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현기증이 일어나 쉬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손에 힘이 풀리자 롱소드가 무기력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루도는 처음에는 기분 나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에 그랬듯, 그는 누구보다 빨리 현실을 직시했다. 아니,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여선 안 되는, 그리고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어쩐지 오늘은 끗발이 좋더라니.」
제리온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그의 생각이 또렷이 전해져온다. 그래, 너무나도 또렷하게. 루도는 그 순간 제리온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아아!"
그러나 몸과 머리가 인정해도, 심장은 그러질 못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죽음과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100명 중 99명이 죽는 전장이 있다면, 오직 살아남는 최후의 1인이 될 거라 자신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것은 람카디스의 죽음과는 또 다른 종류의 충격이었다. 제리온은 기존의 로샤단 사람들과는 다른, 함께 어깨를 맞대고 울고 웃으며 루도의 유년기를 이끌어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어째서?
"루...도..."
끊임없이 납득과 반박을 반복하던 그의 머리를 식힌 것은 쥐어짜내듯 토해낸 제리온의 한 마디였다. 루도는 즉시 기어가다시피 하여 그의 곁에 바짝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배를 관통한 랜스가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이건...틀렸다. 치료의 여지조차도 남겨놓질 않았다. 억지로 창을 뽑으려 했다간, 그대로 쇼크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루도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곤 힘없이 늘어진 제리온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보물을, 결코 잊지 않으려는 듯이.
"어. 나 여기 있어...제리온."
"...전황...은 어떻...."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왕실기사단이 도착했어. 5천이 넘는 대병력이야. 지금 스벤달은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다고.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레인스터를 지켰다고! 우리가 이겨...이겼는...데...윽..."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몇 갈래씩 주르륵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떨어진 눈물 몇 방울이 제리온의 손등 위에 부서졌다. 그 온기를 느꼈는지, 제리온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그...러냐..."
「그런가. 그럼 된 거야. 그래, 정말 잘 됐어.」
"잘 되긴 개뿔이 잘 돼!!"
흐느낌은 곧 오열이 되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리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루도는 팔꿈치를 움직여 연방 눈시울을 훔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결코 맞잡은 제리온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손의 온기가 점차 식어간다. 눈동자의 빛이 점점 사라져간다.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엉망으로 타들어갔다.
"멜피드 경! 우리가 이겼습니다. 적이 패주합니다. 우리가 이겼다고요! 우리가...?"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달려온 정찰병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들끓던 심장이 차갑게 식었고, 그도 곧 루도가 그랬던 것처럼 멍청하게 무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축 늘어진 손은 갈피를 못 잡고 바르르 떨렸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적군을 피해 내성으로 대피하던 부상병들,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던 병사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달려나오던 사람들. 모두가 똑같았다. 제리온을 보는 순간, 시간은 허무하게 멈춰버리고 만다.
"제리온, 어디 있냐? 제..."
디리터도 마찬가지였다. 유미르네도 이번만은 고통스럽게 눈을 질끈 감았다. 카이안은 얼굴을 가린 채로 엉엉 울었다. 그 어떤 불꽃이라도, 그라는 얼음과 맞닥뜨린 순간 거짓말처럼 해열(解熱)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휘몰아치던 삭풍도 지금은 쓰리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레인스터는 승리했다. 그리고 승리를 이끈 이는 다름 아닌 제리온이었다. 일주일간의 악몽은 그가 있음으로 단지 아픈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곧 그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이 만들어졌다. 내성 안에 웅크리던 사람들도 모두 나와 제리온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레인스터를 지킨 영웅을, 모두가 패배에 젖어있을 때 오직 홀로 승리를 부르짖었던 한 남자의 최후를.
"그...컥..."
제리온은 무언가를 입에 담으려 했지만, 몸을 역류한 피가 입속을 가득 메워 그럴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게 왈칵 피를 뱉어낸 그는, 곧 루도의 능력을 생각해내곤 그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루도 녀석, 죽어가는 사람의 속마음이 느껴진다고 했었지. 얌마, 지금 내 생각이 들리냐?」
루도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리온은 픽, 하고 덧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인정했다.
「그럼 역시 난 죽는다는 거구만. 쳇, 난 좀 더...활약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이 정도면 됐으려나.」
평소와 다름없는,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체념적이어서, 마치 이 모든 게 하룻밤의 별난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슬프게도 제리온의 입은 가쁜 호흡만 이어갈 뿐, 이제는 제대로 된 단어 하나조차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도 그걸 깨달았는지 제리온은 루도를 향해 폭포수처럼 생각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루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어...어?"
「수도로 돌아가. 예토...전에 에스터페른의 아이에 대해 말했었지? 란돌에게 예토의 조사를 부탁해 놓았다. 그 녀석이 아무리 상병신이라도, 지금쯤이면 그럴듯한 결과가 나왔을 거야. 어쩌면 예토가 무엇을 남겨놓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너희들의 일정에 변화가 생길 거다.」
"..."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그는 이미 로샤단의 미래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 기가 질리는 현실감에 루도는 더욱 서글퍼졌다.
「그리고 넌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놔. 펠아람의 저주라는 거, 물론 넌 아니겠지만, 그 이후에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를 말이야.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에 너희는 신의 아이 문제에 너무 깊숙이 발을 집어넣어 버렸어. 비단 너 하나만이 아니야. 카이안도 있고 다른 세 놈도 문제지. 펠아람의 아이가 적으로 돌변한 이상 안개송곳니도 생각하는 바가 있을 거다.」
"....."
「아까 이그제큐터라는 악마와 만났다. 그 자식은 악마들의 염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 제스터도 그렇고...악마 놈들이 안개송곳니에 협력하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그걸 알아내서 꼭 너희들의 손으로...」
"그만해!!"
울분이 차올라 루도는 제리온의 면전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제리온도 살짝 놀랐는지 전달하던 생각의 메시지에 잠시 공백이 생겼다. 루도는 제리온의 손을 바스러져라 움켜쥐며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화가 나고, 또 슬퍼서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상황인지 아는 거야? 죽는다고. 엉? 이제 완전히 끝이란 말이야! 그런데...최후의 최후에 그런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 유언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좀 더...하고 싶은 말을 하란 말이야...."
미련하다. 너무 미련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 된 인간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조차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껏 경험했던 지독한 공포나 비탄 같은 감정은 제리온에게서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인정하고, 그저 받아들인다. 지금껏 보아왔던 죽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 겸허함을 루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제리온이라는 남자는 죽음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을까.
"...유....언.."
그러나 루도의 질타를 받아서일까. 제리온의 눈동자에 조금씩 애틋한 감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별을 앞둔 슬픈 미소에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뒤에 있던 마리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부둥켜안았다.
"배신자야, 이 배신자야!!"
"...?"
"맹세했잖아. 델키아를 떠날 때 우리 모두 죽지 말자고 맹세했잖아!! 그런데 이런 게 어딨어...이 나쁜 인간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맹세를 했던 것도 같다. 길드원들을 잃고, 아렌베일을 추격하기 위한 여정에 오를 때였던가.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역시 마리네다운 섬세함이었다.
루도는 응시한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또한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토해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그...딴 맹세....지킬까보냐...."
하지만 이제는 굳이 감정을 공유하지 않아도 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닫혀가는 눈동자에서 또르륵 한 떨기 눈방울이 처연하게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제리온은 마지막으로 한 남자를 찾았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유독 그 남자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곧 포기하고 눈을 감으려 하는데, 갑자기 군중의 양옆이 좌악 갈라지며 길이 터졌다. 길의 한가운데에는 그가 절실히 찾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칼롯. 피투성이가 되어, 부러진 왼팔과 화살이 꽂힌 다리를 질질 끌며 달려온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자신을 지탱해주던 한 남자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이칼롯의 얼굴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추스르기 위해 재빨리 제리온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단지 찰나였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 엉망으로 구겨지던 인상에 제리온은 키득 웃음을 흘렸다. 다시 등을 돌린 이칼롯의 얼굴은 이전과 다름없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그것으로 만족한 듯 제리온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슴에 담아두었던 진실한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그러니까....너희들은...죽지 마라..."
「뭐냐, 나란 놈은 정말이지...」
그날 레인스터는 지휘관을 잃었다. 리크나이츠는 영웅을 잃었다. 그리고 로샤단은 제리온을 잃었다. 오열하는 동료를 뒤로 한 채 남긴 그의 최후의 유언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간결하고, 또 일상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의 메시지는 그 뒤로도 줄곧 루도의 가슴 속에 남았다. 그는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내 마지막 유언은...훨씬 멋있는 어구일 줄 알았는데. 뭐,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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