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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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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30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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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DUMMY

약조한 사흘이 지나자 고요하던 능선에 다시금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중장병대가 대열을 갖춘 채 양익으로 배치되는 게 보였다. 주력을 맡은 전열보병대도, 후방예비대와 궁병대도 사흘이라는 평화가 무색하게 군기를 뽐냈다. 가장 흥이 돋은 것은 역시 흑연기사단이었다. 스벤달은 딱히 부르지도 않았건만 아침부터 레오문드를 찾아와 비아냥을 일삼았다.


“고매하신 총사령관의 혜안 덕에 사흘이 거저 날아갔군. 그사이 리크나이츠 쪽은 전력도 보강하고 말이지.”


그는 결박당한 디리터를 보며 조소했다. 지난 사흘은 예를 갖추어 주었다고 해도 약속날짜인 나흘째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무기를 빼앗긴 것은 물론이요 사지의 움직임이 철저히 봉해진 상태로 레오문드의 곁에 앉아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든 목을 칠 수 있게 무장한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스벤달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은 그림이군. 실패한 영웅 나부랭이와 그를 믿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 기사단장 나리. 그나저나 오늘이 나흘째가 아니던가? 왜 아직도 저자의 목이 붙어 있지?”


레오문드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가 아는 스벤달은 잔인하긴 해도 냉철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떠드는 남자는 시정잡배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인가. 아니, 무엇이 그를 이리 조급하게 만든 것인가. 어쨌든 그의 말마따나 기분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에 레오문드는 적당히 비아냥거림을 쳐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전투가 시작되면 내가 먼저 처형할 거요. 그런데, 흑연기사단은 한가한가보오? 장군이 이렇게 잡담이나 떨러 오고.”


“후후후...기대하지. 정 내키지 않으면 얘기하라고. 로샤단을 죽이는 수고 정도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의기양양하게 떠나는 그를 보며 레오문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디리터는 둘의 대화를 듣고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약조한 날짜가 모두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정전협정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정말로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규네포의 의식에서 디리터가 보여준 진정성은 경의를 표할만 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그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이제 그 시간은 지나갔다. 여기서 죽이지 않는다면 레오문드와 디리터, 양자의 명예에 모두 먹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레오문드가 안타깝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흘을 요구했어도 들어줬을 텐데.”


“그러게요. 좀 더 부를 걸 그랬네.”


디리터는 태연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임에도 그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루도가 지나갔을 남쪽 산등성이를 향해 아쉬운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그때 아슬란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는 디리터를 흘깃 쳐다보고는 레오문드에게 보고했다.


“배치 끝났습니다. 천정기사단도 양익을 전진배치하고 있습니다. 저쪽도 총력전에 나설 모양입니다.”


“알았다. 개전신호는 내가 보낸다. 그때까지 대열을 유지하도록. 특히 흑연기사단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는지 주시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이제 레오문드가 손짓만 하면 전투개시였다. 또한 이는 곧 디리터의 목숨도 날아감을 의미했다. 중장기병대가 깃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문드는 명령을 내리길 주저했다. 그것이 한 청년이 보여준 신념에서 비롯되었음을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자네는 실패했네.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제 죽을 차례네. 안타깝지만 나 역시 일군의 사령관으로서 더 이상의 모험은 할 수 없다네. 이해해주길 바라네.”


그러자 디리터가 웃으며 답했다.


“저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죽어도 정전협정서는 반드시 옵니다. 그때가 되면 주저 없이 이 전쟁을 끝내주십시오.”


실로 안타까운 사내다. 여기서 헛되이 명을 달리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루도 클로람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레오문드는 마음을 다잡고는 칼을 빼들었다. 그는 디리터의 목을 직접 벨 생각으로 그를 감시하던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짧은 고민 후에 그는 깃발병에게 명령했다.


“전군 전진. 우익부터 적진으로 돌격한다.”


전투가 시작됐다.



******



“아델하트 장군,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퇴각 명령을 내려주세요!”


“...불가하네. 이 관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누이 말했던 거로 아네만.”


마리네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가이잘모에게 매달렸다. 주변에는 장교들을 비롯해 보는 눈이 많았는데, 다들 어림도 없는 요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측은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마리네의 심정은 절박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디리터가 죽어버린다고요!”


가이잘모가 착잡하게 탄식했다. 그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전쟁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다. 용감한 청년 하나를 구하자고 요충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전협정서만 제때에 도착했다면 모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지휘부의 허락도 없이 적진으로 향했을 때 아쟉스도 그 정도 각오는 했을 게야. 게다가 멋대로 목숨을 담보로 걸어버린 것도. 안타깝지만....오늘 그가 죽는다면 이는 모두 그가 자초한 결과네.”


“그런....!”


마리네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이미 평정심이 날아가 가이잘모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디리터가 죽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디리터가 죽는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이는 마리네에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람카디스, 카토르, 돌크와 가크스를 비롯한 로샤단 사람들, 에레이시아, 제리온, 제르칸트에 이어...이제는 디리터까지? 순간 구토가 올라와 그는 고통스럽게 토악질을 했다. 가이잘모는 그 광경을 그저 씁쓸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한 차례의 토악질이 끝나갈 때쯤 에리안델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진정해요 마리네. 흥분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고요!!”


마리네가 욱해서 소리쳤다. 누구도 디리터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는다 - 그렇게 생각하자 절박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눈동자에 핏줄이 돋고 미간 근육이 수축했다. 곱상한 외모가 노기로 일그러지기까지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우리는 두 번이나 이 나라를 구했어. 란도스 폐하를 마인드컨트롤에서 구해내고, 레인스터에서는 몇날며칠을 싸워가며 적을 격퇴하고...그런데...그런데...왜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왜 하필 디리터가...”


아무리 에리안델이 진정시키려 해도 헛수고였다. 이건 부조리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충분히 희생해왔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의 목숨은 늘 위태로운가? 다른 누군가가 대신 죽어주면 될 텐데.

마리네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도가 넘은 행동이었으나 그를 제지하는 병사는 없었다. 가이잘모가 그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배려한 덕분이었다.

이윽고 마리네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떨림은 온데간데없이, 어금니를 악문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그가 말했다.


“저 혼자라도 디리터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만약 디리터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는 말을 맺지 않고서 막사를 떠났다. 그러나 함께 있던 에리안델은 마지막에 그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당신들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휘막사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마리네의 행동은 어린애의 일방적인 떼쓰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은 것은 디리터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기 때문이었다. 그가 벌어다 준 사흘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네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미나가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카이안이 그녀와 함께였는데, 막사에 모인 장교들 중에는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다수였기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요구도 마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레미나는 평소보다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실은 이루어질 리 없다는 부탁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했다.


“아델하트 장군, 퇴각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최소한 별동대라도 구성해 디리터를 구출하도록 하죠.”


“...그게 얼마나 가능성 없는 작전인지 공주님이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알아요, 하지만...그래도....”


머리는 이해하는데 가슴은 그러질 못한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디리터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설령 구조대가 적진을 뚫고 잠입한다고 해도 디리터 쪽에서 탈출을 거절할 게 분명하다. 그만큼 이번 일은 개인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사흘 간 마리네와 카이안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아마 루도와 이칼롯이 돌아온다면 똑같은 표정을 지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로샤단에서 디리터는 중요한 존재였다.

카이안은 레미나의 곁에 서 있었으나 사고가 마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백해진 얼굴을 식은땀이 가득 뒤덮었다. 지켜보던 기사 하나가 안쓰러워하며 부축해주려 했으나 그는 거세게 뿌리쳤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이렇게 통탄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레미나의 곁에서라도 무언의 침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속절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별동대는 가망이 없고 전군후퇴는 당연히 불가한 요구다. 레오문드가 원칙을 깨고 디리터를 살려줄 가능성도 희박했다. 결국 디리터를 살리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정전협정서가 도착하는 것.

그러나 협정서를 가지러 간 일행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정찰대를 광범위하게 파견했으나 그들을 보았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봉화가 올라오고 오늘로 나흘째였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을 몰았다면 지금쯤 도착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레미나와 가이잘모의 논쟁이 해답 없는 평행선을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병사 하나가 쭈뼛거리며 지휘막사로 들어왔다.


“어,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병사는 불편한 기류를 감지하곤 헛기침을 했다. 가이잘모는 병사를 가까이로 불렀다. 딱히 보고가 궁금하다기보다는 레미나와의 언쟁을 적당히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예...그게 공주님을 알현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공주님을? 지금?”


레미나가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현이라고 해봤자 어디 귀족 나부랭이일 것이다. 디리터 문제만으로 속이 썩는데 다른 데에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누군데 그래요? 정말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만나줄 수 없다고 해요.”


“음...중요한지는 모르겠는데 특별해 보이긴 했습니다. 웬 여자애가 무슨...새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엄청 큰 동물을 데리고 왔는데, 그런 건 생전 처음 봅니다. 그러면서 공주님과 아는 사이라고 꼭 만나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더라고요.”


새? 그 순간 레미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설마! 그녀는 왕족의 체통이고 뭐고 치마를 걷어붙이고서 엎어지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안내해줘요! 어디라고요?”


레미나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알현신청자가 있다는 위병소로 향했다. 소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였다. 레미나는 그 모습을 보곤 거침없이 외쳤다.


“길을 열어라! 나는 공주 레미나 리크나이츠다!”


효과는 대단했다. 그 많은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졌다. 레미나는 그 끝에 서 있는 소녀를 발견하곤 탄성을 터뜨렸다.


“아르유...?!”


아르유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밝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르유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 아르유의 곁에 선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괴조, 그리폰에 못박혀 있었다.


“가루루!”


이거다. 마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거라면 루도를 찾을 수 있다. 그녀는 홀린 듯이 가루루에게 달려갔다. 멀리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훼창기사단의 진군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정전협정서를 들고 달린지 벌써 나흘째였다. 어림짐작으로도 전투가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으나 루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늦지 않았다, 늦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위하며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 체력은 이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오히려 타고 있는 말 쪽이 문제가 더 심각했다. 웬만큼 튼튼한 군마라도 반나절만 달리면 이후 며칠간은 꼼짝도 없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녀석은 루도를 태운 채로 나흘을 내리 움직이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도 발을 멈추지 않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대견하다못해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여기 지나쳤던 기억이 나. 이제 거의.....다 왔어...』


신의 아이와 숙주는 육체를 공유한다. 당연히 제오프의 의식도 정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몽롱해져가는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마르테너스까지 얼마나 더 가야 되지?


『한 시간...쯤이지만 말 상태가 이러니 배는 걸리지 않을까...』


“제발....늦지 않았기를...”


봉화는 나흘 전에 확실히 피웠다. 지금쯤 마중이 나와 있어도 될 텐데 어째서인지 지나치는 길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중간에 흑연기사단 정찰대를 발견해 황급히 몸을 숨겼을 정도였다.

굽이진 숲길을 지나자 능선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나왔다. 말은 비틀거리면서도 조금씩 오르막길로 나아갔다. 이곳을 넘으면 멀리 마르테너스 관문이 보인다. 어쩌면 훼창기사단과 천정기사단이 마주한 전장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목이 타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식수는 조금 전에 전부 말에게 양보한 참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믿을 것은 타고 있는 말의 위태로운 다리뿐이었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그 무렵 루도는 피로와 갈증이 극에 달해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때문에 어린아이도 감지했을 살기를 적이 코앞에 다다른 후에야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웬 거렁뱅이 하나가 길가에 서 있었다. 졸린 눈을 감았다 떼자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인지 그자가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다시 눈을 깜박이자 또 한껏.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땐 그자가 꺼낸 글레이브가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 올려져 있었다.


“...?!”


루도는 그제야 위험을 느끼곤 넘어지다시피 몸을 날렸다. 서컹! 남자의 일격이 깔끔하게 말의 목을 절단했다. 이미 기력이 다해 있던 말은 단말마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갑작스런 기습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재빠르게 낙법을 하고서 루도는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상대는 굳이 루도를 추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길을 막아 선 채 차분하게 글레이브를 갈무리했다. 주변에 리크나이츠 병사로 보이는 시신이 몇 구 보였다. 그들 역시 저 남자가 처리한 것이리라. 루도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왜냐하면 루도는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위첼!!”


위첼은 루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보는 그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그 나름의 울분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루도 클로람...”


그는 레이시의 명령으로 정전협정서를 빼앗기 위해 길목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날이 밝아도 로샤단이 나타나지 않아 레이첼의 맹수부대에 당했으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루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막 훼창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테니 시간을 따지면 꽤나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그것도 끝이었다. 말을 죽였으니, 아무리 발을 굴려도 이제는 제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일단 전면전에 들어가고 나면 어느 한쪽이 궤멸하지 않는 이상 전투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안개송곳니의 승리가 결정되는 시점이었다.


“비켜!”


루도가 거세게 위첼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피로가 쌓인 일격은 위협 수준도 되지 못했다. 위첼은 적당히 뒷걸음질치며 루도의 공격을 받아냈다. 사실상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으로도 루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위첼이 힘을 주어 반격하자 루도는 여지없이 튕겨나갔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위첼이 말했다.


“다 끝났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전쟁은 막을 수 없어.”


“누구 맘대로 끝나? 이 개자식이!”


루도가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몇 번을 해본들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위첼이 봐주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루도에게 치명타를 날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번번이 무기를 거두었다.


“그만해라.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윽...제기라알!”


아련히 뿔나팔 소리가 귀를 치고 지나갔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의 신호다. 그걸 듣자 속이 타들어갔다. 솔직히 여기서 위첼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시간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순한 사명감을 떠나서, 이번 일을 실패하면 무언가 커다란 상실감이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절박함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두 차례나 위첼의 반격에 밀려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제오프, 어떻게 좀 해봐!”


그러자 그때까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위첼의 눈빛이 일순 반전했다. 그는 당연히 루도가 그전까지 알던 그 ‘루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도는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또 다른 존재를 입에 담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위첼은 멍청하지 않았다.


“제오프....라니? 그게 누구지? 너 설마....!”


위첼이 극도로 긴장하여 글레이브를 고쳐 잡았다. 루도 역시 단번에 그를 날려버릴 생각으로 도움닫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제오프는 답이 없었다. 오오라의 분출도, 넘쳐흐르던 힘의 파동도 없었다. 듣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는 명백히 루도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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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4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69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8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4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2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09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6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79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39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290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09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6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3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2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8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0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6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7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5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0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3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1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999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2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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