아아, 이 녀석들 말입니까?”


병사는 기마대 100기가 내성으로 돌격해오긴 했지만, 두터운 성문과 위에서 부녀자들이 던지는 폭포수 같은 투척세례에 밀려 달아났노라고 설명했다. 그 말에 맥이 풀려 제리온은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설마 이럴 줄이야.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려움에 눈물만 흘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스스로 일어나 돌을 던지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강인한 얼굴들인가. 괜한 걱정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런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내성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한 무리의 기마대가 고개 능선을 끼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던 소년은 제리온도 익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전부 처리한 뒤 남문 쪽을 지원하러...엇?”


“루도....냐?”


천금보다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델키아 레인저들이 동문을 돌파해 진입해온 것이다. 루도와 마리네도 그를 발견하곤 즉각 반색하며 달려왔다. 마리네가 말했다.


“무사했구나, 제리온! 적의 기마대가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기에 걱정했는데 아마 곧...”


씨융, 퍼억.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투창이 날아와 늙은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모두가 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랜스를 수평으로 향한 채 맹렬히 돌진해오고 있었다.


“흐, 흑연기사단? 막아!”


성문을 돌파해 도시로 진입했던 100인의 기마대는, 하지만 레인스터 시민들의 항전과 우연찮은 델키아 레인저와의 조우로 이미 9할의 병사를 잃고 난 뒤였다. 그러나 채 열 명이 남지 않은 상황인데도 그들의 의지는 명확했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의 지휘관을 쓰러뜨려야 한다! 어스름 진 골목에 숨어있던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마리네의 사소한 한마디였다. ‘제리온’이라는 이름이 퇴로마저 차단되어 낙담하던 기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적의 지휘관이 근처에 있었다. 내성을 점령할 수도, 도로 성 밖으로 달아날 수도 없다면 - 여기서 그자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다.


“설마, 설마 이런 곳에서 우리가 패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폭의 제리온, 네놈만은 반드시 저승길 동무로 삼아주마!!”


두두두두두...! 죽음을 각오한 기사들의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동시에 뛰쳐나간 레인저 몇몇이 측면에서 그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그들에게선 광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루도가 몸을 날려 그들 중 하나를 말에서 굴러 떨어뜨리며 외쳤다.


“제리온! 어서 달아나! 어서!!”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제리온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루도와 마리네의 표정을 살폈다. 얼마나 놀랐는지 동공이 크게 부풀어 있다. 격자형으로 만들어진 성문 안쪽에서는, 언제 달려왔는지 오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그마한 두 손을 바르르 움켜쥔 채로.

그리고 달려오는 세 명의 기사들. 그들과 마주하자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들어 한숨이 탁 터졌다. 그냥 씨익, 하고 - 뭐가 그리 유쾌했는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법...은 나갈까? 이미 정신에 한계는 왔다. 무거운 탈력감이 온몸을 타고 도는 데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캐스팅이 성공할 리 없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에도 몇 번씩 혼수상태를 넘나들었던 그였다.

그러나 제리온은 차분히 한 손으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맥박은 그 어떤 때보다도 고요했다. 수백, 수천 번을 연습했던 마법이다. 언젠가 마주할 실전을 위해, 긴긴밤을 지새우며 목이 터져라 외쳐댔던 마법이다.

실패할 리가 없다. 이것을 위한 수행이었으니까. 이것을 위한 인생이었으니까. 파싯, 하고 불꽃의 잔영이 떠올랐다.

화아악! 치솟아 오른 불길이 제리온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루도는 불꽃 너머로 일렁이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짙은 다크서클과 화난 듯 찡그린 미소, 반쯤 벌린 입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송곳니. 불꽃을 머금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막 기사들이 창을 내찌르기 직전, 그는 허공에 떠오른 화염을 불끈 움켜쥐며 외쳤다.


“아드레노프의 작렬(Adrenoff's Burst).”


퍼퍼펑! 땅속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폭발이 불꽃의 잔영을 남기며 기사들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물론 그들이 타고 있던 말까지도 산산조각이나 멀리 튕겨져나갔다.

루도 역시 폭발의 중심지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폭압에 밀려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폭발에 놀란 군마가 달아나면서 레인저 몇몇이 낙마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렇게 몇 바퀴를 구르던 루도는 볏짚더미에 파묻혀 멈춰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제리온을 찾았다. 그러나 폭발로 말미암은 연기가 일대를 뿌옇게 덮은 상황이었다.


“제리온! 제리온 어딨어?!”


바람이 불어와 연기의 장막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애타게 제리온의 이름을 부르던 루도는 문득 마리네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못박혀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제리온은 그리 멀지 않은 성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 자신이 일으킨 폭발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이리라. 루도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순간, 잔인하게도 바람이 마지막 장막 한 조각을 거두어갔고, 루도는 그만 다리가 풀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습에 제리온이 키득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킥...뭐 이런 거지.”


애써 일어나려던 그는,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자 미련 없이 포기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복부를 관통한 창은 성벽 깊숙이 박혀 그가 쓰러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마법...은...성공했지만...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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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5) +2 15.06.02 925 25 15쪽
331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4) +3 15.06.02 990 25 19쪽
330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3) +7 15.06.01 913 33 18쪽
329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2) +2 15.06.01 930 27 22쪽
328 람의 계승자 - ep.7 - 이 추하고 아름다운 세상(1) +3 15.06.01 878 26 23쪽
327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5) +5 15.05.31 935 29 13쪽
326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4) +1 15.05.31 850 23 19쪽
325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3) +2 15.05.31 918 25 22쪽
324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2) +2 15.05.31 948 24 19쪽
323 람의 계승자 - ep.7 - 후회없는(1) +1 15.05.31 782 21 20쪽
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0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7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69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2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0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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