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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님의 서재입니다.

람의 계승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저스연
작품등록일 :
2015.03.21 02:01
최근연재일 :
2015.09.01 03:2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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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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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21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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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DUMMY

베른헬트는 모든 걸 들었음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에게 레밀리오는 평생을 함께 해 온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가 배신자라면 이제 누굴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심한 현기증이 일어 순간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칼롯은 쓰러지려는 그를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레밀리오...”


레밀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베른헬트와 달리, 그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이제 없었다. 이칼롯의 배치는 완벽했고, 레밀리오는 그의 함정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저 초연이자 달관이었다.


“어째서인가? 레밀리오, 난 자네를 믿어왔건만...”


베른헬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밀리오는 그의 힐책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완전히 굳어진 그의 표정은 더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소?”


“그게 무슨 소린가.”


“어찌 인간이 신에게 간섭하려 한단 말이오. 신의 아이를 태어나지도 못하게 숙주 안에 묻어두다니, 언어도단이오. 신의 강림을 감히 인간이 좌지우지하려 하다니 나는 인정할 수 없소.”


베른헬트는 길게 탄식했다. 레밀리오의 논리는 상트룸 수도회, 조금 더 나아가면 안개송곳니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대화는 짧았으나 그는 이미 레밀리오가 광적인 신념에 물들어 있음을 눈치챘다.


“언제부터인가?”


레밀리오는 과거를 회상하듯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펠아람의 아이가 부활했을 때...난 내 믿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소.”


“설마 그때부터...”


“우리가 그를 감추려 했기에 그런 참극이 벌어진 것이오. 그 결과를 보시오. 죽은 줄 알았던 신의 아이의 부활과 가린워드 마을에서 벌어진 절대소거. 이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천만에. 인간은 훨씬 하찮고 약한 존재요.”


햇수로 따지자면 12년. 그는 자그마치 12년간 안개송곳니의 하수인 역할을 해온 것이다. 단지 신의 아이를 전부 각성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펠아람의 저주조차도 그에게는 하찮은 문제였다. 멸망이 신의 의지라면, 따르는 것이 순리일 뿐.

이칼롯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레밀리오를 구속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신의 아이는 인간이니까.”


“그게 나와 자네의 차이점이겠지.”


레밀리오는 입가에 초연한 미소를 띠우고서 책상으로 향했다. 달아날 수는 없었다.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해도 외부에 배치된 기사들에게 붙잡힐 게 뻔하다. 텔레포트 스크롤 역시 사전조사에선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칼롯은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그를 대했다. ‘이겼다’라는 작은 승리감이 그의 긴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게 실수였다. 레밀리오는 돌연 펜을 집어 들더니 펜촉으로 있는 힘껏 목을 찔렀다.


“커...허...”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레밀리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경동맥이 파열됐는지 그의 목에선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이칼롯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서 더 알아내야 할 정보가 많았는데...너무나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그의 질문에 레밀리오는 숨넘어가는 신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뒤집혀 현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베른헬트가 어떻게든 살리려 지혈해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레밀리오는 비릿한 피비린내를 뒤로 한 채 숨을 거두었다. 배신자의 최후치고는 초라한 죽음이었다.


“가엾은 사람...어찌 이리도...”


베른헬트는 슬픔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레밀리오가 추악한 짓을 일삼았다 해도, 그에겐 수십 년을 함께해온 동료였다. 그는 결국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반면 이칼롯은 그에 비해선 훨씬 침착했다. 그는 즉시 커튼을 쳐 시야를 원천봉쇄했다. 소란을 듣고 밖에서 경비가 문을 두드리자 그는 재빨리 베른헬트를 독촉해 이를 무마시켰다. 레밀리오는 죽었지만, 아직 그의 계획은 남아있었다.


“주교님, 이 일은 우리만 알고 있는 걸로 하지요.”


아직 안개송곳니는 레밀리오의 죽음을 모른다. 그가 띄운 전서구의 거짓정보를 활용하려면, 오늘 있었던 사고는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춰놓아야만 했다. 베른헬트는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소름 끼치는 냉철함에 진저리쳤다.

진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베른헬트는 말없이 레밀리오의 눈을 감겨 주고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레밀리오의 시신은 란돌과 이칼롯에 의해 은밀하게 처리되었다.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운 고요에 잠겨 있었다.

레이시 역시 그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레밀리오의 서신을 토대로 단원 몇몇을 추려 메르실로 파견했다. 그의 부재가 도마로 떠올랐을 때엔 이미 그들이 함정에 빠진 뒤였다.



***



루도와 레미나는 드디어 폭풍협곡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들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혹독한 추위와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시달리다 보니 언제부턴가 마치 이 산에서 태어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백 년간 격리된 장소, 세상에서 가장 인간의 손때가 덜 묻은 곳.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그밖에 끝도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폭풍협곡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였다.


“팻말 한 번 섬뜩하네.”


500년 전, 신의 아이가 죽은 뒤에도 리크나이츠와 브리토리스 사이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건 이미 손익 이전에 민족 간에 걸친 갈등의 문제였다. 에스터페른의 아이는 그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협곡 사이에 거대한 결계를 쳤다. 카잘산맥에서 물자가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이 협곡뿐이기 때문에, 두 국가의 분쟁은 자연스럽게 종식되었다. 그리고 서로가 단절된 채로 이렇게 500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요점은 즉 결계의 존재 여부였다. 레미나는 팻말에 쓰여진 문구를 보곤 지레 겁을 먹었다.


-여기부터 폭풍협곡 입구. 절대로 진입하지 마시오. 진입 시 생명은 보장할 수 없음.


만약 협곡에 발을 들여놓은 생명체가 있으면, 그 즉시 거대한 폭풍이 협곡 안을 휘감는다. 방문자는 이 폭풍에 휘말려 멀리 튕겨 나가게 되는데, 이런 험한 지세에 추락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케리아돌의 조언대로라면 이미 결계는 사라져 있을 터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루도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던져 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음. 역시 괜찮겠지?”


“나, 난 몰라.”


어차피 들어가야만 하는데도 두 사람은 협곡에서 풍기는 기묘한 바람에 서로 뒷걸음질쳤다. 사실 여부는 상관없이, 그냥 뭔가 분위기가 무섭다. 깎아지른 듯한 두 개의 절벽 사이로 좁다란 길이 펼쳐져 있는데, 풀이나 나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끝없는 암반의 향연이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결계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곳이었는지는 몰라도, 철새 소리 하나 없는 협곡의 풍경은 삭막하다 못해 공포감을 자아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머뭇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도가 먼저 발을 뗐다. 그는 팻말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 버리고는, 협곡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대로(?) 협곡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러네. 신기하다.”


두 사람은 머쓱하게 암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닥이 돌로 되어있어 발바닥이 좀 불편한 것만 빼면 협곡 안은 평탄한 외길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양옆으로 솟아오른 절벽에서 자꾸 무언가가 떨어질 것만 같아 레미나는 연방 고개를 위로 향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걷자 발바닥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단 길가에 자리를 잡고 한숨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어왔는데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입구에서 보았던 그것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끝이 없는 협곡의 연속이었다. 이렇다 보니 루도도 돌아갈 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앞에는 추위를 피할 만한 건물도 없으니, 행동반경은 속절없이 주둔지 부근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루도는 지도를 펴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만약 오늘 안에 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내일은 더 행군속도를 높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식량도 문제였다. 앓아누운 레미나 때문에 며칠을 낭비하는 사이 식량은 차곡차곡 줄어든 상태였다. 남은 양은 많아야 이틀분, 장난으로라도 ‘가방이 가벼워져서 좋다’라는 농담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이 태산인 루도와 달리 레미나는 낙관적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꼭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음?”


“우린 꼭꼭 숨겨진 보물을 찾으러 온 게 아니잖아. 일단 신의 아이가 연구소를 발견하는 것부터가 먼저니까, 나타니엘도 찾기 쉽게 배치를 해놓지 않았을까?”


“말이야 그럴듯하다만...”


물론 방문객을 배려했다면 왜 이런 오지에 연구소를 지었느냐부터 고려해야 하겠지만 루도도 일단은 그녀의 낙관론에 동의했다. 나타니엘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연구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묻히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의 안배를 믿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걸어왔을 때였다. 루도는 길가에 세워진 낡은 이정표를 보고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정표라고는 해도 바위에 정을 쪼아 글자를 새긴 거라 조잡하기 그지없고, 또 세월의 풍화에 글자 자체가 희미해진지라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갈 뻔했다. 내용 자체도 단순했다. 두 줄로 나뉘어서 위쪽에는 ‘←리크나이츠’ 아래쪽에는 ‘브리토리스→’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기점으로 국경이 나뉘어져 있던 걸까? 루도는 의아해하면서도 곧 흥미를 잃고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레미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이정표를, 정확히는 구석 한편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를 더듬으며 말했다.


“이건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루도가 되돌아와 이정표를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리크나이츠’ 글씨 오른쪽 상단에 굉장한 악필로 글자가 새겨진 게 보였다. 그는 눈을 있는 대로 찡그려가며 글자를 해독했다. 내용은 이랬다.


-나타니엘의 연구소↑


“헐...”


둘은 놀랐다. 나타니엘의 연구소를 발견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단서가 너무나도 조악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건 뭐...”


이정표에 낙서라니, 이런 건 어린애들도 유치하다고 안 하는 짓이다. 전설의 대마법사다운 정보를 기대했던 그들로서는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케리아돌의 둥지에서 보았던 화살퍼즐 같은 거 말이다.

어쨌든 단서를 찾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화살표의 방향으로 보아 위로 가라는 모양인데, 시선을 올리자 까마득한 절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저길 올라가라는?”


“아마도...”


물론 일행에게 암벽등반장비 따윈 없었다. 일단 루도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레미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기대도 저버린 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마법 없는데...”


결국, 맨손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위만 바라보고 있자니,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절벽 중간중간에 손을 넣을 만한 홈이 파여 있는 게 보였다. 그걸 짚고 가면 사다리 비슷하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게 가능했다.

다만 아무리 쉬워졌다고 해도 수십m 높이를 맨몸으로 오른다는 건 장난이 아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머리를 싸맨 끝에 두 사람은 최선책을 강구해냈다. 우선 버릴 수 있는 짐은 다 버리고, 레미나의 페더폴(featherfall)마법을 받아 안전을 확보한 후에 등벽에 오르는 것이다. 다만 페더폴의 지속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최대한 빨리 절벽 끝까지 도달하는 게 우선과제였다. 그리고 일단 루도가 위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 레미나가 올라올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으으...전에는 라키시아 성벽을 기어오르더니 이번엔 웬 팔자에도 없는 암벽등반이람.”


루도는 장갑을 끼곤 차근차근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시작을 끊고 나자 파인 홈의 간격이 적절해서인지 제법 수월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등벽은 체력이 문제지, 이미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악력에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빨리 올라가 루도. 떨어져도 안 죽어. 그렇게 굼뜨고 있는 게 더 위험해.”


또한 레미나의 말마따나 안전의 보장도 속도를 높이는 요소였다. 여기서 발을 헛디딘다 해도 페더폴이 지속되는 동안은 아무 문제없으니, 루도는 더욱 박차를 가해 절벽을 올랐다. 아래에서 볼 땐 까마득했는데도, 이런저런 요소가 결합했기 때문인지 루도는 마법의 지속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정상에 다다른 그는 가장 먼저 사위를 살폈다. 그중에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음.”


울퉁불퉁 조성된 암반구조 한가운데에 비죽 솟아 있는 목조건물. 아니, 그걸 건물이라고 칭해야 할지 망설여야 할 정도로 그것의 외관은 참담했다. 외벽이 썩을 대로 썩어 멀리서도 시커먼 부분이 보일 정도고, 규모는 또 어찌나 작은지 뒷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루도는 반신반의하면서 뒷간을 조사했다. 내심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뒷간의 문짝에는 이정표와 같은 조잡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타니엘의 연구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여간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제대로 된 인간이 없지.”


어쨌든 찾았으니 된 거다. 루도가 신호를 보내자 이어 레미나가 절벽을 올라왔다. 중간까지는 그녀가 페더폴을 쓴 채 등반하고, 그 이후부터는 루도가 미리 준비해둔 밧줄로 도와주었다. 나타니엘의 연구소를 보았을 때 그녀가 지은 표정은 처음 루도의 그것과 똑같았다.


“이게...그거?”


“안에 변기 하나 달랑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일단 뒷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2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인 줄만 알았는데, 들어가고 나자 구석에 돌계단이 놓인 게 보였다. 아마 그게 진짜 ‘연구소’로 향하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호오, 이번에는 좀 그럴듯하네.”


둘은 서로에게 밀착한 채 비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역시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된 탓인지, 곳곳에 거미줄이며 물이끼가 잔뜩 쳐져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한동안 걸음을 이어갈 때였다. 돌연 허공에 푸른 글자가 떠올라 일행을 가로막았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생겨나자 두 사람은 당황하여 물러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시발, 깜짝이야!!”


빛으로 된 문구는 그런 두 사람을 조롱이라도 하듯 허공에 넘실넘실 떠 있었다. 루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구를 읽었다.


“나타니엘의 연구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가 말을 맺자 문구는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조합의 단어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레미나가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무분별한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제한된 사람만 통행이 허가됩니다. 통행을 원한다면 지금부터 제가 내는 퀴즈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머,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하는데.”


둘은 문자가 뒤섞이는 동안 계단에 대충 걸터앉았다. 원체 공간이 좁아서인지 나란히 앉아 통로 자체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루도가 슬그머니 앞으로 지나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나 문자 뒤에 형성된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버렸다.

이내 글자가 섞여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럼 첫 번째 문제입니다.


“뭐야 이거, 문제가 여러 개야?”


-거 참 말 많으시네. 지나가기 싫으십니까?


“....”


아무래도 안쪽에서 문자를 조작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루도는 군소리 없이 문제에 집중했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는 누구일까요?


과연, 이정표에 낙서해놨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문제의 수준도 참 질이 떨어졌다. 이런 문제의 답은 으레 그런 것이기에, 레미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타니엘?”


-딩동, 정답입니다. 이번 방문객은 제법 안목이 높으시군요.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이 연구소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루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아이겠지, 보나마나.”


그러자 갑자기 글자 중 ‘목’자가 날아와 루도의 이마를 치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어 바라보자 문구는 이렇게 변했다.


-이왕 풀 거면 좀 긍정적으로 임해 주십시오. 옆에 여자 분처럼.


“...네.”


뭔가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지만 루도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남의 집에 가면 주인장의 말을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그의 저자세가 만족스러웠는지 문구가 이번에는 제법 휘황찬란한 빛을 내며 뒤섞였다.


-어쨌든 정답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문제입니다. 이번 문제는 앞서의 장난이랑은 다르니 긴장하시기 바랍니다.


제법 위협적인 경고문에 레미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루도 역시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나오나 싶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이윽고 문제가 제시됐을 때, 두 사람은 맥 빠진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누구일까요?


확실히, 일행이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한 번 본 이상, 답은 자명했다. 루도는 예의상 레미나의 이름을 한 번 띄워보는 것도 잊은 채 자신 있게 말했다.


“케리아돌.”


-올, 어떻게 알았지? 정답입니다.


쿠르르르...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루도는 그제야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게 거대한 석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걷혀감에 따라 내실의 정경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담황색 태피스트리,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천장의 샹들리에, 그리고 폭은 좁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통로 사이사이에서 고풍스러운 멋을 뽐내고 있는 정교한 부조들.

두 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언제 나타난 건지 작달막한 남자 꼬마 하나가 그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곳이 바로 대마법사 나타니엘의 연구소입니다.”


루도는 깜짝 놀라 인사를 건넨 꼬마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정장차림에 넥타이까지 맨 그는, 아무리 봐도 10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500년간 봉인되었던 장소에 존재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현실감 없는 소년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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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5) +10 15.05.30 980 34 21쪽
321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4) +5 15.05.30 877 26 19쪽
320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3) +6 15.05.27 1,021 30 18쪽
319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2) +2 15.05.27 748 28 15쪽
318 람의 계승자 - ep.6 - 사자의 심장(1) +3 15.05.27 769 29 14쪽
317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4) +1 15.05.27 900 26 18쪽
316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3) +8 15.05.26 898 23 27쪽
315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2) +2 15.05.26 773 24 23쪽
314 람의 계승자 - ep.6 - 시간싸움(1) +3 15.05.26 866 20 28쪽
313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5) +2 15.05.26 845 26 21쪽
312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4) +1 15.05.26 892 25 18쪽
311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3) +3 15.05.26 1,089 24 25쪽
310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2) +3 15.05.25 874 25 28쪽
309 람의 계승자 - ep.6 - 세실(1) +2 15.05.25 970 22 18쪽
30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1) +2 15.05.25 725 26 23쪽
307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0) +1 15.05.25 749 20 22쪽
306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9) +1 15.05.25 769 20 14쪽
305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8) +4 15.05.25 806 27 17쪽
304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7) +2 15.05.24 935 26 19쪽
303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6) +3 15.05.24 866 22 13쪽
302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5) +2 15.05.24 943 28 19쪽
301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4) +1 15.05.24 843 21 16쪽
300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3) +2 15.05.24 883 23 24쪽
299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2) +2 15.05.24 1,030 29 18쪽
298 람의 계승자 - ep.6 - 봄은 기다리지 않는다(1) +2 15.05.24 910 25 21쪽
297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5) +6 15.05.23 1,107 21 29쪽
296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4) +1 15.05.23 847 23 20쪽
295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3) +1 15.05.23 948 22 20쪽
294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2) +3 15.05.23 1,137 20 21쪽
293 람의 계승자 - ep.6 - 남매(1) +2 15.05.23 1,080 27 17쪽
292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3) +3 15.05.23 1,140 25 19쪽
291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2) +10 15.05.21 1,053 28 22쪽
» 람의 계승자 - ep.6 - 하나의 몸, 두 개의 영혼(1) +2 15.05.21 1,110 26 19쪽
289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6) +2 15.05.21 1,080 26 25쪽
288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6) +3 15.05.21 937 24 27쪽
287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5) +1 15.05.21 1,002 26 25쪽
286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4) +5 15.05.20 1,017 29 21쪽
285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5) +3 15.05.20 930 27 21쪽
284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4) +3 15.05.20 909 24 14쪽
283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3) +1 15.05.20 1,044 27 24쪽
282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2) +3 15.05.20 749 23 19쪽
281 람의 계승자 - ep.6 - 토벌(1) +1 15.05.20 993 28 22쪽
280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3) +11 15.05.19 1,011 31 30쪽
279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2) +3 15.05.19 1,224 28 17쪽
278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5) +9 15.05.18 1,137 24 18쪽
277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4) +2 15.05.18 809 24 17쪽
276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3) +4 15.05.18 942 22 24쪽
275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2) +3 15.05.18 931 23 23쪽
274 람의 계승자 - ep.6 - 삼파전(1) +2 15.05.18 1,029 25 19쪽
273 람의 계승자 - ep.6 - 겨울, 설산, 그리고..(1) +2 15.05.18 974 22 19쪽
27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3) +1 15.05.18 1,221 25 25쪽
27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2) +2 15.05.17 1,011 29 25쪽
27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1) +1 15.05.17 867 20 22쪽
269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0) +1 15.05.17 966 23 23쪽
268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9) +1 15.05.17 1,039 23 20쪽
267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8) +6 15.05.17 907 25 22쪽
266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7) +5 15.05.16 992 26 22쪽
265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6) +1 15.05.16 888 22 26쪽
264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5) +2 15.05.16 1,030 29 26쪽
263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4) +1 15.05.16 1,001 24 24쪽
262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3) +3 15.05.16 857 23 25쪽
261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2) +2 15.05.16 926 23 26쪽
260 람의 계승자 - ep.6 - 갈림길(1) +3 15.05.16 1,061 31 31쪽
259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6) +8 15.05.14 1,064 29 22쪽
258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5) +7 15.05.14 914 22 11쪽
257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4) +4 15.05.14 1,032 21 20쪽
256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3) +3 15.05.14 894 22 31쪽
255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2) +5 15.05.14 1,000 24 27쪽
254 람의 계승자 - ep.6 - 제리온이 있음이라(1) +6 15.05.13 904 24 30쪽
253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10) +3 15.05.13 943 22 24쪽
252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9) +1 15.05.13 995 21 27쪽
251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8) +1 15.05.13 897 18 27쪽
250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7) +4 15.05.12 1,088 26 27쪽
249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6) +5 15.05.12 995 25 27쪽
248 람의 계승자 - ep.6 - 레인스터 방어전(5) +3 15.05.12 1,103 25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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